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독립유공자추모탑

유형
비석 |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8-2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독립유공자추모탑은 강석기 강철구 강병국 강성모 강일 강일구 김정제 노명우 노명우 문경섭 문장섭 박길화 류기섭 이호철 조병순 조병철, 16분의 애국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8월 세워진 비이다.

탐방로그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8-2에 위치한 독립유공자추모탑를 찾았다. 애국지사 강일구선생 추모비,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등 마을 초입에 있는 여러 사적들과는 100m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2분 정도 소요된다.

인물정보

성명
강병국
한자명
姜秉國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5 ~ 1984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3. 4월 충남 부여(忠南扶餘)에서 농민구락부(農民俱樂部)에 가입(加入)하여 야학(夜學)을 통(通)하여 농민청소년(農民靑少年)들의 항일 의식(抗日意識)을 계몽(啓蒙)하고 지하 활동(地下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겪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강석기
한자명
姜錫箕
운동계열
문화운동
생몰년도
1862 ~ 1931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다년간(多年間) 국조(國祖) 단군(檀君)을 신봉하는 대종교(大倧敎) 포교사업을 전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단군 유적(檀君遺蹟)을 봉심(奉心) 선교(善敎)하여 민족문화선양에 기여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강성모
한자명
姜聖模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5 ~ 1940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3. 4월 충남(忠南) 부여(扶餘)에서 농민구락부(農民俱樂部)에 가입(加入)하여 야학(夜學)을 통(通)하여 농민청소년(農民靑少年)들의 항일 의식(抗日意識)을 계몽(啓蒙)하고 지하 활동(地下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겪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강철구
한자명
姜鐵求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94 ~ 1943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26세시 만주(滿洲)로 이주하여 3.1 운동당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 군자금모집과 대한 상해 임시정부(大韓上海臨時政府) 공채증권모집사건으로 인하여 1923년에 서대문 함흥형무소에서 3년복역하다 (동아일보 1932.4.1) 2. 만주(滿洲)국항일거두로 지칭되어 목단강성(牧丹江省) 계목사형무소에서 옥사하다 (치안유지법위반 1943. 10. 21)

인물정보

성명
김백손
한자명
金百孫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93 ~ 1965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1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가담(加擔)한 후(後) 1920년 군자금 모집 활동(軍資金募集活動)을 하다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제령(制令) 7号(号) 위반(違反)으로 징역 2년6월(후(後)에 2년2월로 변경(變更))형(刑)이 확증(確證)되여 복역(服役)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영기
한자명
金永琪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미상
본적
전라남도 나주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시내에서 김복현(金福鉉)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광주시내를 행진하였으며 최병준 등으로부터 교부 받은 독립선언서 및 경고문 등을 광주시내에 배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재창
한자명
金在昶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7 ~ 1961
본적
충청남도 예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음(陰) 11 장두환(張斗煥)의 협력요청에 의거 광복회자금모집활동을 하다가 1917 음(陰) 12 포고문 등 문서 수십통을 작성 18명에게 출자를 요구하는 문서를 우송한 염의로 피체 1919. 9. 22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보안법위반 및 강도공갈죄목으로 7년형을 받고 복역 중 1924년에 5년 9월 16일로 형이 변경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충성
한자명
金忠聖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4 ~ 1960
본적
평안남도 순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3.6 평남(平南) 순천군(順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는데 이날의 시위는 천도교(天道敎) 인(人)과 예수교인(敎人)이 합세하여 거사되었으며 야산당 공원(野山唐公園)에 모인 2,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활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형제
한자명
金亨濟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8 ~ 1945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8월 만주(滿洲) 길림군정부(吉林軍政府) 군무독판(軍務督辦)인 김좌진(金佐鎭) 휘하 특파원 김영진(金瑛鎭)의 지시를 받아 동지들과 함께 충남지방의 여러 부호들에게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명의 군자금 청구서 등을 제시하며 군자금모집을 위하여 활동하다 징역 9월형을 받았으며 2년1개월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노명우
한자명
盧命愚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5 ~ 1972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3년 부여(扶余)에서 홍산농민구락부연합회(鴻山農民俱樂部聯合會)를 조직하여 농민야학과 농민구락부를 각 부락에 설치하여 식민지정책을 반대하며 활동하다가 피검(被檢)되어 1935. 11. 25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에서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노명우
한자명
盧明愚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7 ~ 1936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공주 독립만세 시위(公州獨立萬歲示威)하다가 피체(被逮)되어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에서 징역 3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형(年刑)을 받은 후(後) 홍산농민구락부 등(鴻山農民俱樂部等) 조직(組織)에 가담(加擔)하여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執行猶豫)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문장섭
한자명
文章燮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96 ~ 1967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북간도에 있는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의 강철구(姜鐵求), 김동진(金東鎭)과 연락하여 국내에서 박길화(朴吉和) 김도균(金道均) 문경섭(文瓊燮) 김동순(金東純) 등과 단원으로 국내(國內)에서 활약중(活躍中) 1922년 피체(被逮)되어 1년형을 선고(宣告)받고 옥고를 치름.

