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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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묘
독립투사 류성호(柳晟浩)은 1909년 3월 9일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류석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류석우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선 애국지사이시다. 어렸을 적 일찍이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선생은 당시 일제 식민지 정책의 모진 강압과 착취에 울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독립투쟁에 몸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936년 9월 중국에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상해 남경 방부지역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기밀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이후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선생은 충남 서산읍 석남리에 강제 압송되어 거주 및 활동이 10리 이내로 제한되는 등 엄중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41년 11월 일경의 체포 수감 기도를 류붕렬 서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알게 된 선생은 그들의 허점을 틈타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에 힘쓰셨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청년 육성 사업, 건국 사업에 힘쓰신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1950년 1월 19일 사망한다.
부두전(부림전) 기념비
부림전(1920-1977)의 이명은 부두전이고,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일본에 있는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에 재학 중 1940년 5월 김봉각(金奉珏)·강금종(姜金鍾)·김병목(金丙穆) 등과 함께 흥아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흥아연구회는 1940년 5월 26일 계림동지회라고 개칭되었고, 부림전은 세계 동향 연구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계림동지회는 비밀은 누설하지 말 것, 반드시 출석하되 시간 엄수할 것, 회의는 반드시 한국말로 할 것, 행동을 삼가며 주색(酒色)에 빠지지 말 것, 동지의 영입은 김봉각·강금종·김병목·고봉조(高奉朝)·한만숙(韓滿淑)·부림전 등 6명의 전원 합의에 의해서 결정할 것, 회의 결과는 기록에 남기지 말 것, 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로 하되 장소 기타에 관한 것은 김봉각의 지령에 따를 것 등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계림동지회는 지식층을 포섭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연구하게 하고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 관계자를 회원으로 포섭하는 등 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부림전과 동지들은 1941년 2월 26일 체포되어 1942년 10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창제 묘
안창제(1866~1931)는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안효제(安孝濟)의 서제(庶弟)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재혁 거리
박재혁(1895~1921)은 부산(釜山) 사람이다.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있었고 왜관(倭館)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6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14일 오후 2시 30분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몇마디 환담을 한 후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키니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 채 붙잡혔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지청천 윤용자 부부묘
지청천(1888~1957)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윤용자(1890~1964)는 지청천의 부인으로서, 1930년대 가족을 이끌면서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40년 6월에는 정정화(鄭靖和)·김병인(金秉仁)·이헌경(李憲卿)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여성 조직으로 1940년 6월 17일 창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요인들의 생계를 보살피고,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보육과 교육에 힘썼던 단체로 알려져 있다. 윤용자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남편 지청천, 아들 지달수(池達洙), 딸 지복영(池復榮)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헌신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지청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2017년 윤용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영선 이의순 부부묘
오영선(1886~1939)은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의 사위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당시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경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1914년 12월 이동휘와 함께 길림성(吉林省) 동녕현(東寧縣) 나자구(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경기도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20일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院)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하다가 1921년 2월 24일 면직되었다. 1923년 10월에는 상해 거주 한인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僑民團)의 의원으로서 교민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가 설립되어 임시정부 옹호파와 국민대표회의 개조파에서 헌법기초위원(憲法起草委員)을 선출할 때 위원으로 임명되어 기초위원회 규정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4년 1월 12일부터 동년 12월까지 상해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박은식(朴殷植)이 임시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을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서 동년 11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중국 동삼성 소재 항일독립운동단체의 분규를 수습 조정하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총재인 손정도(孫貞道)가 2년동안 간도에 가 있을 때 총재 직무대행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6년 안창호(安昌浩)의 주창에 의하여 조직된 임정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원회(臨政經濟後援會 發起準備委員會)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상해에서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하여 안공근(安恭根)회장과 함께 한국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면서 대동단결을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신임시약헌(新臨時約憲)이 공포되어 개각된 김구(金九) 국무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이동녕(李東寧)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외무부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4월에는 군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9월 사임하였다. 1931년 11월 6일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와병으로 인하여 결원처리된 후 1939년 3월 10일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이의순(1895~1945)은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 이동휘(李東輝)의 차녀이며 남편은 상해지역의 독립운동가 오영선(吳永善)이다. 1902년경 부친이 경기도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자 할아버지 이발(李發), 언니 인순(仁橓) 등과 함께 7세의 나이에 서울로 이사와 성장했다. 1911년 가을, 서울을 떠나 성진(城津)에서 살다가 부친이 만주로 망명하자 부친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국자가(局子街)로 이주하였다. 동년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민족학교인 명동학교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근방의 마을마다 야학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도 개최하여 이를 계기로 1919년 명동여학교를 병설하는 등, 간도지역 여성 민족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18년 가을에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 이의순은 그곳 신한촌(新韓村)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이곳의 애국지사 채성하(蔡聖河)의 맏딸 채계복(蔡啓福)과 같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당시 회원은 50명이었다. 