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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기념관
안창호(1878-1938)는 호는 도산(島山)이며 일제강점기 이토히로부미 암살사건,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을 접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때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 · 윤치호(尹致昊) ·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李甲) · 양기탁(梁起鐸) ·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太極書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 · 최남선(崔南善) · 김좌진(金佐鎭) ·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山東省)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그러나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 · 신민회 · 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에 취임하며 동포의 단결을 강조했다. 1919년 3 · 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 · 이시영 ·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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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리 만세광장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수변공원 일대에 조성된 광장이다. 1919년 당시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에서 있었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광장으로 조형물, 사진, 독립운동가들의 어록, 시비 등이 함께 있다. 현재 서울 강동구 상일동은 1919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였다. 1919년 3월 26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어 다음 날인 3월 27일 서부면 감일리 주민 40여 명이 초이리(草二里)의 서부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에 돌을 던졌다. 또한, 구천면 상일리(上一里)의 헌병주재소 앞까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때 구천면 길리(吉里)·명일리(明逸里)·암사리(岩寺里) 사람들도 만세를 부르려고 상일리 헌병주재소로 모여들어 시위대는 900~1,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자 헌병이 발포하여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다. 이 중에 농민이자 감일리(현재 하남시 감일동) 구장이었던 구희서(1872-1951)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도장관보고서에 따르면 3월 26일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에서 '마을 인민 소란'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를 참고로 거칠게나마 30~80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27일 시위는 선교사의 세브란스 병원 보고 자료 4건을 합하여 볼 때 구천면 상일리 소재 상일리헌병주재소와 서부면 초이리 소재 서부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사건 모두를 포함하며 서부면 일대의 야간 산불 시위도 해당 시위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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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집
김석진(1843-1910)은 조선 후기에 홍문관장령, 삼도육군통어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186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종친부(宗親府) 벼슬을 거쳐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다. 그 뒤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896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190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 해 1월 23일 오적신(五賊臣)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상소문에서 김석진은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 폐기가 가능하니 외부대신을 불러 여러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았고, 조병세(趙秉世)가 조약에 반대하다 순사하자 김석진은 조문길에 남대문 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산다.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10년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던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김석진을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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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낙균 안내판(한천로 애국지사 거리)
신낙균(1899-1955)은 일제강점기 경성사진협회 회장, 동아일보 사진과장 등을 역임한 사진기자이다. 1915년 인천공립상업학교 염직과를 졸업한 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학교에서 1년, 동양대학 문화학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4년에는 동경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서울로 돌아와 중앙청년기독교청년회(YMCA)학교 사진과 교사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관계 저서인 『사진학개설』을 출간하였다. 1929년 2월부터 경성사진사협회 제3대와 4대 회장을 맡았고, 1934년 7월 동아일보 사진과장으로 입사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하자 8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아사히신문사로부터 입수한 손기정 선수의 수상 장면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낙균을 포함한 관련자 여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만 33일간의 취조와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으나 장차 언론기관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그는 이로 인해 신문사를 떠났고, 1953년에는 수원 북중학교의 물리학 강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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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묘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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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
서울특별시 강북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건립된 천도교의 수도원이다.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1969년 09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1911년 가을에 2만 7946평의 밭과 임야를 구입하여, 1912년 여기에 건물을 세우고 그 이름을 봉황각이라고 하였다. 천도교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이 썼는데,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米芾)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손병희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뿌리내리게 하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손병희는 또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이곳에서 지방교역자 21명을 선발, 지명하여 수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는데, 1914년 4월까지 3년 동안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다. 손병희 자신도 1912년부터 7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천도교의 발전책과 구국운동을 구상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하였으며, 특히 3·1운동 때 이곳을 거쳐간 간부들이 주도적 구실을 하여 3·1운동과 인연을 가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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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묘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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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공원
