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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유형
비석 | 안내판·표지석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3-2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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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는 하계마을 출신인 이만도, 이중언 등 25명의 독립운동가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지역 보훈문화창달에 기여하기 위해 2004년 11월 7일 건립된 비이다. 하계마을은 퇴계 이황 선생의 고택과 묘소가 있는 곳으로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정착해온 마을이다. 조선조에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25명의 애국지사를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다. 이만도 선생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지도자로서 백동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육성하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늑약을 당하자 24일간 단식 후 자결하였다. 그의 며느리인 김락 여사도 파리장서를 주관한 남편 이중업과 광복회사건의 아들 이동흠을 뒷바라지했고 자신은 3․1 예안만세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실명했다. 이만도 선생과 을미의병을 함께 일으켰으며 단식에 동참하여 순절한 동은 이중언 선생, 3․1 예안만세 운동의 이비호 선생, 만주항쟁의 이원일 선생, 한말에 의병활동을 한 이만원 선생,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이종흠(李棕欽) 선생이 모두 하계마을 출신이다.

탐방로그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3-2에 위치한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를 찾았다.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옆에는 기적비에 대한 설명이 기재된 안내판도 함께 찾을 수 있었다.

인물정보

성명
권헌이
한자명
權憲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80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9. 3.17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독립만세(獨立萬歲)에 참가(參加)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르르 부르며 시위(示威)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대락
한자명
金大洛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1 ~ 1905
본적
경상북도 청송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7

공적개요

1896.1월 경북(慶北) 청송(靑松)에서 거의(擧義)한 심성지 의진(沈誠之義陣)에 참여하여 참모(參謀) 및 중군장(中軍將)으로 동년 4월 김하락 의진(金河洛義陣), 김상종 의진(金象鍾義陣)과 연계하여 감은산록(甘隱山麓)에서 적군과 교전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창숙
한자명
金昌淑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9 ~ 1962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을사(乙巳))에 청토오흉칠적소(請討五兇七賊疏)를 올렸다가 일경에게 잡혀 악형을 받음. 2.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慶尙道) 유림(儒林) 백여의 연서(連署)를 받아 파리평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만들어가지고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김규식(金奎植)에 위탁하여 파리로 송치하고 또 한통을 우편으로 우송함. 3.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을 조직하여 초대 대의원이 됨. 4. 만주(滿洲) 황무지를 개척하여 둔전식 양병(屯田式養兵)을 계획하고 광동(廣東)에 가서 손문(孫文)과 대면한 후 군사자금 20만원을 받았음. 5. 1921년에 북경(北京)에서 “천고”라는 독립선언 유지(獨立宣言維誌)를 발간함. 6. 1923년에 정수기(鄭守基)를 고국에 보내서 군자금을 모집케 하고 7.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세워 선전위원장(宣傳委員長)이 되고 8. 1924년에 주만독립군 군사고문(駐滿獨立軍軍事顧問)이 되었으며 9. 1925년 8월에 군자금모집 사명으로 귀국하여 익년 3월에 상해(上海)로 돌아감. 10. 1926년 6월 김원봉(金元鳳)의 추천하는 나석주(羅錫疇)를 국내에 기송하여 동척(東拓)과 식은(殖銀) 폭파사건을 일으키다. 11. 국내유림단 제1차, 제2차 사건이 모두 김창숙(金昌淑)의 의거에 발단된 것이다. 12. 1927년 4월에 김창간(金昌侃)의 밀고로 상해 공동조계(上海共同租界)에서 체포되어 일본 장기(長崎) 경유 대구(大邱)로 압송되어 징역 14년 언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창숙
한자명
金昌淑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9 ~ 1962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을사(乙巳))에 청토오흉칠적소(請討五兇七賊疏)를 올렸다가 일경에게 잡혀 악형을 받음. 2.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慶尙道) 유림(儒林) 백여의 연서(連署)를 받아 파리평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만들어가지고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김규식(金奎植)에 위탁하여 파리로 송치하고 또 한통을 우편으로 우송함. 3.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을 조직하여 초대 대의원이 됨. 4. 만주(滿洲) 황무지를 개척하여 둔전식 양병(屯田式養兵)을 계획하고 광동(廣東)에 가서 손문(孫文)과 대면한 후 군사자금 20만원을 받았음. 5. 1921년에 북경(北京)에서 “천고”라는 독립선언 유지(獨立宣言維誌)를 발간함. 6. 1923년에 정수기(鄭守基)를 고국에 보내서 군자금을 모집케 하고 7.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세워 선전위원장(宣傳委員長)이 되고 8. 1924년에 주만독립군 군사고문(駐滿獨立軍軍事顧問)이 되었으며 9. 1925년 8월에 군자금모집 사명으로 귀국하여 익년 3월에 상해(上海)로 돌아감. 10. 1926년 6월 김원봉(金元鳳)의 추천하는 나석주(羅錫疇)를 국내에 기송하여 동척(東拓)과 식은(殖銀) 폭파사건을 일으키다. 11. 국내유림단 제1차, 제2차 사건이 모두 김창숙(金昌淑)의 의거에 발단된 것이다. 12. 1927년 4월에 김창간(金昌侃)의 밀고로 상해 공동조계(上海共同租界)에서 체포되어 일본 장기(長崎) 경유 대구(大邱)로 압송되어 징역 14년 언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극호
한자명
李極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38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7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예안시장(禮安市場)에서 참집(參集)한 군중(群衆)과 같이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한 후(後) 동년(同年) 3.18 학생 신분(學生身分)으로 동 도산보통학교(陶山普通學校) 재학생(在學生)을 규합(糾合)하여 이에 호응(呼應)한 주민(住民)들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다 출동(出動)한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捕)되어 징역2년형(年刑)을 언도(言渡)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기호
한자명
李基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1 ~ 미상
본적
황해도 봉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9년 3월 황해도(黃海道) 봉산군(鳳山郡) 사원면(沙院面)에서 이균형(李均亨)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동월(同月) 3일 동지(同地) 시장에서 다수의 시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동봉
한자명
李東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20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3. 17 경북 안동군 예안(禮安)장날에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서 소위 일인(日人)의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1,5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2년을 받고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병보석되었다가 순국(옥중사 간주)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만규
한자명
李晩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45 ~ 192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이만도(李晩燾)의 아우로서 1919.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등이 유림대표(儒林代表)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儒林)의 한 사람으로 서명(署名)한 특수공적(特殊功績)이 인정(認定)됨.