한편 이의순은 미래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하여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부친이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자 이의순은 1920년 할아버지 이발과 상해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오영선과 결혼하였다. 그 후 이동휘가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오게 될 무렵 이의순은 상해에 계속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11일 이의순은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김두봉(金斗奉)의 처 조봉원(趙奉元)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해한인부인회를 개조하여 보다 급진적인 조직인 상해한인여성동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상해지역 여성조직의 분열을 가져오는 점이 있어 김구(金九) 등의 중재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해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때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 땅에서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오영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이의순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손정도 박신일 부부묘
손정도(1881~1931)는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 일대에 파견되어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는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독립운동 시위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동년 4월 10일, 11일 양일간에 걸쳐 이동녕 등 동지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개최하였다. 회의를 통해 그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이 무렵에 서울에서 소집된 국민대회에서는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한성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서울에 체재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노오불에게 부탁하여 국내에서 모금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전달받기도 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 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21년 3월 3일에는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동년 8월에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되어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동년 8월에는 김 구·여운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에 뽑혀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의 알력이 심해짐에 따라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며, 그는 이 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여 동년 2월에 재정위원에 선임되었으며, 홍 진(洪震)·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시키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길림으로 돌아가 기독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워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3월 1일에는 이곳에서 양기탁(梁起鐸)·왕삼덕(王三德)·최 일(崔日)·박기백(朴起白) 등 동지들과 기념식을 갖고 앞으로의 독립문제와 실력양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주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고활신(高豁信)·오인화(吳仁華) 등의 초청으로 길림에서 민족운동문제를 협의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동양의원에서 병사하였다. 박신일(미상~1968)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손정도와 결혼했다. 손정도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같은 해 4월 13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손정도는 1922년까지 상하이에 머물며 국내 유지들로부터 모은 독립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 활동을 주도했다. 박신일은 이때 남편과 함께 상하이에 머물며 남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자신도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922년 손정도가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지린으로 이동하자 박신일도 함께 거처를 옮겼다. 지린에서 손정도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손정도는 자신의 교회를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로 제공했다. 이곳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찾아와 손정도와 함께 독립투쟁 방법을 논의했다. 박신일은 남편을 찾아온 독립운동가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등 생활을 지원하고, 독립자금의 융통을 도왔다. 1931년 2월 19일 손정도가 병사한 후에도 박신일은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손정도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박신일에게 2020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팔균 이수명 부부묘
신팔균(1882~1924)은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로 활약하다가 동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윤세복(尹世復)·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北京), 상해(上海), 서백리아(西伯利亞)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東三省)의 지도자로서 여 준(呂準)·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서 일(徐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吳光鮮)·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敬天)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梁世奉)·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旺淸門二道溝)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東川)이라 하여 이청천(李靑天)·김경천(金擎天)과 함께 독립군 인재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었으나 아깝게 전사 순국하였다. 임수명(1894~1924)은 1912년 서울 모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을 알게되어 1914년 결혼하였다. 그후 북경으로 망명한 부군의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부군을 따라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8월 1일(음) 신팔균이 통의부(統義府)사령관 소재지를 습격하는 중국 마적과 전투 중 전사하자,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신팔균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임수명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광선 정정산 부부묘
오광선(1896~1967)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이어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국민회군의 홍범도(洪範圖), 서로군정서의 이청천(李靑天), 청산리에서 대승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 등이 밀산에서 만주 독립군을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명지휘관으로서 조동식(趙東植)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 연합군은 노령 자유시로 이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흑하사변에 봉착하는 일대 수난을 겪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으며,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비하여 한국독립군이 편성되자 그는 의용군중대장으로서 무장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12월 11일 그는 사령관 이청천을 수행하고 최 악(崔岳)·심만호(沈萬浩) 등과 함께 중국 호로군사령관 정 초(丁超)를 방문하여 한·중 연합군을 구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군과 대적할 것을 약속하고 대일전을 계속하였다. 