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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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추모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못한 유림(儒林) 인사들은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을 중심으로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게 하기 위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제출하였는데 그는 137인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에 함경북도 지방에 돌아와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윤태선(尹台善)·이상호(李相鎬)·전재일(全在一) 등 수십명의 조직원과 함께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5년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서 이 탁(李 )·지청천(池靑天)·김이대(金履大) 등이 조직한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그는 1926년 4월부터 정의부 검무감(檢務監) 고인섭(高仁燮)과 함께 봉천(奉天), 개원(開原)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일경의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7년 2월 12일에 개원성 동문밖에서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1927년 12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43년에 함경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정희 흉상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중구 충훈비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보창학교(육영학교) 터
보창학교는 강화 대대장으로 있던 이동휘(李東揮)가 1904년 8월 강화도에 설립한 육영학교(育英學校)의 개명한 이름이다. 1905년 5월고종 황제가 보창학교라는 교명(보창은 넓게(普) 퍼지고 번창하라(昌)는 뜻이다. 여기엔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던 고종황제의 열망이 담겨있다.)을 내려 개명하였고, 내탕금 600을 하사 받았다. 보창학교는 이동휘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운영하였고 김성은을 교감으로 삼았으며 군영의 일부였던 강화읍 진무영 동영(東營)자리에 건립하였다. 군인과 일반인의 자제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였다. 교육과정으로는 소학보통과와 일어·영어과의 과정이 개설되고, 입학자격은 소학보통과는 신체 건강하고 정신에 결함이 없는 자로 8세 이상 16세 이하인 청소년으로 하고, 일어·영어과는 16세 이상 20세 이하인 자로 한문·국문·작문·습자에 능한 자로 하였다. 이동휘는 일본에 의해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방법으로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동휘의 보창학교 군사훈련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많은 애국지사들은 군사훈련의 필요성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유지자들은 군악기와 소총 다수를 구입하여 각 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1905년 3월에는 민영환(閔泳煥) 등 13명의 군인과 중추원 부의장 이근호(李根皓), 평리원장 민경식(閔京植) 등 당시의 고관과 명사들이 찬성금을 육영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러나 보창학교는 1907년 여름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진위대 영사 자리였던 열무당으로 이동했다가 1908년 2월에 다시 재건되었다. 이후 보창학교를 주축으로 한 강화지역 의무교육안이 마련되었고, 보창학교는 사범속성과와 중학과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1910년까지 강화지역 교육을 선도하였다. 하지만 1910년 병탄 이후에 재정난을 겪다가 1911년 구 이아(貳衙) 건물로 이전하였으나 결국 1915년에 문을 닫게 된다. 모두 현재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멸실되었다가 2022년 9월 7일 보창학교 터였던 강화교육지원청 미래교육지원센터에 그 설립 의의를 기리기 위한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신규식 동상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충성심이 대단하던 신규식은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참위(參尉)로 복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지방군대에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대일항전을 꾀하려 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여기에 다시 경술국치의 비운을 당하게 되자, 1911년 11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고 손문(孫文)의 무창기의(武昌起義)에 참가하였으며, 중국인 호한민(胡漢民), 송교인(宋敎仁), 진독수(陳獨秀) 등이 경영하는 상해(上海)의 민권보(民權報)를 보조하였다.이후 상해(上海)의 불란서조계(佛蘭西租界)에 피신하여, 상해, 남경(南京) 등지에 왕래하고 거류하면서 차츰 모여드는 망명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자,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 지역에 있는 동포들을 잇는 역할도 겸하였다. 신규식과 함께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趙素昻), 문일평(文一平), 박찬익(朴贊翊), 조성환(曺成煥), 김규식(金奎植), 신건식(申健植) 등이 동제사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사원의 수는 약 3백여 명에 이르고 유럽과 미국 등 해외 각지에는 분사를 두기도 하여 광복운동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또한 신규식은 중국인 혁명지사들과도 교류하며 독립혁명운동을 협조하였고, 한중 양국의 지사 청년들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친선 협조 관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된 후로도 이어져, 더욱 양국간의 친선 협조를 돈독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규식은 조완구(趙琬九), 김백련(金白蓮), 백순(白純), 박찬익(朴贊翊), 정신(鄭信) 등과 함께 단군을 숭봉하는 대종교(大倧敎)의 교회를 설치하고 일요일의 경배식(敬拜式)과 함께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10월 3일 개천절 등 기념일에는 거류 동포들이 참석하는 경하식(慶賀式)을 거행하여 겨레 고유의 전통 사상을 선양하였다. 한편,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전후하고서 중국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및 지도자들이 전개하는 국내외에 대한 활동도 점점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동제사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이미 1917년 8월 서전(瑞典)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열리는 만국 사회당 대회에도 대표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원동(遠東) 약소민족 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켰으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에 의해 새로운 독립운동 전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내 동포들과도 긴밀히 연락하여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고, 이에 동제사의 대표인 신규식 또한 앞장섰다. 우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일과 전 국민운동을 일으켜 일본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를 담은 비밀 서신을 국내로 전달하게 하였으며, 우리 대표단의 국제적 활동에 대해서는 중국의 혁명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협조와 지원하겠다는 승낙을 얻도록 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법무 총장에 임명되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에 그는 임시정부 특파 대표로 광동(廣東)에 파견되어 호법정부(護法政府, 또는 광동 정부)의 승인을 구하는 동시에, 호법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내용의 5개항을 요청하여 최초의 외교관계를 성취하였다. 1922년 3월에는 신규식 내각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수행 및 중국 호법정부와의 외교 협조의 대표적인 성과를 일구어냈다. 그러던 중, 1922년 9월 25일 신규식은 과로로 상해에서 43세를 영면하였으며,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3년 유해를 봉환하여 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문일민 안혜순 부부묘
