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2.8 공원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 동상·부조 | 비석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70-3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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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김도연(1894-1967)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이칭은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현 서울 강서구 염창동 증미마을)출신으로 어려서 등촌동 허씨댁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15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아현동 태극학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1914년 긴죠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27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초기부터 북미한인유학생총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윤치영(尹致暎),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대한인동지회 가입,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등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지지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권유를 거부한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초대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해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야당의 참패하였는데, 한일협정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강력한 야당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도연은 같은 해 6월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8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생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1963년) 1967년 숙환으로 영면하여 사회장을 치렀고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1년에 애국장을 수훈하였다. 

탐방로그

"2.8 공원"은 "2.8 독립 선언"에서 유래했다. 1919년 2월 8일 일제강점기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이 "2.8 독립 선언"이다. 이 선언은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도했다.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이광수,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서춘 등이 독립단 대표를 맡았는데, 이 중 한 사람인 유학생 김도연이 바로 이 곳 출신이다.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억하며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공원 이름이 "2.8 공원"으로 붙여졌다.

인물정보

성명
김도연
한자명
金度演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894 ~ 1967
본적
경기도 김포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5.11.10 일국(日國) 동경(東京)에서 유학생이 중심이 된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9.1.6 학우회(學友會) 주최로 개최된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의 대표선발을 제의하여 10명중 1인으로 선발된 후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으며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등사와 민족대회(民族大會) 소집 청원서(召集請願書), 결의문(決議文) 등을 작성 준비하였고 동년(同年) 2월8일 적도(敵都)에 있는 Y.M.C.A회관에서 발표할 독립선언서에 서명 발표케한 후 결의문을 낭독하여 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금고(禁錮)9월을 받고 복역하였으며 1942.10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징역2년, 3년간 집행유예(執行猶豫)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상덕
한자명
金尙德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92 ~ 1956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2. 8 동경(東京)에서 조선청년독립단회원(朝鮮靑年獨立團會員) 김철수(金喆壽) 윤창석(尹昌錫)등 11명(名)과 같이 2. 8 독립선언(獨立宣言)을 하고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7월15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았으며, 1920년 중국(中國)으로 망명(亡命)하여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1923년 국민대표회의 대표(國民代表會議代表), 그후 대한청년동맹회 집행위원(大韓靑年同盟會執行委員), 1928년에는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 통합 운동(統合運動)으로 전민족(全民族) 유일당조직책진회(唯一黨組織策進會)를 구성(構成)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의원(臨時議政院議員) 임정 선전위원회(臨政宣傳委員會)등으로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철수
한자명
金喆壽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896 ~ 1977
본적
경상남도 양산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8 동경 유학생 학우회(學友會)를 조직(組織)하여 민족의식(民族意識) 고취와 항일사상(抗日思想) 앙양(昻揚)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편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오다가 “동경(東京) 28학생독립선언”의 주동자로 체포(逮捕)되어 금고(禁錮) 9월형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송계백
한자명
宋繼白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896 ~ 1922
본적
평안남도 평원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919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에 앞서 일본 동경(日本東京)에서 2.8독립선언(獨立宣言)을 선포(宣布)할 때 서명(書名)하고 그 선언문(宣言文)을 일제(日帝)의 감시(監視)를 피(避)해가지고 국내(國內)로 밀입국(密入國)하여 3.1운동(運動)의 서곡(序曲)이 되게 하였다.

송계백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윤창석
한자명
尹昌錫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894 ~ 1966
본적
충청남도 천안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1. 6 재일 동경(在日東京) 학우회(學友會) 주최로 개최된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의 위임을 받은 대표 11인 중 1인으로 선발되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의 인쇄와 결의문을 국, 영, 일문으로 작성하여 일 내각(日內閣) 각 대신(各大臣)에게 우송하는 등 활동하다가 2월 8일 적도(敵都)에 있는 Y.M.C.A회관에서 발표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활동하다가 금고 9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윤창석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종근
한자명
李琮根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895 ~ 1975
본적
경기도 개풍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년 1월 6일 재일 동경(在日東京) 학우회(學友會) 주최로 개최된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의 위임을 받은 대표 11인중 1인으로 선발되어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등사(謄寫)하고 민족대회(民族大會) 소집 청원서(召集請願書)의 인쇄와 결의문을 국(國) 영(英) 일문(日文)으로 작성하여 일 내각(日內閣) 각 대신(各大臣)에게 우송하는 등 활동하다가 2월8일 적도(敵都)에 있는 Y.M.C.A회관에서 발표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활동하다가 금고7월15일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종근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팔용
한자명
崔八鏞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891 ~ 1922
본적
함경남도 홍원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에 앞서 일본 동경(日本東京)에서 2.8독립선언서를 선포(宣布)할때 서명(署名)하고 주도적(主導的)인 활동(活動)을 하였음

최팔용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