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묘
안중근(1879 - 1910)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 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 엄인섭 ·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 · 조도선(曺道先) ·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