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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장암면 장하1리)
강병국(1915~1984), 강성모(1915~1940)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930년 1월 부여지구에서 강일(姜日) 등과 함께 격문을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데 참가하여 연락업무를 맡았다한다. 그후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문맹퇴치운동에 가담하여 1933년 4월 장정학당의 한글교사로 활동하면서 금강공산협의회 조직의 일환으로 부여농민구락부를 만들었다. 그는 강일구(姜日求)·최재봉(崔在鳳)·장창선(張昌善)·전영철(田泳喆)·조병철(曺秉喆)·허원범(許元範)·노명우(盧命愚)·강도형(姜道馨) 등 동지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항일지하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12월 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근 2년간 옥고를 겪어야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석기(1862~1931)는 1914년 여름에 백두산 최고봉에 올라가 단군천조에게 제향을 드리고 팔과 가슴을 칼로 그어 그 피를 내서 글을 써 조국을 회복하기를 기도하였다. 1915년 7월에는 백두산 아래 내도산에서 수도·선교하면서 「초홍호자동포문」, 「조만동포동맹서」등 경고문을 지어 배포하였다. 1920년에는 서울에 남도본사를 재건하고 유지들을 포섭하여 시교하였으며 그 후 단군유적을 받들고 선교하여 민족문화 선양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일(1911~1974)은 1926년 6월 고향에서 군중들과 함께 일본학교 폐지를 주장하며 시위를 펴다 붙잡혔으나 미성년자로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후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호응하여 동조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30년 2월 유복윤(柳福允)·노명우(盧明愚) 등과 함께 항일격문을 제작하여 부여농업보습학교에 살포하였는데,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에는 비밀결사 화성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펴던 중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 1936년 대성당의 재건을 시도하다 재차 붙잡혀 1년 동안 구금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일구(1910~1961)는 1931년 10월 충남 부여군 구룡면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구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강일구는 1931년 10월 5일 구룡면 금사리(錦寺里) 산중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3일 보다 적극적인 운동실천을 위해 동회를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연극, 강연 등을 개최해서 농민의 계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동년 4월 중순경에는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동년 5월 부여군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일구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철구(1894~1943)는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에 건너가 북간도 천영학교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조력하였다. 이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해 가지고, 만주에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수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모집 차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이에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을,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을,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각기 동지로 영입하고 동년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김재설·김삼현·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강경(江景)에서 김찬형(金燦亨)·김철수(金哲洙) 등을 영입하는 한편 이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였다. 이해 10월에는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 집에 은신 활동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김정제(金廷濟)·조창호(趙昌鎬)·김목현(金穆鉉) 등을 다시 동지로 확보하고, 부호가택을 은밀히 방문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뒤 다시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활동을 소상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동지 박창규·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모금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재만 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되어 동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1943년 목단강성(牧丹江省) 가목사(街木斯)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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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국 구 묘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1월 부여에서 격문을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연락하는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 후 문맹퇴치운동에 가담하여 장정학당의 한글교사로 활동하였으며, 강일구, 최재봉 등 동지들과 항일지하 운동을 하다가 1933년 일경에 붙잡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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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추모비
종문도사교성사 호석 강석기 선생 추모비는 충남 부여에 위치한 강석기의 비이다. 강석기의 이명은 강우(姜虞), 강호석(姜湖石)이며, 대종교 교주 다음의 최고위 직책에 임명되었고, 북로군정서의 고문도 함께 맡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만주로 망명 후 활동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체포되어 귀향조치되었다. 둘째 아들 강철구, 조카 강일, 야학운동을 한 강성모, 강일구, 강병국 등도 애국지사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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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구 추모비
애국지사 강일구선생 추모비는 충남 부여에 위치하였으며, 강일구의 비이다. 강일구(1910-1961)는 1931년 충남 부여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으며, 1931년 10월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고, 이후 1933년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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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추모탑
독립유공자추모탑은 강석기 강철구 강병국 강성모 강일 강일구 김정제 노명우 노명우 문경섭 문장섭 박길화 류기섭 이호철 조병순 조병철, 16분의 애국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8월 세워진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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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모 추모비
애국선열 강성모 지사 추모비는 충남 부여에 위치해 있으며, 강성모의 비이다. 강성모(1915-1940)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부여지역에서 강일(姜日) 등과 함께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였고, 그후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문맹퇴치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금강공산협의회(錦江共産協議會) 조직의 일환으로 부여농민구락부(扶餘農民俱樂部)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지하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의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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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 추모비
강철구(1894-1943)의 이명은 해산(海山)이며,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로 가 북간도 천영학교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비서로 조력하였으며, 같은해 재무국장 윤정현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후 군자금 모집 운동을 확대시키기 위해 많은 동지들을 확보하였고, 부여에서 박창규, 박남규, 이기범에게 독립공채를 통한 군자금 마련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3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에서 대종교 포교를 진력하였으며,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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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초촌면 세탑리)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조촌면 세탑리)은 충남 부여에 위치하였으며, 2019년 9월에 애국지사 한기안, 한사용, 한학삼, 한성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피탈되고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의 상황에서 의병전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07년 12월 한기안, 한사용, 한학삼, 한성수는 거주 지역에 의병이 주둔하자 지원활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의병은 같은해 12월 12일 세동리와 신송리 경계에서 일본군 강경수비대와 1시간 여에 걸쳐 교전을 치렀으며, 이날 한기안, 한사용, 한학삼, 한성수는 일본군 수비대에 몰래 접근하다 발각되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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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직 기념관
임병직(1893-1976)은 1913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오하이오대학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한인국방경비대 등에서 활약했고,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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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직 추모비
임병직(1893-1976)은 1913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오하이오대학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한인국방경비대 등에서 활약했고,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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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초촌면 응평리)
임병직(1893-1976)은 1913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오하이오대학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한인국방경비대 등에서 활약했고,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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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충화면 가화리)
양재흥 선생은 1919년 4월 29일 송기면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 유성렬등 6명이 경찰출장소에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고시상, 김인두, 박재엽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9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