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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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 오광심 부부묘
김학규(1900~1967)는 1927년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지대본부 견습사관으로서 삼원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흥경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양세봉(梁世奉)·고이허(高而虛) 등과 같이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1930년에 동삼성(東三省)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그는 한중합작 항일투쟁을 협의하였으며 조선혁명군을 기동부대로 개편하여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1931년 12월에는 신빈현(新賓縣)에서 조선혁명당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3월에는 조선혁명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는데 조선혁명군 3개중대는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으로 신빈현(新賓縣) 남쪽에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영릉가(永陵街)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도 한·중군 합작항일공작을 위해서 전권대표로 환인성(桓仁城)에 파견되는 등 만주에서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소극적인 자세와 일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동삼성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33년 12월 그는 독립군 장성들과 함께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남경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였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으로 통합한 후에는 중앙간부로 활약하였다. 1936년에는 남경에서 현익철·양기탁(梁起鐸) 등과 민혁당 비상대회를 열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분리되어 나가자 조선민족혁명당이라 개칭하였다. 1939년 사천성 기강에서 다시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됨에 그는 참모처장 겸 참모장에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어 1940년 10월 김붕준(金朋濬)의장 탄핵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후 제3지대장 겸 징모제6분처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1942년 2월 임지인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일본군 점령 치하에 광복군의 공작거점을 확보하고 광복군의 활동을 선전하였으며 적의 군사기밀을 탐지하는 외에도 중국 유격대와 같이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오직 조국광복을 위한 애국충정의 일념으로 만난을 무릅쓰고 초모공작을 지휘하였는데, 그 결과로 제3지대의 초모인원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오광심(1910~1976)은 평북 선천 사람으로 김학규의 부인이다. 1934년에 김학규가 조선혁명군, 국민부 등 3개단체의 전권대표가 되어 임무를 띠고 만주에서 남경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35년 7월에는 남경에서 5당통일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부녀부 차장에 피임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 조순옥 등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그후, 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제3지대장인 부군 김학규와 함께 제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광복군의 초모 공작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초모 공작 대상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청년에 대한 초모 공작도 병행하였다. 광복군의 간부였던 오광심은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고 강조하여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김학규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오광심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영준 신순호 부부묘
박영준(1915~2000)은 경기도 파주 사람이다. 1938년에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이 통합되고 미국에 있는 대한독립단, 동지회, 국민회, 부인애국단, 단합회 등을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때 그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사상의 고취와 함께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일본 군대에 있던 한국인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여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도록 하는데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1939년 11월 중경에서 임정의 인재양성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였으며, 1941년 12월에 중국중앙군관학교 제17기를 졸업하였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 수하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로 중경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근무하였으며, 1943년 1월에는 임정 한인청년회 문화부장으로,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정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8월에는 개봉지구(開封地區)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광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자위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신순호(1922~2009)는 충북 청원 사람이다. 1938년 8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합동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오광심(吳光心)·김정숙(金貞淑)·조순옥(趙順玉)과 함께 여군으로 참가하여 이채를 띠었다. 1942년 9월에는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1945년 8월에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장준하 새긴돌
장준하(1915~1975)는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탈영해 1945년 광복군에 가담,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으며, 1949년 6월 한신대를 졸업했다. 1953년부터 월간 『사상계』를 발행했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서울 동대문(을)구)에 옥중 당선됐다. 1974년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 제 1호로 구속돼 투옥된 바 있으며, 1975년 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장준하 선생 새긴돌」은 1989년 통일운동가 백기완이 경기도 파주시 장곡리 검문소 앞에 세웠다가 동해시 이기동으로 옮겨온 것으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장준하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1962년, 생전에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및 제1회 한신상,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김준경 묘
김준경(1924-1973)은 1924년 4월 22일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갑천면(甲川面) 하대리(下臺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갑천(岬川)이다. 1943년 갑천면 서기로 근무하던 중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중국 후난성(湖南省) 구이둥(桂東)으로 배치되었다. 1944년 11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푸치현(蒲圻縣)에서 일본군 제3702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왕루지(王陸基) 휘하의 신편 제15사 유격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노재섭(盧在燮)·한장석(韓長錫) 등과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성되었다. 중국군 제9전구사령부 정치부에 파견되어 포로 심문과 일본군 문서 번역, 전단·표어·벽보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 직후 제3구대 대원들은 장시성(江西省) 펑청(豊城)에 집결하였다가, 한커우(漢口)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채원개(蔡元凱)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 중국 허베이성 스자좡(石家莊)에서 광복을 맞이한 후, 1946년 환국하였다. 귀국 이후 한국독립당 행정위원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찰대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재현 집
이재현(1917~1997)은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이해평(李海平)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1939년 10월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국내정진군으로 베이징에서 교포를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장준하 돌베개공원
장준하(1915 - 1975) 선생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탈영해 1945년 광복군에 가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장준하 묘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장준하 추모비(장준하 기념공원)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진강과 자유로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3,967㎡(약 1,200평) 규모로 파주 통일동산에 장준하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공원 조성과 함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비는 장준하의 흉상 부조와 함께 장준하의 생애와 공적을 기록한 일생을 새긴 24×25m 규모의 석조 조형물이다.
장준하 추모비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형석 묘
한형석 선생은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고, 이명은 한유한이다. 일찍이 부친 한흥교(韓興敎)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신예(新藝)예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1939년 10월에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되자 그는 예술조장으로 임명되어 군가인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을 작곡하였으며, 서안(西安) 등지에서 "국경의 밤", "아리랑" 등을 공연하여 군민(軍民)을 위안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 第四團 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서 교관을 역임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그는 광복군가집 1, 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가곡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그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선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광복군과 중국군 연합전선을 한층 견고히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만득 항일기공비
애국지사 김만득공 항일기공비이다. 김만득(1916 - 1950)의 본명은 '철해'이고 '휘'는 은열 40대손이다. 김만득은 일본유학 생활 중 차별대우로 분개하여 소란을 일으켰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중국 강서성 구강 주둔 일본군 군속으로 근무 중 1943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했고, 강남분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석호문 집, 사당
석호문(1923-1981)의 자는 우익, 호는 호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성주농업실수학교(星州農業實修學校)[지금의 성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 1944년 6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후, 광복군 제2 지대 제3 구대 제1 분대에 배치되었다. 1945년 5월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여, 3개월 동안 통신 파괴와 교란, 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훈련이 끝나면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군 군사 시설의 파괴와 함께 지하군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벌이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한미 공동 작전 대원 및 제2 지대 대원 약 100명으로 만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반에 편성되었다. 노성환(盧星煥), 황삼룡(黃三龍), 이동환(李東煥), 홍기화(洪基華), 신덕영(申悳泳), 이우성(李宇成),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과 함께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광복군 상사로 예편하고,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초급 행정 특보 위원, 대표 행정 자치 위원을 지냈다. 198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