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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이준형, 이병화 집(임청각)

유형
집·사당 | 안내판·표지석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20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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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상룡(1858 - 1932)의 자는 만초, 호는 석주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상룡은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5년 겨울 영해 출신인 매제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1만 5000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 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09년 4월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 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 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군정기관으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에 계속 항쟁하면서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남북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을 조정·통합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였다. 1926년 2월 다시 만주로 돌아온 뒤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광복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준형(1875 - 1942)의 이명은 이재섭(李在燮)·이중조(李中組)·이동고(李東皐), 자는 문극(文極), 호는 동구(東邱)이며, 이상룡의 아들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준형은 일찍이 안동 지역의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09년 봄 이상룡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실무를 담당하였다. 1911년 1월경 아버지를 비롯한 안동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그해 4월에 경학사 조직에 참여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1919년에는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와 1925년 서로군정서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여 이광민·김응섭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과 남만청년총동맹 등을 조직하였고, 1928년 중국공산당 반석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아버지 이상룡이 순국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42년 9월 2일 국운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병화(1906 - 1952)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소파(小坡), 이명은 이대용(李大用)·이계오(李桂五)·이탁(李拓)·이경천(李慶天)·이병화(李秉華)이며, 이상룡의 손자이자, 이준형의 아들이다. 이병화는 1911년 아버지 이준형(李濬衡)과 함께 할아버지 이상룡을 따라 안동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에 재학 중 이광국(李光國), 김산(金山) 등과 더불어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상룡과 김동삼 등이 조직한 무장 투쟁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1924년 평안북도 청성진의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1927년에 접어들어 길림성(吉林城) 반석현(磐石縣)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및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도간부와 선전부 상무를 역임하였다. 1928년 5월 조직된 재중한인청년동맹(在中韓人靑年同盟)에 가입하였으며, 요동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다. 1934년 5월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혐의로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되어, 그해 6월 2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탐방로그

안동시 법흥동 20에 있는 이상룡, 이준형, 이병화 집(임청각)을 찾았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임청각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물정보

성명
이병화
한자명
李炳華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906 ~ 1952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6년 조부(祖父) 이상룡(李相龍) 친부(親父) 이준형(李濬衡)을 따르기 위하여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고 1921년 통의부(統義府)가 조직(組織)되자 이에 가입(加入)하고 1921년에는 의주부(義州部) 청성진(淸城鎭) 경찰 주재소(警察駐在所)를 습격(襲擊)하고 순사(巡査)를 살해(殺害)한후(後) 귀대(歸隊)하였다가 1934. 5월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7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상룡
한자명
李相龍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58 ~ 1932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국치 후(國恥後) 만주(滿洲)에 이주(移住)하여 조국 광복 사업(祖國光復事業)에 노력(努力)하였고 남만 교포(南滿僑胞)의 자치기관(自治機關)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組織)하여 단장(團長)이 되었으며 2. 3.1운동 당시(運動當時) 한족회(韓族會)를 조직(組織)하였고 남만(南滿)의 군사기관(軍事機關)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였다. 3. 1925년에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나 남만(南滿)에서 노환(老患)으로 서거(逝去)하였음.

인물정보

성명
이준형
한자명
李濬衡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75 ~ 1942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2. 2월 친부(親父)인 이상룡(李相龍)이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安東支會)와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 운영(設立運營)할 때 실무(實務)를 맡아 구국적(救國的) 사상(思想)의 고취(鼓吹)와 인재양성(人材養成)을 위하여 활동(活動)하다가 1911. 1월 친부(親父)와 함게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경학사(耕學社) 설립(設立)을 보좌(補佐)하고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督辦)이 된 친부(親父) 이상룡(李相龍)을 도와주다가 1925. 1월 정의부(正義府) 발족(發足)에 참여(參與)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