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낙균 안내판(한천로 애국지사 거리)
사적지 개요
신낙균(1899-1955)은 일제강점기 경성사진협회 회장, 동아일보 사진과장 등을 역임한 사진기자이다. 1915년 인천공립상업학교 염직과를 졸업한 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학교에서 1년, 동양대학 문화학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4년에는 동경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서울로 돌아와 중앙청년기독교청년회(YMCA)학교 사진과 교사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관계 저서인 『사진학개설』을 출간하였다. 1929년 2월부터 경성사진사협회 제3대와 4대 회장을 맡았고, 1934년 7월 동아일보 사진과장으로 입사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하자 8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아사히신문사로부터 입수한 손기정 선수의 수상 장면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낙균을 포함한 관련자 여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만 33일간의 취조와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으나 장차 언론기관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그는 이로 인해 신문사를 떠났고, 1953년에는 수원 북중학교의 물리학 강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인물정보
- 성명
- 김구
- 한자명
- 金九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76 ~ 1949
- 본적
- 황해도 벽성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18세(歲)에 동학당(東學黨)에 가입하여 해주 동학군(海州東學軍)의 선봉이 되었으니 당시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음 2. 해주(海州) 죽산장(竹山場)에서 총군(銃軍) 7백명(百名)을 거느리고 해주(海州)를 습격하려다 실패함. 3. 1896년 2월에 안악 치하포여점(安岳鴟河浦旅店)에서 왜 육군중위(倭陸軍中尉)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참살, 동년 5월에 피체되어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됨. 4. 1898년 3월 탈옥하여 삼남 각지(三南各地)를 방랑하여 공주 마곡사(公州麻谷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익년 귀향 하속 하였음. 5. 그 후 고향에서, 교육에 종사하다가 1909년 11월 이등저격사건(伊藤狙擊事件)의 혐의로 해주(海州)에 투옥됨. 6. 1910년 서울 양기탁가(梁起鐸家)에서 신민회 중요간부회의(新民會重要幹部會議)를 개최하여 남만(南滿)에 무관학교설립(武官學校設立)을 의결하고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으로 피검되어 17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7월에 출옥함. 7. 3.1 운동(運動) 후 상해(上海)로 탈출하여 임정경무국장(臨政警務局長)에 취임(就任)하고 1923년 임정내무총장(臨政內務總長) 1927년에 국무령(國務領)에 취임(就任)함. 8.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을 시켜 왜황(倭皇)을 저격(狙擊)케하고 동년 4월 윤봉길(尹奉吉)을 시켜 상해(上海)에서 왜장(倭將) 백천의칙(白川義則) 등에 폭탄을 투척토록 함. 9. 장개석(蔣介石)과 만나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한인무관양성(韓人武官養成)의 특설반(特設班)을 설치할 것을 약속하고 사관 백명을 양성함 10.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정 주석(臨政主席)에 취임후 서안(西安)에 광복군(光復軍)을 설치(設置)하고 훈육(訓育)시켰으며 입국 항전(入國抗戰)을 계획중 1945년 11월 15일에 귀국하였음 11. 1948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음 향년 73세(歲)
김구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김규식
- 한자명
- 金奎植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81 ~ 1950
- 본적
- 서울 서울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89
공적개요
1919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樹立)에 참여(參與)한 후(後) 외무총장(外務總長), 학무총장(學務總長)에 임명(任命)되었으며, 국제연맹(國際聯盟) 임정 대표(臨政代表)로서 독립청원(獨立請願)을 위하여 외교 활동(外交活動)을 하였고 임정(臨政)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委員長)으로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發行)하여 독립 자금(獨立資金)을 모집(募集)하였으며, 1932년후(年後) 국무위원(國務委員),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 부주석(副主席) 등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요인(要人)으로서 우리나라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이바지한 사실이 확인됨.
김규식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박두종
- 한자명
- 朴斗鍾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904 ~ 1967
- 본적
- 함경남도 홍원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 1926 순종(純宗) 인산 당일(當日)에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다가 체포되고 피체(被逮)된 70여명 중에서 주범 11명을 기소하였는데 그중 1인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6년 6월 7월 10월 11월, 1927년 3월 4월)
박두종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손병희
- 한자명
- 孫秉熙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61 ~ 1922
- 본적
- 경기도 경성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동학란(東學亂) 후(後) 망명하였으며 1901년 일본(日本) 대판(大阪)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이상헌(李相憲)으로 변명(變名)하더니 후에 동학당(東學黨) 3세 교주(敎主)가 되었음. 2. 국치(國恥) 후에는 인재양성(人材養成)에 진력(盡力)하였으며 1차대전(一次大戰) 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세계 개조(世界改造)의 표어(標語)가 되어 세계(世界) 신질서(新秩序) 건설(建設)이 태동(胎動)하든 1919년 2월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33인의 필두(筆頭)로 조선독립을 선언 하고 적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으다가 병으로 보석(保釋)되어 요양중(療養中) 3. 1922년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서거(逝去)함.
