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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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기념관
조아라는 학생독립운동, 여성 및 아동의 교육과 인권을 위해 평생 헌신한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조아라는 1912년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인 아버지가 설립한 사설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교사이자 YWCA 창립자인 김필례를 만난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30년경에 수피아여학교 동기 10여 명과 ‘백청단’이란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문맹퇴치와 아동교육에 힘쓴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1933년 1월에 ‘백청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개월 후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는 강제해직을 당한다. 1935년부터 총독부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1937년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자진 폐교를 한다. 수피아여학교가 폐교하자 일제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조아라를 검거해 1개월간 수감한다. 출소 후 1935년에 혼인한 남편 이태규가 있는 평양에 가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닌다. 1938년 평양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부부는 광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조아라는 스승 김필례와 함께 신사참배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와 해체된 광주 YWCA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YWCA를 재건한 후 조아라는 광주 YWCA에서 여성 인권과 여성 인재 양성에 애쓴다. 1952년 7월, 광주 YWCA에 ‘성빈여사’를 만들어 전쟁 여자 고아를 수용한다.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성빈여사의 학생들과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1962년에는 ‘별빛학원’을 설립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권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매매여성의 재활센터인 ‘계명여사’을 열고 10대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킨다. 1973년 광주 YMCA 회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내란음모죄로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평생을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92살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조아라에게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고, 2018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현학근 집 터
현학근(1884-1944)은 기미년 3·1운동 때 덕천(德川) 서문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1924년 경기도 가평(加平)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4년 11월 12일 임일봉(林一奉)과 오일보(吳一寶)의 권유로 태극교(太極敎)에 입교했다. 태극교는 겉으로는 종교를 표방했으나, 명칭에서 보듯이 민족적 성격이 짙은 단체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태극교에 입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한편 조선 독립을 이루기 위해 동지 규합을 위한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34년 11월 15일, 그는 정태용(鄭泰鏞)에게 “조선은 언제까지나 일본에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4, 5년 후에는 악질이 유행하고 병란·재앙이 일어나 현재 인민의 대부분은 사망하고 그 때 정왕(鄭王)이 나타나 조선을 독립시키고, 충청도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에 즉위하며, 태극교도는 정왕을 섬기어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로 태극교에 입교하여 독신해야한다”고 권유하여 입교시켰다. 이후 차원익(車元翼) 등을 대상으로 “태극교는 천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태극의 세(조선 독립)도 가깝고 성천을 통하여 모국을 얻어 교도는 고위로 나아가 영원히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포교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현학근은 1939년 1월 10일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수(구) 애양원 교회
애양원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1939년에는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원탁회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7월 여수 나병원의 애양원교회 전도사가 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맞서며 일제의 폭정과 우상숭배를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1940년 9월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1948년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으며, 아들을 죽게 한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자신은 6·25전쟁 기간에 납북되는 도중에 북한군에게 희생되었다. 애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센병 치료시설이다. 본래 광주에 있었던 한센병원이 1909년 여수로 옮겨왔다.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시설이자 치료 및 자활을 위한 공동체로 애양원은 '사랑으로 기른다는 뜻'이다. 1928년 2층 규모로 준공되었던 애양원교회는 193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5년 재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종탑이 하나 있는 평면 장방형 석조 건축물은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양식을 잘 보여준다.
한상택 추모비
한상택(1909-1985)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대구농립학교 재학중인 1928년 2월에 비밀결사 적우동맹(赤友同盟)에 가입하여 동결사의 조직연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적우동맹은 이 무렵 대구지역 학생들이 민족적 항일의식을 고양시키는 연구 모임 중에 하나로 1927년 말에 결성된 신우동맹(新友同盟) 및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계승한 것이다. 1928년 4월 대구고등보통학교의 맹휴로 인한 주동학생이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적우동맹도 관련 활동을 한 것이 발각되며 1828년 11월 한상택은 일경에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1930년 3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권태용 추모비
권태용(1920-1986)은 1920년 4월 23일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 현 영천시) 신녕면(新寧面) 부산리(富山里)에서 태어났다. 자료의 한계로 집안 배경,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불교전문학교(佛敎專門學校) 출신인 것으로 보아 고등교육 이상은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1944년 1월 20일 대구24부대(대구80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는 민족의식 고조로 인한 독립운동 참여에 뛰어들게 되는 촉발제가 되었다. 이 부대에 배치된 것은 1943년 10월 20일 일제가 조선인 학도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공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표면적으로 지원자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일제는 명사 가운데 친일 인사를 선발하여 각지를 돌며 징병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으며, 각 지역의 관헌들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일가친척을 속이거나 입대하지 않으면 갖은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대구 24부대에 배치된 것은 경북 출신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부대에는 경상남북도 출신의 학병 600여 명이 끌려와 있었다. 