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마을 표지석(장암면 장하1리)
사적지 개요
강병국(1915~1984), 강성모(1915~1940)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930년 1월 부여지구에서 강일(姜日) 등과 함께 격문을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데 참가하여 연락업무를 맡았다한다. 그후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문맹퇴치운동에 가담하여 1933년 4월 장정학당의 한글교사로 활동하면서 금강공산협의회 조직의 일환으로 부여농민구락부를 만들었다. 그는 강일구(姜日求)·최재봉(崔在鳳)·장창선(張昌善)·전영철(田泳喆)·조병철(曺秉喆)·허원범(許元範)·노명우(盧命愚)·강도형(姜道馨) 등 동지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항일지하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12월 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근 2년간 옥고를 겪어야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석기(1862~1931)는 1914년 여름에 백두산 최고봉에 올라가 단군천조에게 제향을 드리고 팔과 가슴을 칼로 그어 그 피를 내서 글을 써 조국을 회복하기를 기도하였다. 1915년 7월에는 백두산 아래 내도산에서 수도·선교하면서 「초홍호자동포문」, 「조만동포동맹서」등 경고문을 지어 배포하였다. 1920년에는 서울에 남도본사를 재건하고 유지들을 포섭하여 시교하였으며 그 후 단군유적을 받들고 선교하여 민족문화 선양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일(1911~1974)은 1926년 6월 고향에서 군중들과 함께 일본학교 폐지를 주장하며 시위를 펴다 붙잡혔으나 미성년자로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후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호응하여 동조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30년 2월 유복윤(柳福允)·노명우(盧明愚) 등과 함께 항일격문을 제작하여 부여농업보습학교에 살포하였는데,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에는 비밀결사 화성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펴던 중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 1936년 대성당의 재건을 시도하다 재차 붙잡혀 1년 동안 구금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일구(1910~1961)는 1931년 10월 충남 부여군 구룡면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구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강일구는 1931년 10월 5일 구룡면 금사리(錦寺里) 산중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3일 보다 적극적인 운동실천을 위해 동회를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연극, 강연 등을 개최해서 농민의 계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동년 4월 중순경에는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동년 5월 부여군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일구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철구(1894~1943)는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에 건너가 북간도 천영학교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조력하였다. 이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해 가지고, 만주에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수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모집 차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이에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을,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을,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각기 동지로 영입하고 동년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김재설·김삼현·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강경(江景)에서 김찬형(金燦亨)·김철수(金哲洙) 등을 영입하는 한편 이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였다. 이해 10월에는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 집에 은신 활동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김정제(金廷濟)·조창호(趙昌鎬)·김목현(金穆鉉) 등을 다시 동지로 확보하고, 부호가택을 은밀히 방문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뒤 다시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활동을 소상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동지 박창규·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모금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재만 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되어 동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1943년 목단강성(牧丹江省) 가목사(街木斯)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석기(1862~1931)는 1914년 여름에 백두산 최고봉에 올라가 단군천조에게 제향을 드리고 팔과 가슴을 칼로 그어 그 피를 내서 글을 써 조국을 회복하기를 기도하였다. 1915년 7월에는 백두산 아래 내도산에서 수도·선교하면서 「초홍호자동포문」, 「조만동포동맹서」등 경고문을 지어 배포하였다. 1920년에는 서울에 남도본사를 재건하고 유지들을 포섭하여 시교하였으며 그 후 단군유적을 받들고 선교하여 민족문화 선양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일(1911~1974)은 1926년 6월 고향에서 군중들과 함께 일본학교 폐지를 주장하며 시위를 펴다 붙잡혔으나 미성년자로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후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호응하여 동조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30년 2월 유복윤(柳福允)·노명우(盧明愚) 등과 함께 항일격문을 제작하여 부여농업보습학교에 살포하였는데,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에는 비밀결사 화성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펴던 중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 1936년 대성당의 재건을 시도하다 재차 붙잡혀 1년 동안 구금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일구(1910~1961)는 1931년 10월 충남 부여군 구룡면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구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강일구는 1931년 10월 5일 구룡면 금사리(錦寺里) 산중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3일 보다 적극적인 운동실천을 위해 동회를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연극, 강연 등을 개최해서 농민의 계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동년 4월 중순경에는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동년 5월 부여군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일구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철구(1894~1943)는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에 건너가 북간도 천영학교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조력하였다. 이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해 가지고, 만주에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수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모집 차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이에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을,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을,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각기 동지로 영입하고 동년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김재설·김삼현·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강경(江景)에서 김찬형(金燦亨)·김철수(金哲洙) 등을 영입하는 한편 이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였다. 이해 10월에는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 집에 은신 활동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김정제(金廷濟)·조창호(趙昌鎬)·김목현(金穆鉉) 등을 다시 동지로 확보하고, 부호가택을 은밀히 방문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뒤 다시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활동을 소상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동지 박창규·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모금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재만 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되어 동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1943년 목단강성(牧丹江省) 가목사(街木斯)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강병국, 강석기, 강성모, 강일, 강일구, 강철구 애국지사 6명이 배출된 것을 기념하는 표지석이다.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은 마을의 입구에 있고, 순국선열 호석 장석기 선생 추모비의 맞은편에 존재한다.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부터 장하1리 마을회관까지는 약 700m로, 도보로 11분 정도 소요된다.