김도연(1894-1967)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이칭은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현 서울 강서구 염창동 증미마을)출신으로 어려서 등촌동 허씨댁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15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아현동 태극학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1914년 긴죠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27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초기부터 북미한인유학생총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윤치영(尹致暎),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대한인동지회 가입,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등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지지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권유를 거부한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초대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해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야당의 참패하였는데, 한일협정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강력한 야당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도연은 같은 해 6월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8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생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1963년) 1967년 숙환으로 영면하여 사회장을 치렀고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1년에 애국장을 수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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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 동상
권기옥(1901-1988)은 일제강점기 때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부비항원, 대한애국부인회 사교부장 등을 역임한 비행사 · 독립운동가 여성이며 이칭은 임국영(林國英)이다. 3·1운동 참여 후 상해로 망명했다. 1925년 운남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단체와 교류하다가 일본 밀정 모함을 받고 체포·수감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산하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광복군 비행대 편성 구상 등의 활동을 했다. 해방 후 한때 정치활동을 했으며,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부인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별세하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2003년 국가보훈처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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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순교기념비
주기철(1897-1944)은 일제강점기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였다. 주기철은 경상남도 웅천 출신으로 1921년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6년 졸업하였다. 1926년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1931년 9월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36년 여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고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유계준(劉啓俊)·오윤선(吳胤善) 등이 출석하고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되었다. 감옥에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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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정 터(김성숙 집 터)
김성숙(1898-1969)은 호(號)는 운암(雲巖)이고 이명(異名)은 성암(星巖),창숙(昌淑)등이 있다. 1916년 출가하여 용문사, 봉선사에 있으면서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음. 이 곳에서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함.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 의열단, 광저우 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1942년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 후 내무차장,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 1945년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세력이 기울었으며 이후 근로인민당 재건 사건, 통일사회당 사건 등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름. 1964년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피우정(避雨亭)’을 지어줌, 1969년 4월 12일 별세하였다. 198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4년 7월 국립묘지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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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학회회관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 · 관서 · 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서북학회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서북학회 구성원들은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나 민족이 힘이 약한 나라나 민족을 침탈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나 약육강식 논리만이 적용되는 시대로 열패자인 약자는 실력양성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본 인식 위에 궁극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의 달성에 있었다. 민력양성을 위해 민력 결집은 시급한데, 방법은 단체설립과 단체 상호간의 단합으로 서북학회 설립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임시회장 이동휘의 지도 하에 서우회관(西友會館)에서 조직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정운복(鄭雲復), 부회장 강윤희(姜玧熙), 총무 김달하(金達河)를 선출하였다. 1909년에는 회장으로 오상규(吳相奎), 부회장 정운복, 총무 김명준(金明濬)을 선출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한북흥학회를 토대로 하였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었으며,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부총무 각 1명, 평의원 30명, 사찰원(司察員), 회계 각 1명, 서기 2명이었다. 월보(月報) 간행을 위해 주필 1명, 편집 1명, 협찬원(協贊員) 19명을 두었다. 개별 사무를 처리할 때는 위원이나 총대(總代)를 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支校)를 두었다.「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등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1909년 2월 이후에는 37개 지역에 학사시찰위원(學事視察委員)을 선정, 지회·지교 활동을 보완하였다. 서북지방민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면 관(官)·민(民)을 막론하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은 2,300명 정도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신지식층·신흥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시민층이었다. 항일교육구국운동은 국민들에게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하는 것이었다. 교사 양성에 주력하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노동자 교육을 위한 수상야학(水商夜學)·측량과(測量科)·심학강습소(心學講習所)·농림강습소(農林講習所) 등을 설치,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각 지역 사립학교 교무의 지도와 후원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계몽강연활동은 학회의 여러 모임, 특히 운동회를 통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당시 상황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실력양성운동에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서북학회월보』라는 학보를 발간, 1910년 1월까지 계속하였다. 학보를 통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민권론(民權論)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단체론·애국론·교육구국론·실업진흥론·사회관습개혁론 등을 전달하여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민족산업진흥운동이 중요시된 것은 서북학회의 사회적 기반이 신흥시민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교육을 장려하고, 특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관련해 농림(農林)의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좀더 광범한 지역과 대중에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사립학교령」·「학회령」·「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지방비법(地方費法)」 등 일제의 탄압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하여 민중들이 적극 대처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서북학회 분쇄책이 시도되자, 1909년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여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운동에 주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립학교 유지방법 강구 등의 교육운동과 농회·농림강습소 설립,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학회는 애국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진정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관지로는 『서우(西友)』를 계승한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가 있다. 1910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