1933년 7월초에는 수분하 대전자(綏芬河大甸子)에서 일군 대부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한·중 연합군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그후 동녕현(東寧縣)의 일군을 계속 추격하다가 실패로 끝나자 한·중 연합군은 내분이 일어나 독립군은 자연히 흩어지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충추장교를 양성할 책임자로서 20여년간 피흘려 항쟁하던 동삼성(東三省)을 뒤로 하고 황학수(黃學秀)·김관오(金官五)·김학규(金學奎) 등과 이청천을 대동하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하였다. 1933년에 김 구(金九)가 낙양 군관학교 내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자, 총책임자 이청천을 비롯하여 교성대장(敎成隊長) 이범석(李範錫), 교관으로는 그와 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 등이 초청되어 광복군 양성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940년 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재차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8·15광복으로 귀국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육군대령으로 임관되었다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현숙(이명 정정산, 1900~1992)은 1918년경 서로군정서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부군 오광선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후 1935년까지 만주 길림성 일대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이후 중국 남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여 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4년경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오광선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정현숙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영삼 김은주 부부묘
신영삼(1896~1946)은 평안남도 평원 사람이다. 1915년 서울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한 후 1918년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건너가 교포들의 의료사업과 민족사상 고취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상해로 건너 가 유동열(柳東說)·김규식(金奎植)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중국항공창의 군의관으로 대일항쟁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1932년 4월에는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최용덕(崔容德)·민병길(閔丙吉)·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그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남경에서 중국군에 근무하면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김원봉(金元鳳)·김용기(金容基) 등과 중견군사간부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다. 1936년에는 중경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나창헌(羅昌憲)과 함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평안도 대표로 의정활동에 참여하여 광복시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 3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2월 8일에는 신한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조국의 광복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김은주(1905~1994)는 1931년 4월 민족의 자활을 목표로 하는 공평사에 참여하여 제6조 조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 충칭으로 이동해 1944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남편인 신영삼(申榮三)은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신영삼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김은주에게 202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회영 이은숙 부부묘
이회영(1867~1932)은 서울 저동 사람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9년 봄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는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그와 김 구(金九)·이동녕(李東寧)·김기홍(金基弘)·조성환(曺成煥) 등이 함께 모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여름 그는 독립기지 건설의 적지를 찾기 위하여 만주에 파견되었으며,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지방을 선정하여 개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석영(李石榮)·이시영(李始榮) 등 형제들과 일가권속을 모두 이끌고 1910년 봄 이 황무지로 망명하였다. 1910년 봄 추가장(鄒家莊)에 정착한 그는 1912년에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913년 동지들의 암살을 목적으로 일경이 파견되었다는 정보에 접하고, 다시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광무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광무황제가 붕어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7월에 남경에서 한·중·일·필리핀·대만·안남(安南) 등 각국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그는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무정부주의운동은 약소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이요, 한국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은 곧 무정부주의운동인 까닭으로 각국 동지들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1930년 4월 국내에서 신현상(申鉉商)·최석영(崔錫榮)·차고동(車鼓東) 등이 수만원의 운동자금을 마련해 오자, 그는 이 돈을 자금으로 하여 만주에 총력을 집중하고, 상해·복건·북경에 연락부를 둘 것을 제안했다. 1931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상해에 모였으며 그를 의장에 추대하여 의열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마련함과 아울러 주만일군사령관 암살등을 목적으로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노령인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숙(1889~1979)은 남편 이회영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이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투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했고, 1919년 중국 북경으로 가서 이회영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다 1925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앨버트 테일러 묘
테일러의 본업은 광산업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우연히 조선호텔을 들렀다가 고종황제의 국장 취재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통신원(기자)의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그날 테일러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그는 간호사들이 외국인 전용 병실 침대 밑에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뒤, 이를 입수해 보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독립 운동뿐만이 아니라 3·1운동 관련 기사로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테일러는 3월 3일 치러진 고종의 국장도 취재했다. 테일러는 고종의 국장 취재 이후 3·1운동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그는 4월 16일 일본군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 그의 기사는 뉴욕타임즈 4월 24일자에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Say Japanese Troops Massacred Koreans)’ 제하 기사로 게재됐고 일본에서 발간되던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져(The Japan Advertiser)’ 4월 27일과 29일자에도 보도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외에도 테일러는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투사에 대한 재판도 취재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에 실린 손병희 선생(1861~1922) 등 독립투사 재판 관련 기사에는 “신문기자석에 처음으로 서양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재판의 광경을 제일 먼저 세계에 소개할 미국 연합통신사의 통신원 테일러 씨더라”고 게재돼 있다. 테일러는 1923년 종로구 행촌동 내,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붉은 벽돌집을 짓고 조선에서의 삶을 영위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정점에 치닫던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다. 테일러는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 정부와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며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1948년 6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