인물정보
- 성명
- 강병국
- 한자명
- 姜秉國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915 ~ 1984
- 본적
- 충청남도 부여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33. 4월 충남 부여(忠南扶餘)에서 농민구락부(農民俱樂部)에 가입(加入)하여 야학(夜學)을 통(通)하여 농민청소년(農民靑少年)들의 항일 의식(抗日意識)을 계몽(啓蒙)하고 지하 활동(地下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겪은 사실이 확인됨.
강병국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강석기
- 한자명
- 姜錫箕
- 운동계열
- 문화운동
- 생몰년도
- 1862 ~ 1931
- 본적
- 충청남도 부여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다년간(多年間) 국조(國祖) 단군(檀君)을 신봉하는 대종교(大倧敎) 포교사업을 전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단군 유적(檀君遺蹟)을 봉심(奉心) 선교(善敎)하여 민족문화선양에 기여한 사실이 확인됨.
강석기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강성모
- 한자명
- 姜聖模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915 ~ 1940
- 본적
- 충청남도 부여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33. 4월 충남(忠南) 부여(扶餘)에서 농민구락부(農民俱樂部)에 가입(加入)하여 야학(夜學)을 통(通)하여 농민청소년(農民靑少年)들의 항일 의식(抗日意識)을 계몽(啓蒙)하고 지하 활동(地下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겪은 사실이 확인됨.
강성모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강일
- 한자명
- 姜日(星求)
- 운동계열
- 학생운동
- 생몰년도
- 1911 ~ 1974
- 본적
- 충청남도 부여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30년 광주학생사건시(光州學生事件時) 부여지구(扶餘地區) 주동자로 각 학교에 동지 규합 격문살포활동 및 1931 부여에서 화성당(火星黨)을 조직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2회에 징역 3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강일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강일구
- 한자명
- 姜日求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910 ~ 1961
- 본적
- 충청남도 부여
- 포상훈격
- 건국포장
- 포상년도
- 2009
공적개요
1931년 10월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구룡면(九龍面)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사회과학(社會科學)관련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여 교양부(敎養部)를 담당하고 1933년 4월 중순 칠모회(七侔會)를 조직하여 야학운영 및 신사상 보급과 관련한 모임을 지속하였으며 동년(同年) 5월 이후 동군(同郡)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농민계몽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강일구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강철구
- 한자명
- 姜鐵求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94 ~ 1943
- 본적
- 충청남도 부여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3
공적개요
1. 26세시 만주(滿洲)로 이주하여 3.1 운동당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 군자금모집과 대한 상해 임시정부(大韓上海臨時政府) 공채증권모집사건으로 인하여 1923년에 서대문 함흥형무소에서 3년복역하다 (동아일보 1932.4.1) 2. 만주(滿洲)국항일거두로 지칭되어 목단강성(牧丹江省) 계목사형무소에서 옥사하다 (치안유지법위반 1943. 10. 21)
강철구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