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홍범식 추모비
홍범식(1871 - 1910)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 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가족에게 남긴 유서 10여 통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요지는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현등사 삼충단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위치한 운악산 현등사에 설치된 삼충단에 관한 안내판이다. 가평 삼충단은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삼충단은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10년에 설립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하였다. - 조병세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가평에 은거하던 의정대신으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려 상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최익현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1906년 을사조약 두 차례 모두 의병을 궐기한 인물로써 1906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 민영환 선생은 무관 출신으로 을사조약을 보고 대한문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상설 유허비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설 동상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설 숭모비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윤제 공적기념비
조윤제(1904 - 1976)는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창설되자 제1회생으로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어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으며, 1929년 3월에 동 학부를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다. 이어 동 학부의 촉탁(囑託)·조수를 거쳐 1932년 3월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 일제 때, 중등학교의 교원)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4월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사임, 자유의 몸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이던 손진태(孫晉泰), 뒤이어 대학 후배인 이인영(李仁榮)과 모여 학문 연구방법론을 토론하고, 그 결과 민족사관의 입장을 밝혔다. 그 뒤 경신학교·양정중학교·동성상업학교·천주교신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하였다. 1945년 8월 조국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어 동 대학의 법문학부장, 개편된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및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71세 때인 1974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남궁억 선생상(양양초등학교)
남궁억(南宮檍)은 1905년 12월 26일 양양군수로 임명받고 1906년 2월에 부임하였다. 이것이 양양에 일찍이 신문화 교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궁억은 근대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으로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각과 교육을 통한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 인물이었다. 남궁억은 부임하자 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기로 하였으나, 유교를 숭상하는 대부분의 지방 유림들은 비협조적 일수 밖에 없었다. 남궁억 군수는 국권 회복과 민족 부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본인의 사재(私財)와 문중을 설득하여 기부금을 모으니, 결국 유림에서도 1만량의 기금을 출연했고 이를 기본금으로 현산학교를 세웠다. 1906년 9월 8일 현산학교가 인가 되었고, 1910년 4월 1일 양양 공립보통학교로, 1951년 9월 1일 양양 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 양양초등학교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계승한 영동지역의 초등교육의 산실인 것이다. 이렇게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현산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호별 방문을 통해 설득해 보았고, 자녀가 있는 집마다 의무적으로 한 명씩 학교에 강제로 보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고성과 강릉, 삼척 등 각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약 2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학제는 3학년 과정으로 학생들의 나이는 17~8세까지 상투를 튼 학생도 있었다. 남궁억 군수는 학생들에게 직접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산수, 역사, 일어, 체조, 국문과 한문도 가르쳤다. 수업료는 없었고 공책과 연필을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국권갱생(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교육 밖에 없다며,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 시키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여 후일 양양 3·1만세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문기 추모비
성암 이문기(省庵 李文基)는 구한말의 국운 쇠잔기에 출생하여 포악한 왜제의 식민통치와 8.15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과 6.25 사변의 동족상잔 및 5.16 군사정권의 전제를 두루 겪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하여 어린 학도들에게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중흥은 교육이 그 관건임을 자각하여 경남도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후 1925년 단성보통학교 훈도로서 사도 외길의 첫 출발을 하였다. 이후 가야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에 모교인 함안보통학교로 전근하신 후 8.15 해방때까지 후배 제자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통해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고취하셨다. 1967년 3월 23일 과로로 인해 향년 63세로 집무실에서 순직하였다. 해당 비석은 이문기 선생의 후배와 문생들이 뜻을 모아 모교가 보이는 곳에 이문기 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황의돈 추모비
황의돈(1890-1964)은 충청남도 서천 출생의 역사학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해원(海圓)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방면으로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훈(李昇薰)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16년 YMCA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를 강의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이후 말년에는 주로 국사와 불교의 선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 75세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술회하였듯이 초년에는 한문학, 중년에는 사학(史學),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종사하는 등 세 번이나 배움의 길을 바꾸었으며, 이는 국권상실 시대에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그 주된 뜻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동청사(大東靑史)』·『조선신사(朝鮮新史)』·『중등조선역사(中等朝鮮歷史)』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이목은전』·『안의사(중근)전』·『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단재 기념관
일제강점기 때 독립지사이자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세운 단재 영각을 중심으로 기념관, 묘소로 이루어진 곳이다. 단재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앞마루를 놓았다. 영각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정기문’이라는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사당이 있는 고드미마을은 미원장이나 내수장에 나무를 내다 파는 고드미장꾼들로 이름난 곳이다. 신채호 선생이 1887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가이자 교육자, 문학가,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은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초빙되는 등 일찍이 자주독립사상에 눈을 뜨고 ‘조선상고가’ 등의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한 역사가이자 1901년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신교육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교육자이다.아울러 우리 민족의 기상을 노래한 중편소설 「꿈하늘」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쓴 문학가이자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만들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단재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로 묘역에는 한용운 선생이 세운 묘표석과 사적비, 그리고 신채호 선생의 시 ‘하늘북’을 새긴 시비, 신채호 선생과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있다.
문명학교 터(상산초)
문명학교는 이상설 선생의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학교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상직 선생이 항일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1909년 세운 것이 문명학교이다. 이상직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기틀을 다졌고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천으로 낙향하여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 선생이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실이 협소하여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교명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신채호 동상(상당구)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