인물정보

성명
이만도
한자명
李晩燾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42 ~ 1910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고종시(高宗時)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歷任) 병자수호조약 이래(丙子修護條約以來)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불렀으나 부응(不應) 향리(鄕里)에서 후진 교육(後進敎育)에 전력(全力) 2. 을사조약시(乙巳條約時) 오적(五賊)을 처벌(處罰)코 조약(條約)을 해소(解消)하자는 소상(疏狀)을 올림 3. 1910년 합방 소식(合邦消息)을 듣고 8월 14일부터 단식 후(斷食后) 24일만에 아사(餓死)

인물정보

성명
이목호
한자명
李穆鎬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79 ~ 1919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6년 안동군(安東郡) 주사(主事)로 임명(任命)되어 군수 직무대행시(郡守職務代行時)에는 의병활동(義兵活動)을 지원(支援)하다 구류(拘留)되어 석방(釋放)된 후(后) 뜻한바 있어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卒業). 김동삼(金東三), 이상룡(李相龍)과 활동(活動)하다 중국(中國) 북경(北京)에 가서 영검지(英劒之)에게 일본 침략(日本侵略)을 물리칠 것을 요청(要請)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항상(恒常) 번민(煩㦖)하다 이국(異國)에서 순사(殉死)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비호
한자명
李丕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6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7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독립만세시위에서 2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안동군청(安東郡廳), 안동경찰서(安東警察署)를 습격하는 등 시위를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상룡
한자명
李相龍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58 ~ 1932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국치 후(國恥後) 만주(滿洲)에 이주(移住)하여 조국 광복 사업(祖國光復事業)에 노력(努力)하였고 남만 교포(南滿僑胞)의 자치기관(自治機關)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組織)하여 단장(團長)이 되었으며 2. 3.1운동 당시(運動當時) 한족회(韓族會)를 조직(組織)하였고 남만(南滿)의 군사기관(軍事機關)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였다. 3. 1925년에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나 남만(南滿)에서 노환(老患)으로 서거(逝去)하였음.

