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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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81 건
최제우 상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구수마을 소나무, 당산나무(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선포 지역)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손화중(1861~1895)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보국안민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키고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근간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하던 중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수강산 산당 이씨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욱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부경, 처남 유용수가 또다시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화중은 재실지기인 이봉우의 고발로 1904년 12월 11일 피체되어 195년 3월 30일 그의 나이 36세로 전봉중, 최경산,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첨금정 바위(동학농민군 진격로)
첨금정(沾衿亭) 바위는 예향천리 마실길에 위치한 동학농민군 진격로 중 하나이다. 논 가운데에 첨금정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이기도 하다. 바위에 '萬歷二十五年十月 日 統制使李舜臣銘 宣武原宗功臣 金海金公 緯,한,天貴,殉節'(만력 25년 10월 일 통제사 이순신 명 선무원종공신 김해김공 위, 한, 천귀, 순절)이라 새겨져 있다. 1923년에 발행된 무장읍지에 '첨금정은 재향 동5리에 위치하며 암석과 수목이 있는 곳으로 정인(征人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과 송별시 일가족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며 옷깃으로 눈물을 적신 곳'이란 기록이 있다. 이러한 명칭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정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김해김씨 장사군 파보와 선무원종공신록권(만력 33년 4.16, 1605)을 살펴보면 임진왜란때 진도 싸움에서 적의 독화살을 맞고 장열한 죽음을 당한 강동현령 김위의 반장시 이순신 장군이 참석하여 장례를 치룬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또한 김위를 비롯하여 아버지 천록, 할아버지 수연, 동생 현, 혼, 사촌 8명등 조,자,손, 3대 13명이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관련하여 공신록에 등제되어 있음도 볼 수있다. 이곳 들녁 이름도 첨금뜰이라고 부른다.
동학농민군 진격로(사신원)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사신원에 대한 안내판이다. 고대부터 교통기관의 하나로써 이용됐던 사신원은 고려, 조선시대 때 숙박, 통신, 교통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특성으로 인해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끄렁재와 사신원 그리고 인천강 사이에서 하룻밤 묵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 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문원덕 공적비
원암 문원덕(1915-1986) 선생은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서 태어났다. 남평 문씨의 집성촌으로 집안 모두가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문원덕 지사의 조부가 문장로 의사이다. 문장로 의사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 태안접주로 태안관아, 승전곡, 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해미, 매현, 홍주성의 전투를 치렀다. 문원덕 의사의 부친은 장남 문병석 의사인데 기미년 3·1혁명 당시 예산 등지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문원덕 선생의 양부가 차남인 문귀(거북 구)석 지사가 되신다. 문귀석 지사는 태안관아에서 문장로 의사를 체포하기위해 혈안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 대신 나를 잡아가라"외쳐 자진체포, 총살을 당하였다. 문원덕 선생은 1965년 서산, 태안 지역의 동학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충청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288명의 희생자와 유족의 명단을 발굴했는데 거의 유일한 기록에 가깝다.또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기록인 <문장준 역사>와 <조석헌 역사>를 알렸다. 문원덕 선생의 집안은 위, 아래 4대에 걸쳐 동학정신 선양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원덕 선생의 딸인 문영식 회장 역시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 회장으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태안지역 동학전래비
태안지역 동학전래비는 2000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서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내용을 후대에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태안 지역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1890년으로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에서 살던 최형순에 의해서였다. 최형순은 1890년 3월 16일 경주에서 제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을 만나 동학에 입도하였다. 최형순은 고향으로 돌아와 서태안 지역을 중심으로 충청도 전역에 걸쳐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포교는 매우 빠르게 이뤄졌으며 이원면 포지리를 지나 원북면 방갈리에까지 이뤄졌다. 특히 방갈리는 태안지역 동학의 핵심 거점이 되었는데 1894년 9월 그믐날 자정에 예산 본포에서 기포하여 당시 태안 감옥에 투옥되었던 동학의 지도자를 30여명 구출하였으며 이 때 기포한 동학군 중에 태안 출신은 수백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뒤 10월 15일 태안, 서산, 해미지역에서 재기포한 수 만명의 동학혁명군은 해미승전곡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동학군이 승리하고, 다시 동월 26일의 예산 신례원 전투에서도 동학혁명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0월 28일 홍주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동학 혁명의 관련 인물과 유가족들은 혹독한 보복을 겪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평가되다가 1960년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1994년 대중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그 결실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되었다. 본 전래비 역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건립되었다.
교장바위(동학농민군 지도자 피체지)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백화산에 위치한 교장바위에 세운 표지석이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주둔하였고 그 지도자들이 체포된 곳이다. 1894년 11월 이곳 태안 백화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관군이 몰려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유규회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을 체포하고 그들을 압송해 갔다. 이 내용은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정리한 「순무사정보첩」에 기록되어 있다. 교장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시 태안 동학농민군들이 붙잡혀 포승줄에 묶여서 교장바위에서 학살을 당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잡으면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하고 창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하고 생매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살(絞殺: 목졸라 죽임)하거나 장살(杖殺: 때려 죽임)하였다 하여 교장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1년 태안군에서 비석을 세워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이 비석을 세웠다.
김학서 송덕비
충청남도 태안 백화산에 위치한 천도교도 청암(淸菴) 김학서(金鶴瑞)의 송덕비이다. 청암 김학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이 비문은 원암 문원덕이 1970년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따르면 김학서의 도호는 청암(淸菴)이며, 도정(道正:천도교단 내의 직책 이름 중 하나)이었다. 김학서는 포덕 35년(1829) 예포 대장 박덕칠의 지휘로 봉기하였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김학서는 백화산에서 집단으로 처형당했던 많은 동학 농민들의 영령을 추모하여 합동위령제 올리도록 시작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학정(동학군 숙영지)
전북 고창에 있는 동학정은 동학군이 숙영(군대가 병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는 일, 훈련의 일종)했던 곳을 기리기 위해 2014년 세워진 정자이다. 이곳은 고창군, 부안군, 정읍시, 장성군, 영광군, 무안군, 함평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불리었으며, 휴식처(윷판두재), 식수터, 마을 주변에 존재하는 20여 개의 벙커와 땅굴 등이 보존되어 있어 문화적,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고창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일어난 각 지역 민란이 전국적인 항쟁으로 옮아 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원진녀 집(최시형 피체지)
원진녀의 집은 최시형이 1898년 원주에서 붙잡힌 바로 그 장소이다.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당시 최시형은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관군의 추적을 피해 고산리 송골마을 원진녀의 집으로 피신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