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손연준 순교시비
손연준(1902-1950)은 해방 이후 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된 목사로 호는 산돌이며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 손종일(1871-1945)은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장로였으며 경남 함안군(咸安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 2006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손양원은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 중 궁성요배를 거절하여 퇴학을 당했으나, 선교사 맥레이(Macrae, L.)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한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 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부산 나병원교회, 울산 방어진교회·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동양선교회에서 일하던 중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손양원은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그 뒤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일하다가 194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수정하기.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양림동 역사인물거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역사인물거리이다. 양림동 사직도서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의 근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안내판들이 마련되어있다. 한쪽 벽면에는 먼저 서양인 선교사들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광주기독병원을 운영하며 지역내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던 우월순 선교사(Robert Wilson), 목포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한 오기원 선교사(Clement Owen), 1919년 한국 YMCA를 조직하여 사회활동을 했던 고든 어비슨 선교사(Gordon Avise)를 볼 수 있다. 맞은편 벽면에는 부은 정율성 선생, 이강하 예술가, 조아라 선생, 오방 최흥종 선생, 배동신, 김현승 시인 등이 있다.
-
광주 3.1 운동 기념 동상(광주 수피아 여학교)
수피아 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광주 수피아 여학교(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56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는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준비한 장소이다. 현재 수피아여자고등학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교내에는 1911년에 건축되어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는 수피아홀(등록문화재 제158호)이 있다. 이 건물의 1층은 건축 초기부터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홍순남을 비롯한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밤새도록 기숙사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제작한 곳도 수피아홀의 지하 1층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수피아 대강당 앞에는 1995년 수피아여중·고 총동창회가 건립한 <광주3•1만세운동> 동상이 있다. 무궁화가 새겨진 대현 화강암 기단 위에는 당시 교복 차림의 여학생 네 명이 태극기를 치켜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는 형상을 조각한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동상 앞부분 하단에는 ‘광주3•1만세운동기념동상’이라는 제목의 표석이 놓여 있고, 동상 설립 경위와 당시 옥고를 치른 2명의 교사와 21명의 학생 명단이 새겨져 있다.
-
조아라 기념비
조아라는 학생독립운동, 여성 및 아동의 교육과 인권을 위해 평생 헌신한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조아라는 1912년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인 아버지가 설립한 사설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교사이자 YWCA 창립자인 김필례를 만난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30년경에 수피아여학교 동기 10여 명과 ‘백청단’이란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문맹퇴치와 아동교육에 힘쓴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1933년 1월에 ‘백청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개월 후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는 강제해직을 당한다. 1935년부터 총독부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1937년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자진 폐교를 한다. 수피아여학교가 폐교하자 일제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조아라를 검거해 1개월간 수감한다. 출소 후 1935년에 혼인한 남편 이태규가 있는 평양에 가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닌다. 1938년 평양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부부는 광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조아라는 스승 김필례와 함께 신사참배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와 해체된 광주 YWCA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YWCA를 재건한 후 조아라는 광주 YWCA에서 여성 인권과 여성 인재 양성에 애쓴다. 1952년 7월, 광주 YWCA에 ‘성빈여사’를 만들어 전쟁 여자 고아를 수용한다.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성빈여사의 학생들과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1962년에는 ‘별빛학원’을 설립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권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매매여성의 재활센터인 ‘계명여사’을 열고 10대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킨다. 1973년 광주 YMCA 회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내란음모죄로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평생을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92살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조아라에게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고, 2018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독립 광주신문 제작지
