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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순국열사비(포충사)

유형
비석
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775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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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호남순국열사비가 위치한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忠烈公 高敬命)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을 함께 배향하였으며, 1603년 사액을 받았다.

호남순국열사비는 포충사 구사당 앞에 있는데, 이 비석은 높이 190cm, 폭 50cm로 앞면은 호남순국열사비 뒷면은 고광순, 황현 선생 등 한 말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이혁 전 전남대 교수 등이 참여한 호남순열모의계가 1951년 세운 것이다. 조선 시대 말기~대한제국기의 항일 의병활동을 한 호남지역의 순국열사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호남순열모의계가 광복 이후 한말 의병 자료를 수집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비석을 세우고 사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탐방로그

호남 순국열사비가 위치한 광주 포충사에서는 1603년 한석봉이 쓴 포충사 편액을 볼 수 있다.

인물정보

성명
고광순
한자명
高光洵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48 ~ 1907
본적
전라남도 담양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7년 의병장으로 전남(全南) 구례(求禮)에서 구례(求禮)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였음 2. 동년 동복군(同福郡)에서 의병 백여명을 모아 왜적과 교전하였음 3. 1907. 10. 17 지리산(智異山)에서 광주(光州)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하였음

인물정보

성명
고제량
한자명
高濟亮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49 ~ 1907
본적
전라남도 담양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왜적(倭敵)에 항거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10년간 무력투쟁을 하다. (이상은 본인제출 공적서(功績書)에 의한 기재임) 2. 을미지변(乙未之變)에 창의 거병(倡義擧兵)하여 북상(北上)하다가 고종(高宗)의 선유(宣諭)로 해산(解散)되었다. (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 p.71) 3. 을사조약 체결(乙巳條約締結)됨에 재기(再起)하여 고광순(高光洵)은 대장(大將), 본인은 부장(副將)이 되었다. 4. 1907년 5월에 능주(綾州)를 공략하였으나 별 무전적(別無戰績). 5. 1907년 8월에 동복(同福)을 공략하여 승리하고 연곡사(燕谷寺)에 본영(本營)을 설치하였다. 6. 화개동(花開洞) 공략에 실패하였다. 7. 호서의병장(湖西義兵將) 김동신(金東臣)이 지리산(智異山) 문수암(文洙菴)을 점거(占據)함에 왜병(倭兵)이 추격하여 옴으로 본인은 왜병(倭兵)과 교전하여 손해(損害)를 줌. 손해(損害)를 본 왜병(倭兵)은 연곡사(燕谷寺)를 복멸(覆滅)할 계획으로 대거 공격(大擧攻擊)함에 왜병(倭兵)과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기삼연
한자명
奇參衍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1 ~ 1908
본적
전라남도 장성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96년 을미사변 후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이르켜 광주(光州)에서 회맹하고 1902년 봄에 다시 기병코저 하다가 평리원에 구금되었으나 옥리의 동정으로 탈옥하였다 2. 1907년 9월에 사의병 수백명을 이르켜 장성(長城) 수록산에서 각 읍 의병과 회맹하고 9월 23일 고창(高敞) 문수사에서 적병과 교전해서 대승하였다. 이러므로 부하 수천명이 집결하였다 3. 동년(同年) 10월에는 고창(高敞)과 정읍(井邑), 11월에는 부안(扶安)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였고 광주(光州) 담양(潭陽)을 습격(襲擊)한 뒤 추월산(秋月山)에서 처음 패(敗)하고 순창(淳昌)에서 왜경(倭警)에게 잡혀 이듬해 광주사장(光州沙場)에서 피살(被殺)

인물정보

성명
김기순
한자명
金奇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62 ~ 1919
본적
전라남도 곡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음력 2월 6일 고종황제의 인산 이후 국망을 통곡하다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자택에서 자진순국함.

인물정보

성명
김영상
한자명
金永相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36 ~ 1911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0.10.24 국권을 침탈한 일제가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준다고 할 때「대한신민(大韓臣民)이 어찌 원수의「돈」을 받겠는가」하고 수차에 걸쳐 협박하는 것을 거절하다 일 헌병대(日憲兵隊)에 피체되어 군산(群山)으로 이송될 때 만경강(萬頃江)에 투신하였으나 일헌병이 구조하여 군산감옥(群山監獄)에 수감시키자 9일간을 절식하여 옥중사(獄中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원국
한자명
金元國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0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905년 9월 전남(全南) 광산(光山) 송정읍(松汀邑)에서 왜병타살 후 피신함. 2. 1906년 3월 실(實) 제(弟) 김원범(金元範)과 함께 광주시(光州市) 교외 무등촌(無等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병과 교전. 3. 1907년 12월 김태원(金泰元)과 합세하여 부하 300여명으로 일 광주(光州) 수비대와 교전, 일병 40여명을 사살함. 4. 1908년 4월 9일 함평군(咸平郡)의 적양면(赤良面), 여황면(艅艎面), 오산면(鰲山面) 등을 근거지로 하여 왜병과 교전 중 광주(光州) 교외에서 소위 삼국대장이라고 하던 길전(吉田)을 사살함. 5. 1909년 3월 장성군(長城郡) 남일면(南一面)에서 부하 150명으로 왜적과 교전. 3월 18일 부하 80명으로 왜적과 나주에서 교전. 5월 19일 불갑산(佛甲山)에서 왜적과 교전. 6일 광주(光州) 우산면(牛山面)에서 왜군과 교전중 피체(被逮)되어 목포(木浦)로 호송 도중(護送途中) 왜병을 타살(打殺)하고 함평군하(咸平郡下) 먹굴산으로 피신(避身)함.(6월 11일) 6. 1909년 6월 이후 조경환(曺京煥)의 선봉장(先鋒將)으로서 활약했으나 조경(曺京)의 전사(戰死)로 말미암아 그의 군사(軍士)를 인계(引繼)받아 스스로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고 곽진일(郭鎭一)을 선봉장(先鋒將), 오덕신(吳德信)을 중군장(中軍將), 김재연(金在淵)을 후군장(後軍將)으로 하여 의병(義兵) 500여명으로 광주(光州), 나주(羅州), 능주(綾州), 동복(同福), 창평(昌平), 담양(潭陽), 장성(長城), 영광(靈光)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함. 7. 1909년 12월 5일 영광 불갑산(佛甲山)으로 이동중 왜군과 교전, 여기에서 피체(被逮)되어 광주 감옥(光州監獄)으로 호송(護送), 다시 대구감옥(大邱監獄)으로 이송되어 총살(銃殺)당함.