학병 대다수는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학병들은 훈련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뜻을 가졌으며, 그 중심에는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출신 권혁조(權赫朝), 메이지학원(明治學園) 김이현(金而鉉),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출신 문한우(文漢雨)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부대에 있던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기로 계획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학병들은 집단 탈출 계획을 세웠다. 권중혁(權重赫)·김복현(金福鉉)과 함께 이들의 계획에 동참하였다. 이들과 함께 1944년 8월 7일 부대를 탈출하여 국외로 이주한 후 일본을 대상으로 독립 전쟁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한우가 탈출 이후 필요한 자금을 그의 부모님을 통해서 마련하였지만, 탈출 예정일에는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8월 8일 오후 9시 반, 부대 안에 있던 하수구로 탈출을 계획한 동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본군의 눈을 속이고, 당일 불침번이었던 허상도(許相燾)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에 성공하였다.대구24부대를 탈출하자 당초 지리산을 통해서 국외로 간다는 계획은 수정하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일본군에게 체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근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가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팔공산에 들어간 후 진불암(眞佛庵)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은 불교전문학교 출신으로 진불암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주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학병들이 집단 탈출한 사실을 알게 된 24부대는 경찰, 경방단(警防團), 면서기 등을 총동원하여 팔공산을 포위하였다. 이를 감지한 탈출 학병들은 개별적으로 팔공산을 탈출하기로 뜻을 모았다. 문학우와 권혁조는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권중혁과 함께 신녕(新寧) 뒷산에 숨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12월 15일 군사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곽종의 항일투쟁실록비
곽종의(1879-1960) 선생은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6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2대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셨던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1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곽동곤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호는 졸와이고 휘는 종의이며 자는 성강이다. 곽종의 지사는 고령군에서 나고 자라 청소년, 장년기를 모두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무년에 국치를 당하자 초야에 은둔 항일운동을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원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 대정(大正, 다이쇼,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였다.)을 가살(可殺: 카코로시, 또는 카사츠, 살인을 한다는 의미)이라 부른다는 풍문이 있다고 발설하였는데, 그러한 유언비어를 지사가 조작하였다고 하여 고령 경찰서에서 2주간 구류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일제 총독부가 담배에 대한 생산과 경작을 독점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동민이 경작한 담배를 선친이신 동곤씨와 같이 한 자리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고 담뱃대를 즉석에서 꺾어버리고 그날부터 단연을 하고 일제 시책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또 전매청 직원이 밀조주를 단속하기 위하여 신발을 신은 집 안까지 들어와 뒤지자 화가 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이들을 마구 두들겨 도망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에 고령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도 지사가 배후 조종자라고 하여 수십일동안을 고령경찰서에 감금하였다. 또 담당 면직원이 보리 공출을 나와서 연장자께 고압적인 태도와 불손한 말투로 억압하는 것에 화가 난 조카 곽태철이 동면직원을 두들겨 준 일이 있었다. 이 때 고령경찰서는 마을을 모두 포위하여 곽종의 지사와 지사의 아들, 곽태진 선생, 그리고 조카 곽태철 선생을 비롯한 곽씨 일문이 모두 항일가문이라 하여 수십명을 경찰서에 강제 연행 수십일 동안 구류 처분을 하고 조카 태철을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 6개월 징역을 받게 하였다. 또 지사는 일제에 세금 불납 등으로 일본 정치에 반대하였고 한편으로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대하여 낙동강 우곡면 소작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출되어 약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위하여 항거하여 싸웠다. 일제는 늘 곽종의 지사를 시찰이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들 곽태진 선생이 호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부자가 함께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십일 동안 취조를 당하였다. 이 때 古川(후루카와) 서장이 직접 면담을 하였는데, 미국과 일본이 전쟁 중인데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느냐고 물었고 지사가 어느 나라이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서장이 화가 나 석방시키지 않고 구류해버린다. 이후 종전이 된 후에 석방되었으며 부자가 서로 뜻을 이루고 반갑게 극적으로 상봉하였다고 한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 있는 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로 추기비는 선생의 이러한 항일투쟁 정신을 기록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
곽종의 투쟁실록 추기비
곽종의(1879-1960) 선생은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6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2대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셨던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1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곽동곤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호는 졸와이고 휘는 종의이며 자는 성강이다. 곽종의 지사는 고령군에서 나고 자라 청소년, 장년기를 모두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무년에 국치를 당하자 초야에 은둔 항일운동을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원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 대정(大正, 다이쇼,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였다.)을 가살(可殺: 카코로시, 또는 카사츠, 살인을 한다는 의미)이라 부른다는 풍문이 있다고 발설하였는데, 그러한 유언비어를 지사가 조작하였다고 하여 고령 경찰서에서 2주간 구류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일제 총독부가 담배에 대한 생산과 경작을 독점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동민이 경작한 담배를 선친이신 동곤씨와 같이 한 자리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고 담뱃대를 즉석에서 꺾어버리고 그날부터 단연을 하고 일제 시책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또 전매청 직원이 밀조주를 단속하기 위하여 신발을 신은 집 안까지 들어와 뒤지자 화가 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이들을 마구 두들겨 도망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에 고령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도 지사가 배후 조종자라고 하여 수십일동안을 고령경찰서에 감금하였다. 또 담당 면직원이 보리 공출을 나와서 연장자께 고압적인 태도와 불손한 말투로 억압하는 것에 화가 난 조카 곽태철이 동면직원을 두들겨 준 일이 있었다. 