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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구 묘
이원영(1886-1958)은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 봉성측량학원을 거쳐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감 후 안동성경학원에 입학, 교역자의 길을 택하였다. 졸업 후 안동지방의 농촌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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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고택
목재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목재(穆齎) 이만유(李晩由: 1822~1904)가 살던 집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후손으로 형조참판(刑曹參判) 사은(仕隱) 이구운(李龜雲)(1681~1761)의 증손자(曾孫子)인 이만유(李晩由)는 철종(哲宗) 9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로 벼슬을 시작하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歷任)하여 종이품(從二品)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외직(外職)으로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시 선정(善政)으로 택호(宅號)를 영해댁(寧海宅) 또는 영감댁(令監宅)이라 했다. 건물 구조는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어울려 'ㅁ'자형을 구성하고 있다. 전면에 중문을 내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가 만나는 좌우 측면에 문칸을 설치하였는데 우측 문이 주된 문이다. 사랑채 마당과 안마당이 독립적이고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슬대문을 겸한 행랑채가 있었으나 수몰(水沒)로 인해 유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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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유허지비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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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은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았다.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이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 그의 출생지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설립, 개관하였다. 2017년 1월에 전시관, 생활관, 복원한 이육사 생가로 증축하여 재개관 하였다.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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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묘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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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봉 구 묘
이동봉(1894 - 1920)의 자는 가견이며,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서 전개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같은 마을의 김동택(金東澤), 신응한(申應漢), 이용호(李用鎬) 등과 함께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3 · 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예안면의 3 · 1운동을 준비하였다. 예안면의 3 · 1운동은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 처음 계획하였다. 신상면은 3월 11일 밤 9시에 이시교(李時敎), 이중원(李中元), 이남호(李南鎬), 백남학(白南鶴), 이광호(李洸鎬) 등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보여주면서 만세운동을 제의하였다. 이들은 거사 일자를 3월 17일 예안면 장날로 결정하고,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또한, 인근의 각 마을에도 만세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1,500명 이상의 군중이 장터에 모였다. 30여 명의 주동자들은 먼저 면사무소 뒤편의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다이쇼[大正]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부숴뜨린 뒤,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에 모인 군중들의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었고, 이동봉(李東鳳)이 시위대를 이끌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가 고조되자 출동한 일제 경찰은 현장에서 주동자 15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오후 7시경 주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유리창을 부수고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와 함께 25명의 시위대가 추가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그는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세계 각국이 시행하는 민족자결주의주1 원칙에 따라 평화와 인도정의(人道正義)를 주창했으므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11월 6일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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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는 하계마을 출신인 이만도, 이중언 등 25명의 독립운동가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지역 보훈문화창달에 기여하기 위해 2004년 11월 7일 건립된 비이다. 하계마을은 퇴계 이황 선생의 고택과 묘소가 있는 곳으로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정착해온 마을이다. 조선조에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25명의 애국지사를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다. 이만도 선생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지도자로서 백동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육성하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늑약을 당하자 24일간 단식 후 자결하였다. 그의 며느리인 김락 여사도 파리장서를 주관한 남편 이중업과 광복회사건의 아들 이동흠을 뒷바라지했고 자신은 3․1 예안만세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실명했다. 이만도 선생과 을미의병을 함께 일으켰으며 단식에 동참하여 순절한 동은 이중언 선생, 3․1 예안만세 운동의 이비호 선생, 만주항쟁의 이원일 선생, 한말에 의병활동을 한 이만원 선생,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이종흠(李棕欽) 선생이 모두 하계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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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 집
이중언(1850 - 1910)의 자는 동관, 호는 동은, 아명은 문석이며, 개항기 상의원직장,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 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무렵 일본경찰 몇 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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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 순국지
이중언(1850 - 1910)의 자는 동관, 호는 동은, 아명은 문석이며, 개항기 상의원직장,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 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무렵 일본경찰 몇 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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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흠 묘
이종흠(1900 - 1976)의 호는 반산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종흠은 1919년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초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을 모금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당시 안동 지역의 연락책이던 정수기가 만남을 주선하여 대구에서 김창숙을 만나 권총 한 자루를 받아 돌아왔다. 1926년 1월 15일 영양군 석보면에 살고 있던 외숙부 이현병(李鉉炳)을 찾아가 군자금 2만 원을 요구하였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이종흠은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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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경찰서 법원터 표지석
안동경찰서 법원터는 일제강점기 안동경찰서, 대구법원 안동지원 등 일제의 통치기관이 있었던 곳이다. 3월 13일 이상동(李相東) 한 사람의 시위로 시작된 안동의 3.1운동은 3월 27일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일어났다.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3월 23일의 만세시위에는 3,000명 넘게 참여하였다. 이들은 붙잡힌 사람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며, 이곳에서 이튿날 새벽 4시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30명 넘게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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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이준형, 이병화 집(임청각)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상룡(1858 - 1932)의 자는 만초, 호는 석주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상룡은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5년 겨울 영해 출신인 매제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1만 5000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 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09년 4월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 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 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군정기관으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에 계속 항쟁하면서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남북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을 조정·통합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였다. 1926년 2월 다시 만주로 돌아온 뒤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광복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준형(1875 - 1942)의 이명은 이재섭(李在燮)·이중조(李中組)·이동고(李東皐), 자는 문극(文極), 호는 동구(東邱)이며, 이상룡의 아들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준형은 일찍이 안동 지역의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09년 봄 이상룡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실무를 담당하였다. 1911년 1월경 아버지를 비롯한 안동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그해 4월에 경학사 조직에 참여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1919년에는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와 1925년 서로군정서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여 이광민·김응섭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과 남만청년총동맹 등을 조직하였고, 1928년 중국공산당 반석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아버지 이상룡이 순국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42년 9월 2일 국운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병화(1906 - 1952)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소파(小坡), 이명은 이대용(李大用)·이계오(李桂五)·이탁(李拓)·이경천(李慶天)·이병화(李秉華)이며, 이상룡의 손자이자, 이준형의 아들이다. 이병화는 1911년 아버지 이준형(李濬衡)과 함께 할아버지 이상룡을 따라 안동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에 재학 중 이광국(李光國), 김산(金山) 등과 더불어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상룡과 김동삼 등이 조직한 무장 투쟁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1924년 평안북도 청성진의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1927년에 접어들어 길림성(吉林城) 반석현(磐石縣)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및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도간부와 선전부 상무를 역임하였다. 1928년 5월 조직된 재중한인청년동맹(在中韓人靑年同盟)에 가입하였으며, 요동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다. 1934년 5월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혐의로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되어, 그해 6월 2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