인물정보

성명
백인수
한자명
白麟洙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56 ~ 1910
본적
전라북도 고창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5년 10월 5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결사반대하고 당시 참장(參將) 백성기(白性基)와 같이 전국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중 1910년 8월 29일 합방의 비보를 받고 통분하여 결사를 각오하고 식음을 금하였으나 절명되지 않아 9월 3일 통분분사불충(痛憤憤死不忠) 사죄(謝罪)의 유서를 남기고 자문(自刎)하여 9월 15일 순절(殉節)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양한규
한자명
梁漢奎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44 ~ 1907
본적
전라북도 남원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8

공적개요

1.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비통히 여기고 거의 곡성(谷城), 구례(求禮), 함양(咸陽), 운봉, 거창(居昌), 임실(任實), 순창(淳昌) 등지에서 1,000여명이 의병을 모으다 (기려수필(騎驢隨筆) p.112) 2. 1906년 남원진위대(南原鎭衛隊)를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고 일본헌병을 살해하다 3. 1907년 2월 일경의 기습으로 전사하다 (이상 2, 3 매천야록(梅泉野錄) pp.406, 413, 419)

인물정보

성명
양한묵
한자명
梁漢默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2 ~ 1919
본적
전라남도 해남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94년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며 삼십삼인 중(三十三人中) 1인(人)으로서 검거되어 1919년 5월 26일 옥사하였음

인물정보

성명
양회일
한자명
梁會一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6 ~ 1908
본적
전라남도 화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7년~1908년까지 전남일대(全南一帶)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 현저한 공적을 세우고 1908년 장흥옥(長興獄)에서 7일간 단식(斷食) 옥사(獄死)함.

인물정보

성명
이석용
한자명
李錫庸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7 ~ 1914
본적
전라북도 임실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서기 1907년 8월26일 진안(鎭安)서 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고 동 9월 12일에 왜적(倭敵) 굴구원태랑(掘口源太郞)를 총(銃)으로 쏴서 팔을 부러지게 하고 전투 장비(戰鬪裝備) 수천 건(數千件)을 불태웠다 또한 용담 심원사(龍潭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 의병(義兵)과 합진(合陣)하여 산중(山中)에서 내려온 적(敵)10여명을 격살(擊殺)하였고 1908년 봄에 남원(南原)에 진출하여 적추장3명을 격살(擊殺)하고 왜죄십조(倭罪十條)를 대서(大書)하여 각 거리에 게시(揭示)하였고 그 후 남원(南原), 전주 등지(全州等地)를 중심으로 여러번 전투(戰鬪)하였고 아군(我軍)의 사상(死傷)도 많았다. 또순종(純宗)에 상류(上琉)하여 보호조약(保護條約) 폐기(廢棄)와 적신(賊臣)의 참주를 청(請)하였다. 2. 1913년 겨울에 임실서 체포(逮捕)되어 전주(全州), 대구감옥(大口監獄)에서 악형(惡刑)을 받고 1914년 4월 4일에 사형(死刑)당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장태수
한자명
張泰秀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41 ~ 1910
본적
전라북도 김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10년 합방(合邦) 후 헌병이 은사금(恩賜金)을 주는 것을 거절하여 체포하려 하자 그 후 절식(絶食)하여 동년 11월 3일에 선조묘에 고하고 동월 27일에 순사(殉死)함.

인물정보

성명
정시해
한자명
鄭時海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2 ~ 1906
본적
전라북도 고창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분개. 영남일대의 지사들을 심방(尋訪) 구국책을 모의 동지 규합에 동분서주하며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자칭하였고 익년 사사(思師) 최익현(崔益鉉) 의장의 거의보를 받고 면암(勉庵) 친서를 영남지사들에게 전달하여 영남의 호응을 종용(慫慂)하였으며 당초에는 소모장(召募將)으로 병력증강에 심혈을 경주하다가 동년 윤 4월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 중 동년(同年) 20일 순창 전투에서 흉탄에 전사함.

인물정보

성명
황현
한자명
黃玹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55 ~ 1910
본적
전라남도 구례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83년에 문명(文名)이 국내(國內)에 떨치더니 친일 고관(親日高官)들의 접근(接近)을 거절하고 시사(時事)가 점점(漸漸) 망(亡)하여감을 비감(悲感)하여 고종(高宗) 갑자 이후(甲子以後)의 정치와 시국의 진상을 직필(直筆)로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김 2. 1910년 합병후(合倂後) 유서를 남기고 동년(同年) 9월 10일 음독 순사(飮毒殉死)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