이 때 고령경찰서는 마을을 모두 포위하여 곽종의 지사와 지사의 아들, 곽태진 선생, 그리고 조카 곽태철 선생을 비롯한 곽씨 일문이 모두 항일가문이라 하여 수십명을 경찰서에 강제 연행 수십일 동안 구류 처분을 하고 조카 태철을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 6개월 징역을 받게 하였다. 또 지사는 일제에 세금 불납 등으로 일본 정치에 반대하였고 한편으로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대하여 낙동강 우곡면 소작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출되어 약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위하여 항거하여 싸웠다. 일제는 늘 곽종의 지사를 시찰이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들 곽태진 선생이 호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부자가 함께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십일 동안 취조를 당하였다. 이 때 古川(후루카와) 서장이 직접 면담을 하였는데, 미국과 일본이 전쟁 중인데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느냐고 물었고 지사가 어느 나라이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서장이 화가 나 석방시키지 않고 구류해버린다. 이후 종전이 된 후에 석방되었으며 부자가 서로 뜻을 이루고 반갑게 극적으로 상봉하였다고 한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 있는 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로 추기비는 선생의 이러한 항일투쟁 정신을 기록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
가네코 후미코 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박문자, 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이자 옛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3년 카나가와 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9살 때 외할아버지에게 입적되었고, 친할머니가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고모집에서 살았고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에 다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3·1만세 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감격하였다고 전해지며 1920년 도쿄에서 사회주의자와 교류하고 박열과 동거하며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22년 5월에서 1923년 3월까지 일본의 동경(東京)에서 박열(朴烈)과 함께 흑도회(黑濤會)의 기관지 『흑도(黑濤)』, 흑우회(黑友會)의 기관지 『태(太)ィ선인(鮮人)』·『현사회(現社會)』를 간행하여 무정부주의의 선전과 회원 규합에 노력하였다. 1923년 4월부터는 박열이 주도한 무정부주의 단체 ‘불령사(不逞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9월 3일 동경 대지진(大地震) 직후 체포되었다. 1924년 2월 15일 박열의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기소되어 1926년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우도궁형무소 회목지소(宇都宮刑務所栃木支所)]에 수감 중에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의 공적을 기리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무인멸왜운동기념비
무인멸왜운동기념비는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중 하나이며, 임실 지역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최동안, 김정갑 등이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1983년 6월에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무인 멸왜 운동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멸왜 기도 운동을 말한다. 1938년 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이기 때문에 무인멸왜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주남선 기념관
일명 주남고(朱南皐). 경상남도 거창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9년 친구인 오형선(吳亨善)·조재룡(曺在龍)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어 거창읍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진주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한 뒤 거창읍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같은 해 3월 20일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12월 거창읍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경남노회의 추천으로 1920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거창 지방 독립운동 사실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뒤, 즉시 신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까닭에 1930년 3월에야 졸업하게 되었다. 그 해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거창읍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평생을 거창읍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반대하는 신앙노선을 뚜렷이 보였다. 거창을 중심으로 경남교회의 불참배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40년 7월 검속을 당하였다. 옥중에서 종래의 남고라는 이름을 남선(南善)으로 바꾸었다. 8·15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석방된 뒤, 이기선·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1개월 가량 부흥집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9월 거창으로 돌아와 11월 제47회 경남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뒤, 옥중에서 한상동 목사와 논의한 바 있었던 한국교회재건방침의 하나인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정식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경남노회에서 일제시대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장(金吉長) 목사가 노회장이 되고 주남선·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교회재건운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라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고려신학교 측은 노회를 탈퇴하여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함으로써 고려파라는 별개의 교단설립이 이루어졌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흥동장학당
백관수는 한일 합방이 되자 전국에서 96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흥동 장학회를 조직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됐던 흥동장학당은 항일 애국지사들의 넋이 서린 유서 깊은 곳이다.
백초월 대선사 순국비
백초월(白初月)은 1876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된 그는 해인사에서 공부하였고, 30대 초반에 범어사, 해인사의 강사가 되었다.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그는 진관사를 거점으로 불교계 민족대표인 한용운, 백용성을 대신해 불교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의 본부인 민단본부의 책임자인 그는 상해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에 청년학승을 파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였다.백초월은 화엄경의 일심(一心) 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일심교(一心敎)를 만들고, 동학사.월정사.봉원사 강사를 역임하면서 항일결사체인 일심회를 전국적인 조직체로 가동하였다. 1939년 10월,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일제의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쓴 사건을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6월 옥중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으로 기려 1990 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백초월의 후손과 고성군민들의 정성으로 1991년 순국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