인물정보

성명
박길화
한자명
朴吉和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72 ~ 1952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894년 동학군(東學軍)에 정신분전(挺身奮戰)함. 2. 대한군정서 사건(大韓軍政署事件)에 관련(關聯)되어 1920년 10월 일경(日警)에 피체(被逮), 서대문(西大門), 함흥감옥(咸興監獄)에서 전후(前後) 3년간 옥고(獄苦)를 겪음.

인물정보

성명
박영희
한자명
朴寧熙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96 ~ 1930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1915년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도만(渡滿) 신흥사관학교(新興士官學校) 교관,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중심인물로 활약, 1920년 독립군총사령(獨立軍總司令)의 부관(副官)으로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에 공훈, 노령(露領)에 가서 무기 구입, 1922년 신민부(新民府)의 보안사령(保安司令)으로 민병제(民兵制) 실시, 출전대기 훈련(出戰待機訓練), 계몽사업, 군인의 질적향상을 위하여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청년군인 500여명을 양성하는 등 1930년 공산당원(共産黨員)에게 살해당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백문기
한자명
白文基
운동계열
인도네시아방면
생몰년도
1924 ~ 1953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2

공적개요

1944년 12월 경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연합군포로 감시요원인 일본군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목적으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조직해 정당원(正黨員)으로 활동하고 탈출계획을 세우다가 1945년 3월 체포되어 동년 7월 징역 7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양재흥
한자명
梁在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4 ~ 1959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서천(舒川), 한산(漢山), 마산(馬山) 독립만세 사건 시(獨立萬歲事件時) 주동 인물(主動人物)의 한사람으로 활약(活躍)하고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유기섭
한자명
柳基燮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5 ~ 1936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31년 비밀결사 화성당(火星黨)을 조직하고 활동 중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고 복역하였으며 1931. 10월 충남 부여에서 협의회(協議會)활동에 참여하여 1933. 5월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결성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조직확대에 힘쓰다가 피체되어 1935. 11. 25 징역 3년을 받고 복역 중 옥중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윤찬복
한자명
尹贊福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68 ~ 1946
본적
평안남도 순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상해 임정(上海臨政)을 원조할 목적으로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장(大韓國民會婦人鄕村會長)으로 수10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차경신(車敬信)에게 교부함 2. 1921.7.2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1.7.4) 3. 출감 후 전도사 시무(傳道師視務)