조선독립광주신문(朝鮮獨立光州新聞)은 광주에서 있었던 3.10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민중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황상호(黃尙鎬)가 서울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본따서 발행한 신문이다. 제4호까지 발행되었고, 주동자들은 징역을 언도받았다. 황상호 등 제중원 직원들은 광주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과 「2.8독립선언서」 등을 미리 접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광주와 전라남도에도 3.1운동의 필요성과 움직임을 알릴 매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는 9절지 크기의 종이 2장으로 만들어졌다. 제4호까지 간행되었는데 제1호의 경우 1면에는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의 내용이 간추려 들어갔고, 2면에는 1919년 3월 10일 일어난 3.10만세운동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밖에도 고종 독살설, 미국 월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이 포함되었다.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제중원의 회계 직원이던 황상호와 간호사 홍덕주(洪德周), 약제사 장호조(張鎬祚) 등에 의해 제1호 300부가 제작되었다. 1호는 3월 13일 광주 큰 장[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교 부근], 광주시내, 제중원 등에서 배포되었다. 2호는 1919년 3월 18일 광주 큰 시장에서 지역민에게 배포되었다. 이후 황상호 등은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장호조, 홍덕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선독립 광주신문은 광주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현재 원본은 1호만 보전되고 있는데, 이 원본이 1983년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의 선교사 사택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조선독립광주신문』이 광주와 전라남도의 만세 운동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
3.1만세운동길(아리랑고개 벽화)
광주 남구 양림동 3·1만세운동길에 위치한 나무 벽화이다. 양림의원 골목을 시작으로 양림교회를 지나 정율성 거리 앞까지 이어져 있다. 1970년에는 이곳을 아리랑 고개라 불렀으나 현재는 신도로명 주소 정책에 따라 3·1만세운동길로 명명하여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아리랑 고개라고 불린 까닭은 수피아 여학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이 곳 언덕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불러, 그날 이후 이곳이 '아리랑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벽화에는 광주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마리아 여사, 김함라 여사, 김철, 남궁혁, 비밀독서모임, 박애순 여사, 윤형숙 여사에 대한 일화가 묘사되어있다.
-
기억의 언덕(광주 3.1운동 발상지)
광주양림교회 옆 양림 휴먼시아 2단지 어린이 놀이터 조경 부지에 만든 테마공간에 조성된 3·1만세운동 발상지이다. 이곳은 1919 년 광주지역의 3·1운동을 최초 모의했던 남궁혁 선생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있어 '기억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테마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1919년 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가 독립선언서를 숨겨 광주 언니네로 가져와 독립선언에 관해 알렸고 광주의 3·1만세운동은 최흥종이 서울에서 체포되자 김철을 중심으로 교인들과 비밀 독서모임 회원들이 모여 거사를 계획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만세 물결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
호남 순국열사비(포충사)
호남순국열사비가 위치한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忠烈公 高敬命)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을 함께 배향하였으며, 1603년 사액을 받았다. 호남순국열사비는 포충사 구사당 앞에 있는데, 이 비석은 높이 190cm, 폭 50cm로 앞면은 호남순국열사비 뒷면은 고광순, 황현 선생 등 한 말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이혁 전 전남대 교수 등이 참여한 호남순열모의계가 1951년 세운 것이다. 조선 시대 말기~대한제국기의 항일 의병활동을 한 호남지역의 순국열사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호남순열모의계가 광복 이후 한말 의병 자료를 수집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비석을 세우고 사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1894년에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 형제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다. 고광문(高光文, 1860.∼1898.5.8.)은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12대손으로, 고경명의 다섯째 아들인 해사공 고유후(高由厚)의 후손이었다. 고광문의 두 동생은 고광인(高光寅, 1862∼1936, 자는 응선(應善), 고광룡(高光龍, 1867∼1938, 자는 응오(應五)이었다. 20대 말, 30대 초중반 나이 세 형제가 모두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고광문이 35세, 고광인이 33세, 고광룡이 28세 나이였다. 고광문은 동학군에 전 재산을 바치며 1백여 병력의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고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화중·최경선의 부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894년 12월에 손화중은 부대를 해산하였으나 고광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열여섯살이 된 아들 고재언과 함께 곡성군 옥과면 용머리로 피신하여 은둔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광문의 후손은 이렇다. 고광문→고재언(高在彦, 1879∼1942)→고흥석(高興錫, 1910∼2000)→고영두(高永斗, 1930∼2006)→고병삼(高秉三, 1976년생, 생존)으로 이어졌다.고광문의 증손인 고영두가 선대의 유훈인 충정(忠貞)과 근면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고영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과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영두의 아내 정영숙과 아들 고병삼은 광주시 남구 이장동 216번지 일대에 있던 고영두의 땅 1500평을 국가에 기증하여,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조성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이 기념공원은 2017년에 완성되었다. 동학 3형제 가운데 고광문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심의를 거친 뒤에, 아래와 같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아울러 고광문의 후손들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유족 등록이 이루어졌다. 전라도 광주지역과 그 주변 일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45명)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강봉희, 강영희, 고광룡, 고광문, 고광인, 곽윤중, 김덕구, 김복환, 김용택, 김종태, 노병철, 문달현, 박병옥, 박용운, 손상옥, 오권선, 유광화, 윤주은, 윤태한, 이겸호, 이춘영, 이몽근, 이병기, 이성호, 이수갑, 이응범, 이의호, 이인숙, 이중전, 장경삼, 장공삼, 장옥삼, 전유창, 정일채, 정평서, 조승현, 조영운, 채봉학, 최성칠, 최윤주, 최장현, 최평집, 한달문, 허원, 홍자범 등이 있다.