문일민(1894~1968)은 평남 강서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동년 7월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기관 폭파, 일제요인 암살 등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표현하자는 방침 아래 특공대를 국내에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그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제2대에 편성되어 평양에 특파되었다. 입국 도중 평남 안주 입석(安州 立石)에서 검문하려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에 들어와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후 피신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1921년 9월 삼육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24년에는 운남 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다시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사교련에 주력했다고 한다. 1928년 2월에는 상해로 돌아 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5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승인되었고, 그후 중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흥사단(興士團) 원동반(遠東班)에 가입하여 제1반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유동열(柳東說)과 중령을 대표한 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어 이후 광복시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에는 김홍서(金弘 )와 같이 교민단(僑民團)재건을 위해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에는 항주에서 한국독립당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박창세, 신공제와 함께 상임위원에 선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전념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신한민주당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2일에는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유동열 참모총장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후 1945년 2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조국의 광복 시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동분서주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양우조 어록비
양우조 어록비는 1940년 가을에 쓴 <나의 가진 민족주의>라는 제목의 어록을 새겨놓았으며, 뒷면에는 양우조 약력이 새겨져있다. 양우조(1897 - 1964)의 호는 소벽, 이칭은 양묵, 양명진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참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상해로 망명했다가 19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재미대한인국민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안창호(安昌浩)의 가르침을 따랐다. 1929년 다시 상해로 건너와 안창호·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화남(華南) 및 남양군도(南洋群島) 시찰특파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혁신사(革新社)를 창립해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의원 중국대표로 선임되었으며,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의 화남특파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36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7년 10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국무원(國務員)을 개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특설하자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7년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훈련부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生計部) 차장에 취임해 교포의 생활과 지위 향상을 도모하였다. 광복군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4년 충칭[重慶]한국인기독교청년회이사 겸 덕육지육부장(德育智育部長)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만 공적비
이상만(1884~1955)은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3월 한국독립운동본부 지령으로 중국 북경에 파견되어 박정래(朴正來)·조두진(趙斗珍)·유장연(劉璋淵)·전재홍(田在弘)·유중한(柳重韓)·연병주(延秉柱)·최훈식(崔勳植) 등과 더불어 신대한동맹회를 조직하고 동 회장에는 박정래를 추대하였으며, 그는 동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회계원 검사원으로 선임된 그는 이듬해 10월에는 회계검사원 검사관이 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김붕준(金朋濬)의 탄핵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의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항의 취소를 요구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정국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주력하였다.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중앙감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4년 의정원회의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지도체제를 개편하게 되자 동년 6월에 그는 국무위원 겸 검사원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1945년에는 화중구(華中區) 한교선무단장이 되었다. 1946년 임정 주화(駐華)대표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대만 한교협회 이사장으로 우리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 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고 1949년에 귀국하여 요양 중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익희 집(경기)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여운형 기념관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조소앙 동상
조소앙(1887 - 1958)은 파주 교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유학 시절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박달학원에서 청년 혁명가를 양성하였다. 1917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에 사회당을 창당하고, 1950년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초당의숙 표지석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