인물정보

성명
이건호
한자명
李建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5 ~ 1951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6월 대동단(大同團)조직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자금 3,000원(円)을 모집하며 활동하다 일경(日警)에 피포(被捕)되어 징역 3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규철
한자명
李圭哲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59
본적
경기도 안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안성(安城) 원곡(元谷) 양성 독립만세 시위운동(陽城獨立萬歲示威運動)에 가담 활약(加擔活躍)하고 1921.1.22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2년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문용
한자명
李文庸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1 ~ 1962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형(兄) 순용(淳鎔)이 남경(南京), 상해(上海), 중경(重慶), 서장(西藏) 등지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 하던 중 군자금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당시 300여석(餘石)의 소작료(小作料)를 수입(收入)하던 부형(父兄)과 본인(本人) 및 처(妻) 소유(所有)의 토지(土地) 외(外)지에 35간(間)의 창고(倉庫), 8간(間)의 정미소(精米所)를 매각(賣却)한 막대한 자금을 헌납함. 2. 1919년 이후(以後)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활약, 김진억(金鎭億) 등과 같이 부여군(扶余郡) 선은리(仙隱里) 이승호(李承鎬)를 김진억(金鎭億) 등과 함께 공갈(恐喝) 1000원(円)의 군자금 모금한 사건으로 3년 복역(服役), 1928년 귀가(歸家)함.

인물정보

성명
이상구
한자명
李相龜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1958
본적
강원도 삼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4.13 강원도(水原道) 울진군(蔚珍郡) 부구리(富邱里) 장터에서 김일수(金一壽) 황종석(黃宗錫)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행진하다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4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완식
한자명
李完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67 ~ 1943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1.11월부터 서울, 전라도(全羅道)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上海) 임정 연락요원(臨政連絡要員)에게 인계하려다 체포되어 1921년 징역4년을 복역하였으며 그 후에도 계속 지하운동으로 활약하다가 1938년 12월 체포되어 금고6월형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용규
한자명
李溶珪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27 ~ 2009
본적
경상남도 통영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9

공적개요

1945년 2월 경남(慶南) 통영(統營)에서 통영수산학교(統營水産學校)에 재학 중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용철
한자명
李容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1 ~ 1961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13년 임병찬(林炳瓚), 전용규(田鎔圭) 등이 주도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결성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여 1914. 4월 김창식(金昌植), 이기영(李起永) 등과 함께 서울에서 국권회복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0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창호
한자명
李昌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2 ~ 1931
본적
전라남도 광주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전남(全南) 광주(光州) 숭일학교(崇一學校) 학생으로서 1919년 3월 10일 전남(全南) 광주군(光州郡) 광주(光州) 시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호철
한자명
李戶喆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1 ~ 1971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1. 6월 부여군(夫餘郡) 홍산면(鴻山面)내 각지 부락에 농민야학과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33. 8월에 구속 2년 4개월만인 1935. 11. 25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6월, 5년간 집행유예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희춘
한자명
李喜春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6 ~ 2008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2년 3월 2일 부여(扶余)에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反對)하는 자(者)를 탄압(彈壓)함으로 박종한(朴鍾漢) 동지(同志)와 같이 심야(深夜) 도끼로 부여신사(扶余神社)를 파괴(破壞)하고 1943년 1월 15일에는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담(加擔)하였으며 1944년 4월 24일에는 부여(扶余) 부소산(扶蘇山) 사비루(泗沘樓) 기둥에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대서 혈서(大書血書) 첩부(貼付)하고 최을서(崔乙書)와 같이 독립만세’(獨立萬歲) 삼창(三唱)을 고창(高唱)하여 등산객(登山客)을 경탄케 한 바 동년(同年) 5월 2일 체포(逮捕)되어 대전지법(大田地法) 강경지원(江景支院)에서 동년(同年) 9월 22일 징역 1년을 언도(言渡)받아 옥고(獄苦)를 치르고 1945년 8월 4일 가출옥(假出獄)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임종구
한자명
任鍾龜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5 ~ 1942
본적
충청남도 청양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군자금 모집 활동(軍資金募集活動)을 하다가 강도죄(强盜罪)로 징역 4년3월7일형(日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병철
한자명
曺秉哲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1 ~ 1960
본적
전라남도 화순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27년 5월 전남(全南) 화순(和順)에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전남지부(全南支部)에 가입하여 화순(和順)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1928년 8월 5일 광주(光州)에서 전남(全南) 소년연맹(少年聯盟) 창립 대회(創立大會)를 개최하고자 무등산(無等山) 증심사(證心寺)에서 수십명과 집회를 하던 중 체포(逮捕)되어 금고(禁錮) 4월을 받았고, 1929년 다시 고려공산청년회 사건(高麗共産靑年會事件)으로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병학
한자명
趙秉學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8 ~ 미상
본적
함경남도 갑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3월 15일 함경남도(咸鏡南道) 갑산군(甲山郡) 회인면(會麟面) 후지리(厚地里)의 천도교구(天道敎區)에서 정수웅(鄭秀雄)의 주도로 교도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중구
한자명
趙重九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80 ~ 1942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4년 서간도(西間島)에서 광제회(光濟會)를 조직(組織)하고 군자금 조달(軍資金調達) 및 미주(美洲)에서 발간(發刊)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 전재(轉載) 발행(發行) 등에 활동(活動)하다 상해(上海)로 망명(亡命) 의정원(議政院) 의원(議員)에 피선(被選)되어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천병림
한자명
千炳林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6 ~ 1943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4