인물정보

성명
이상호
한자명
李相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미상 ~ 1935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33년경 함남(咸南) 단천(端川)에서 최민환(崔珉煥)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 단천농민조합 재건협의회(端川農民組合再建協議會) 에서 활동하다 1935년 3월경 체포(逮捕)되어 일경(日警)의 심문을 받다 동년(同年) 12월 24일 옥사 순국(獄死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선구
한자명
李善求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6 ~ 1922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896년 2월 전기 의병(前期義兵)과정 중 경북(慶北) 선성[예안]의진(宣城[禮安]義陣)의 서기(書記)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열호
한자명
李烈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3 ~ 1977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2년 충남(忠南) 연산(連山) 송종빈 가(宋鍾斌家)에서 군자금 모집운동을 숙의(熟議) 후(後) 경북일대에서 계획된 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1922.6.21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5년형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영호
한자명
李永浩
운동계열
노령방면
생몰년도
1896 ~ 1938
본적
함경남도 단천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0

공적개요

1912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으로 건너가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 서기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0년 3월 동지(同地)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중앙총회에서 재정부장(財政部長)으로 호선되었고, 1922년 10월 19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통합 중앙위원회에서 비서국 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으며, 1923년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文昌範)이 조선내 관공서 폭파 등을 위해 편성한 결사대(決死隊)의 제2결사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용호
한자명
李龍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20
본적
충청북도 음성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년 4월 1일 충북(忠北) 음성군(陰城郡) 소이면(蘇伊面) 한천(漢川)장터에 집결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적경(敵警)들이 주동자를 연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다가 피체되어「태(笞)90」을 받아 태형(笞刑)의 여독으로 순국(殉國)(옥중사(獄中死)로 간주)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운호
한자명
李運鎬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2 ~ 1930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3

공적개요

1896년 1월 경북(慶北) 안동(安東)에서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義兵將)으로 한 안동의진(安東義陣)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좌익장(左翊將)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원록
한자명
李源祿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904 ~ 1944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6년 북경조선군관학교(北京朝鮮軍官學校) 입교(入校)(제1기생) 1927년 조선은행(朝鮮銀行) 대구지점(大邱支店) 폭탄사건 피의자로 체포되어 2년7개월 옥고 1930 대구(大邱) 격문(檄文) 사건(事件)의 주모자로 피검되어 6개월여 옥고 1930년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사회학과(社會學科)를 나와 귀국 중외일보(中外日報) 조광사(朝光社)에 있으면서 시문(詩文)으로 민족혼 고취 1944.1.16 북경옥중(北京獄中)에서 옥사(獄死)(대소 사건(大小事件) 17회나 검거)