손병희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신낙균
- 한자명
- 申樂均
- 운동계열
- 문화운동
- 생몰년도
- 1899 ~ 1955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3.1운동(運動) 당시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만세 시위(萬歲示威)에 참가하였으며 1936년 백림(伯林)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 등이 세계를 제패(制覇)하자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는 일장기(日章旗)를 말소(抹消) 보도(報道)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세계에 한민족(韓民族)의 우수함을 과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한 사실이 확인됨.
신낙균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윤봉길
- 한자명
- 尹奉吉
- 운동계열
- 의열투쟁
- 생몰년도
- 1908 ~ 1932
- 본적
- 충청남도 예산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19세 때(歲時)부터 야학을 경영함 2. 1931년 2월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모직공장직공 세탁소외교원을 거쳐 김구(金九)를 만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함 3. 1932년 4월 29일 왜황(倭皇)의 천장절(天長節)을 기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하회가 상해 홍구공원(上海虹口公園)에서 개최됨을 듣고 일본시민차림으로 오전 11시 40분 식대(式台)정면에 투탄하여 왜 거류민단장(倭居留民團長) 하서(河瑞)가 즉사했고 최고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은 5월 26일에 죽고 제3함대사령관(艦隊司令官)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은 한쪽 눈이 상실되고 제9사단장(師團長) 식전겸길(植田謙吉)은 다리가 절단되고 공사(公使) 중광규(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지고 촌정우야 민단서기 외(村井友野民團書記外)에 왜 부녀자(倭婦女子) 수명이 부상하였음 4. 윤의사(尹義士)는 왜 헌병(倭憲兵)에 피체되어 일본 대판(日本大阪)으로 이송되고 12월 9일 대판위수형무소(大阪衛戍刑務所)에서 취의(就義)하였음 향년 24재(才)
윤봉길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상설
- 한자명
- 李相卨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70 ~ 1917
- 본적
- 충청북도 진천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광무제(光武帝)의 밀령(密令)으로 화란 “해그”에서 개최(開催)된 평화회의(平和會義)에 가서 일본(日本)의 침략성(侵略性)을 통박(痛駁)하고 한국독립(韓國獨立)의 정당성(正當性)을 주장(主張)하여 많은 동정(同情)을 얻었음. 2. 해삼위(海蔘威)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다가 노국관헌(露國官憲)의 금지(禁止)하는바 되었으며 3. 일본인(日本人)이 그의 인도(引渡)를 요구(要求)하자(이전 “해그” 밀사 사건(密使事件)으로 궐석판결(闕席判決)로서 사형 언도(死刑言渡)를 받음) 그는 수감(收監)되었다가 시베리아에 추방(追放)되어 그 후(後) 1911년 시베리아에서 객사(客死)하다.
이상설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시영
- 한자명
- 李始榮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69 ~ 1953
- 본적
- 서울 서울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49
공적개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벌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친형 이회영(李會榮) 등의 가족 50여 명을 이끌고 중국 유하현(柳河縣) 추가가(鄒家家)로 망명하였다. 1911년 유하현 삼원보에서 교육진흥과 독립군양성을 목적으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1912년 통화현(通化縣) 합이하(哈泥河)에서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시켰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했으며, 이들은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의 주축을 이루었다. 1913년 북경(北京)에서 중국의 원세개총통(元世凱總統)을 통하여 동삼성(東三省)의 한교(韓僑)문제를 원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으로 재임하였다. 1929년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1933년 가흥(嘉興)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을 고취하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 감사, 1938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위원, 재무부장,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1945년 8월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시영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준
- 한자명
- 李儁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59 ~ 1907
- 본적
- 함경남도 북청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의장(評議長)에 피선되고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반대운동을 하였으며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함 2. 1907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화란(和蘭) “해그”에서 개최케 되자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위임장과 조서를 가지고 가서 회의참석을 간청하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체결되었음을 설명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려고 하였음 3. 그러나 열국 위원(列國委員)들이 사정은 짐작하나 공식상 처리에 곤란하다 하여 3밀사(密使)에게 퇴장을 명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음
이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조병옥
- 한자명
- 趙炳玉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894 ~ 1960
- 본적
- 충청남도 천안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미국(美國)콜롬비아대학(大學)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신간회(新幹會) 총무(總務) 2.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과 흥사단(興士團)사건 등 항일투쟁으로 2차에 걸쳐 5년간 수형됨 3. 해방 후 한민당(韓民黨) 조직 군정 시(軍政時) 경무부장(警務部長), 1953년 내무부 장관(內務部長官) 3대 민의원(代民議員), 민주당(民主黨)조직, 1956년 민주당대표최고위원, 1958년 4대민의원, 1960년 대통령입후보 중 병사(病死).
조병옥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주시경
- 한자명
- 周時經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76 ~ 1914
- 본적
- 황해도 평산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포상년도
- 1980
공적개요
1894년부터 국어국문(國語國文)의 과학적 연구로 우리문화의 횃불이 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여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순한글로 발행하여 온 국민에게 애국애족사상을 고취하고 많은 학자를 배출시킨 현저한 공적이 인정됨.
주시경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