공적개요

1932. 10 .25 재중국 조선독립운동 단체(在中國朝鮮獨立運動團體)가 대일항일전선(對日抗日戰線)을 이루기 위하여 조직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열단(義烈團) 대표로 참여하였고, 1934년에는 의열단계(義烈團系) 군관학교(軍官學校) 간부훈련반(幹部訓練班)의 학생모집원(學生募集員) 및 연락원(連絡員)으로 활동하였으며, 1935. 7. 5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중앙검사위원(中央檢査委員)으로, 1936. 3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군사부(軍事部) 산술대수(算術代數) 교관으로 5월부터는 동당(同黨) 화남(華南) 책임자(責任者)로, 1938. 4월에는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의 발행인, 1940년에는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朝鮮民族解放運動者同盟)의 간부 및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 편집위원(編輯委員)으로 있으면서 지도위원회(指導委員會)의 일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천병만
한자명
千炳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0 ~ 1975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0 상해 임정(上海臨政)에서 활약(活躍)하고 있는 친형(親兄) 천병일(千炳一)의 지령(指令)을 받고 상해조선인군관학교(上海朝鮮人軍官學校)에 질(姪) 천경(千璟), 천용구(千龍九), 김종대(金種大) 3명(名)을 중국(中國)으로 보내 입학(入學)케 하고 군자금(軍資金)을 모집(募集)하여 중국(中國)으로 망명직전(亡命直前)에 군산항(群山港)에서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형(年刑)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최을규
한자명
崔乙圭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8 ~ 1997
본적
충청남도 청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3년 봄 일제(日帝)의 강제(强制)에 의하여 부여청년훈련소(扶餘靑年訓練所)에 입소 당(入所當)하여 이기춘(李起春)과 함께 학도지원병(學徒志願兵)등이 만주(滿洲)로 탈출(脫出)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투신(投身)하고 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자신(自身)들도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헌신(獻身)하기로 결의(決意)한 후(後) 부여신궁 건축 예정지(扶餘神宮建築豫定地)에서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를 3회에 걸쳐 고창(高唱)하고 백화정(百花亭) 「기둥」을 깎아 혈서(血書)로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대서(大書)하고 독립 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추병갑
한자명
秋炳甲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3 ~ 1976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0 충남(忠南) 강경(江景)장날에 모인 다수 군중(多數群衆)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동(主動)하고 미리 준비(準備)한 태극기(太極旗)를 배부(配付)하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고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추병갑
한자명
秋炳甲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3 ~ 1976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0 충남(忠南) 강경(江景)장날에 모인 다수 군중(多數群衆)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동(主動)하고 미리 준비(準備)한 태극기(太極旗)를 배부(配付)하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고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홍순대
한자명
洪淳大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8 ~ 1962
본적
충청남도 부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6. 5. 11 의병대장(義兵大將) 민종식 의진(閔宗植義陣)의 좌군관(左軍官)으로 임명(任命)받고 서천(舒川), 비인(庇仁), 부여(扶餘), 예산(禮山) 등지(等地)에서 왜적(倭賊)과 접전(接戰) 활약(活躍)하고 피검(被檢)되어 유배형(流配刑)을 언도(言渡)받고 우군도(右群島)에 정배 당(定配當)한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