인물정보

성명
이원일
한자명
李源一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86 ~ 196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1년 만주(滿洲)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亡命)하여 경학사(耕學社)와 흥업단(興業團)에서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다가 1931년경(年頃) 합이빈(哈爾濱)에서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2년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윤석
한자명
李胤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53
본적
강원도 춘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3. 15~16 가평(加平) 3.1 운동 사건(運動事件) 주모자(主謀者)로 1919. 7. 14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2년과 십자가당(十字架黨) 비밀결사(秘密結社) 항일사건(抗日事件)등 징역 1년을 언도(言渡)받고 지역(地域)에서 거사 주동(擧事主動)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종영
한자명
李鍾韺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6 ~ 1926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과 함께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에 참여하여 먼저 자신부터 200원의 출금(出金)을 약속한 후, 자신의 집에서 채기중(蔡基中)과 함께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에 불응하면서 일경(日警)에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활동(活動)을 밀고하려는 장승원(張承遠) 등의 처단을 협의하고 피체(被逮)될 때까지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근거지(根據地)로 제공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종흠
한자명
李棕欽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0 ~ 1976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5년 경북(慶北) 제2 유림단(儒林團)의 군자금 모집 운동(軍資金募集運動)에 있어서 김창숙(金昌淑)의 지시(指示)에 따라 권총(拳銃)을 가지고 독립운동 자금(獨立運動資金) 모집(募集)에 종사(從事)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징역 1년, 4년간 집행유예(年間執行猶豫)를 받았으며 3대(代)에 걸친 독립운동 가문(獨立運動家門)으로서 특수공적 활동이 사실로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준형
한자명
李濬衡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75 ~ 1942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2. 2월 친부(親父)인 이상룡(李相龍)이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安東支會)와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 운영(設立運營)할 때 실무(實務)를 맡아 구국적(救國的) 사상(思想)의 고취(鼓吹)와 인재양성(人材養成)을 위하여 활동(活動)하다가 1911. 1월 친부(親父)와 함게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경학사(耕學社) 설립(設立)을 보좌(補佐)하고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督辦)이 된 친부(親父) 이상룡(李相龍)을 도와주다가 1925. 1월 정의부(正義府) 발족(發足)에 참여(參與)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중언
한자명
李中彦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50 ~ 1910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 광무(光武)9년 을사(乙巳) 동(冬)에 5조약을 체결함에 찬동한 오적(五賊)을 참(斬)하기를 상소하고 1910년 9월에 결국 절식(絶食) 순사(殉死)함.

인물정보

성명
이중업
한자명
李中業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63 ~ 192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월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 운동(署名運動)을 전개하였으며 1921. 7월 중국(中國) 손문(孫文) 등에게 보내는 청원서(請願書)를 유림대표자격(儒林代表資格)으로 휴대하고 중국(中國)으로 가기 직전 병사(病死)하여 2년 4월 동안의 활동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중업
한자명
李中業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63 ~ 192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월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 운동(署名運動)을 전개하였으며 1921. 7월 중국(中國) 손문(孫文) 등에게 보내는 청원서(請願書)를 유림대표자격(儒林代表資格)으로 휴대하고 중국(中國)으로 가기 직전 병사(病死)하여 2년 4월 동안의 활동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출이
한자명
李出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미상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1

공적개요

1919년 3월 18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동교 생도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탁
한자명
李鐸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89 ~ 1930
본적
평안남도 성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910년 중국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등이 주도하는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하였고, 1917년 5월 이진룡(李鎭龍)아 일경에 체포되자 그 부하들을 재규합하여 독립군부대를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도모하였으며, 1919년에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칠적(七賊)을 주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의혈투쟁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11월에 중국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1920년에 김승학(金承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파견되었고,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참모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 계획을 지도하였으며, 동년 6월 임시정부 동삼성 외교위원부(東三省外交委員部) 위원장에 임명되어 동년 7월에 오동진(吳東振)과 협의하고 3개대의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서울, 평양, 선천 등지에서 무장항일 활동하였으며, 1921년에는 신익희(申翼熙),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오산(吳山)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문서과 부주임에 선임되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상부상조와 항일투쟁의 공동 보조를 모색하였으며, 동년 8월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를 조직하고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후원활동을 전개하고, 1922년 5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준비위원회의 평남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6년 중국 만주에서 대한독립맹진결사대(大韓獨立猛進決死隊)를 조직하여 남북만의 각 독립단 수뇌들과 삼부통일안(三府統一安)을 협의하고 무력항쟁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으며, 1929년 12월 임시의정원 만주, 간도지방 대표 의원에 선출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현구
한자명
李賢求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62 ~ 1940
본적
경상북도 영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896년 경(頃) 이중인(李中麟) 등과 함께 경북(慶北) 영주(榮州)에서 거의(擧義)하였으며 1940년 일제(日帝)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자 이에 항거, 단식 순절(斷食殉節)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호준
한자명
李鎬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56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9. 3. 17 경북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예안(禮安)장터에서 수십명의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