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정덕수 집 표지석
정덕수(1923-2012)는 1941년 2월에 조성인(趙成寅), 강연중(姜鍊中) 등과 함께 항일결사조직인 개진대(改進隊)를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제에 미국 영국 소련이 참전하게 되면 서 일제의 패망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강연중과 함께 활동조직으로서 항일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하부조직으로서 대판내 우유배달클럽 및 신문배달클럽과 유도(酉島) 제2공업학교·관서공업학교·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클럽을 결성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정덕수(1923-2012)는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년 2월에 조성인(趙成寅)·강연중(姜鍊中) 등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들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으며, 조성인과 항일결사 개진대(改進隊)를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제에 미국 영국 소련이 참전하게 되면 서 일제의 패망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강연중과 함께 활동조직으로서 항일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하부조직으로서 대판내 우유배달클럽 및 신문배달클럽과 유도(酉島) 제2공업학교·관서공업학교·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클럽을 결성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배치문 기적비(연지공원)
배치문(1890-1942)의 이명은 배홍길(裵洪吉)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목포 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중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치문 기적비(화정공원)
배치문(1890-1942)의 이명은 배홍길(裵洪吉)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목포 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중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상익 묘
노상익(1849 - 1941)은 김해 생림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대눌은 1882년(고종 19년) 34세에 문과별시을과에서 제일인자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를 제수하며 벼슬길에 나갔다. 1905년 홍문관시강을 제수했으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물러났다. 홍문관의 경연이 유야무야 되는 것을 본 대눌은 나라의 봉록을 돌려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홍문관의 경연을 폐지하지 말 것”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졌다. 일본은 그해 11월에 일본천황의 ‘은사금’을 조선의 주요인물들에게 내렸다. 밀양헌병대 소장 여송치가 대눌을 찾아와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므로 천황께서 은총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매국노들이 받아먹는 것이지 망국의 대부가 어찌 이에 관여할 것인가. 만약에 다시 강요한다면 죽을 뿐이다.”라며 거절하였다. 대눌은 이듬해 63세로 일본의 감시와 핍박을 피해 조국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렇게 압록강을 건너 망명한 대눌은 만주 서간도 지역의 안동현 근처 접리수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그 후 안효제·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안둥현 접리수(接梨樹) 서구(西溝)에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생활 향상에 노력하였다. 특히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활동에 힘써 한국 영토와 문화 관련 다수의 저작을 집필하였다. 노상익이 집필한 저술로는 『통사절요(通史節要)』·『동역고(東域考)』·『동제고략(東制考略)』 등이 있다. 1913년 11월 한인공교회 창립 등에 참여하면서 주요 한인들과 교류하고 이를 통해 독립의지 고양과 민족문화 확립에 노력하기도 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치문 항일독립운동 표지석
배치문(1890-1942)의 이명은 배홍길(裵洪吉)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목포 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중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봉근, 한봉인 집
한봉근(1894-1927)은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길림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1919년 11월에 조국의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그는 1920년 매국노들과 일제의 중요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의열단원인 김원봉, 신철휴 등과 상의하여 폭탄, 권총, 탄약 등을 입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동지인 이종암 등이 상해에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곽재기, 이성우 등은 각종 무기와 폭약을 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입수된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여 장차의 거사에 대비하도록 했다.1923년 12월, 국내의 적 관청과 친일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유석현, 남영보, 이현준 등과 함께 필요한 폭탄과 무기를 서울로 반입하려 했으나 일경에게 발각되어 거사를 실행치 못하였다. 또한 1926년에는 김창숙 등 국내의 유림(儒林)이 모금한 3,000원으로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에는 김구도 관련되었고, 그 실행은 그를 비롯해 유우근, 이승춘 그리고 나석주 등과 함께 추진되었는데 최종적으로 나석주가 단독으로 입국하여 투척하게 되었다. 한봉근은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2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인(1898-1968)은 경남 밀양 사람으로, 한봉근의 남동생이다. 그 또한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함으로써 무력투쟁을 통한 조국 독립을 결의하였다.1920년 12월, 국내에 입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면서 동지인 김원석(김상윤) 등과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관여하였다. 1925년에는 의열단의 군자금 모집의 밀양 지역 담당으로 활약하면서, 동지 이종암과 함께 모종의 거사를 위해 반입하려던 무기와 폭탄과 관련하여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6년 12월, 징역 8개월 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세주 집
윤세주(1901-1942)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新興)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 황상규, 곽재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제1차 목표로 일제 핵심 인물 암살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 경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윤세주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中外)일보 기자와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낙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 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태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麻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중국 태항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1950년에 중국 한단시 진기로예 국가열사능원으로 묘가 이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상규 집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으로서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차정 묘
박차정(1910-1944)는 부산광역시의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 상무위원, 선전 및 출판 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 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 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붙잡힌 박차정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 연합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남경(난징)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를 담당하고, 1936년 7월에는 이청천의 처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박차정은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 궐기를 촉구하였다.그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관 기적비 안내판
이상관(1891-1936)은 경상남도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재정 부장(財務 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937년 1월, 일본군 동변도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에 의해 체포되어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황상규 추모비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상규 묘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