-
광복촌 유래비
광복촌은 1976년 정부가 주월동 소재의 과수원 부지를 매입하여 무주택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당초에 원호주택(광복촌)이란 이름으로 기공식을 가졌으며 이태리식 주택(대지 약 165.2㎡, 건물 약 79.3㎡)으로 하나의 설계도로 열두 채를 지어 집 모양들이 비슷했다. 당시 집을 짓는 비용 200만원 중 정부에서 50만원을 지원하고 100만원은 융자, 50만원은 자부담이었다. 당시로써는 고급주택으로 분류돼 형편이 어려운 일부 독립유공자들은 건축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했다. 광복촌에 살았던 독립유공자는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연락 활동을 했던 최봉진 선생을 비롯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윤창하‧송동식·조길룡 선생 등이었다. 또 한말 의병장인 심남일 선생과 일제항거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한 이홍빈 선생,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동훈 선생 후손도 광복촌에서 함께 생활했다. 현재 광복촌 자리에는 윤창하 선생의 주택이 유일하게 보존돼있다. 2021년 광주광역시 남구는 광복마을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료 조사와 연구 용역을 거쳐 그 유래를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
윤영기 공적비
윤영기 (1880-미상)은 전라남도 창평에서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경안(京安)이고 호는 정재(貞齋), 이칭으로는 영기(泳琪), 영기(泳祺)가 있다. 전라남도 광산 출신. 윤석준(尹錫峻)의 아들이다. 1906년 7월에 고광순(高光洵)을 찾아가 전라남도 창평에서 거의하여 호군으로 추천되었다. 병력을 강화하고자 광주에 나와 해산군인 40여명을 모으고, 전라남도의 순천·석곡 등지에서 병력 및 무기를 증강하며 왜적과 싸우면서 광양에 이르렀다. 1907년 구례로 행군하기에 앞서 고광순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개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산포수(山砲手) 수백명을 거느리고 함양의 소정(小井)·백모(白毛) 두 산골짜기에 이르러 전력을 강화하며, 60명이 넘는 강화의 해산군인과 합세하였다. 1908년 화개로 진군하다가 의신동에서 접전하여 30여명의 적을 섬멸하였다. 다시 운봉과 함양·엄천에서 적과 격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부득이 물러서게 되고 10여년을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울의 애국지사들과 연락하면서, 광주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1년에 7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흥학관
흥학관(興學館)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청년의 사랑방이자 지역민의 문화, 체육, 교육, 집회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광주 지역 내의 독립운동 사적지 중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흥학관 터'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하였다. 1921년 광주의 부호 최명구(崔命龜)가 희사한 돈으로 최명구의 동생인 최종윤이 지역 청년들의 문화, 체육 활동 진흥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최종윤은 1920년 광주청년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1921년부터는 『동아일보』 광주지국의 총무와 기자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흥학관은 실내 체육과 강연 등 문화 행사가 가능한 흥학관 건물과 건물 앞의 너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흥학관 내부는 유도나 권투 교습의 체육 활동을 비롯 광주청년회, 신간회 광주지회, 조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광주청년학원 등의 사무실과 집회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 외에도 광주여자청년회 주도의 여자 야학 및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가 진행하는 야학도 흥학관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