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규 집
사적지 개요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으로서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인물정보
- 성명
- 김동삼
- 한자명
- 金東三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78 ~ 1937
- 본적
- 경상북도 안동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남만(南滿)의 한교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고 3.1 운동시 남만(南滿)을 통한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였으며 상해민족대표대회(上海民族代表大會)에 한족회(韓族會) 대표로 출석하고 흥경현(興京縣)에 남만(南滿)의 자치군사기관으로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여 총장이 되어 만주독립군(滿州獨立軍)의 주도역할이 되었으며 중한 합작(中韓合作)으로 국제운동을 추진하고 양측대표회의(兩側代表會議) 의장(議長)이 되었다. 만주사변 중(滿洲事變中) 합이빈(哈爾賓)에서 피체(被逮)되어 경성옥(京城獄)에서 10년형 복역(服役) 중(中) 서거(逝去)함.
김동삼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김좌진
- 한자명
- 金佐鎭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89 ~ 1930
- 본적
- 충청남도 홍성
- 포상훈격
- 대한민국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1905년 16세 때에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육영 사업(育英事業)에 종사함 2. 동년 10월 입경하여 윤치성(尹致晟), 노백린(盧伯麟) 등과 조직적 독립운동의 전개를 기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족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함 3. 1907년 이창봉(李昌奉) 설립의 고아원 총무 및 한성신보 이사(漢城新報理事)를 역임하여 국혼 고취(國魂鼓吹)에 진력함 4. 1908년 박상진(朴尙鎭)과 광복단(光復團)사건으로 3년을 복역 후 간도(間島)로 건너감 5. 3.1운동(運動) 당시(當時) 동만주(東滿洲)의 왕청현(旺청縣)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고 총사령(總司令)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를설치(設置)하여 독립군 간부양성(獨立軍幹部養成)에 진력(盡力)함 6.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同志 羅中昭), 이범석(李範錫)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靑山里作戰)에 참가(參加) 10배의 왜적(倭敵)을 대파(大破)하여 사상(死傷) 3천3백여명의 전과(戰果)를 거둠 7. 1922년 6월 중동선소분하지구(中東線小芬河地區)에서 사관양성(士官養成)에 주력(注力)함 8. 1926년 김혁(金赫)등과 더부러 신민부(新民部)를 조직(組織)하여 활동(活動)함 9.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中國救國軍司令官楊宇一)과 회담(會談)하고 공동전선(共同戰線)을 취(取)하였으며 10. 동년8월 국민당동삼성(國民黨東三省) 공작 책임자(工作責任者) 공패성장령(貢沛城將領) 악유사(岳維唆)과 회담(會談)하고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組織)하였으나 장작림(張作霖)의 탄압(彈壓)으로 실패(失敗)함 11. 1929년 정신(鄭信), 민무등(閔武等)과 중동선 일대(中東線一帶)에서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조직(組織)하고 주석(主席)으로 활동중(活動中) 동년음(陰)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高麗共産靑年會員) 주중한인청년동맹원(駐中韓人靑年同盟員) 박(朴)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拳銃狙擊) 피살(被殺)됨(향년 41재(才))
김좌진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여준
- 한자명
- 呂準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60 ~ 1932
- 본적
- 경기도 용인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8
공적개요
1. 1911. 도만(渡滿)하여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하고 13년에는 신흥무관학교장(新興武官學校長) 겸(兼) 교육회장.(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292) 2. 1918. 기미독립선언의 전주로 만주에서 독립선언서를 서명발포한 39인 중의 1인임.(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310) 3. 1919. 중국정부를 거쳐 남만 교포(南滿僑胞)의 독립청원서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함.(독립운동 관계 서류(獨立運動關係書類) 212) 4. 1919. 서로군정서 부독판(西路軍政署副督辦) 한족회간부(韓族會幹部).(항일순국의열사전 292) 5. 1920. 관서총판부(關西總辦府) 총판(總辦).(민족운동년감 96) 6. 1921. 재만(在滿) 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장(敎科書編纂委員會委員長). 7. 1921.5.26 임정군무차장 윤기변(尹琦變)에게 결의서(내용미상) 제출.(조선민족독립연감(朝鮮民族獨立年鑑) 139) 8. 1922. 만주(滿洲) 길림(吉林) 액목현(額穆縣) 민하(玟河)에 있는 검성중학교 교장(儉成中學校校長). 9. 1925. 서로군정서 독판(西路軍政署督辦). 10. 1932. 장백산(長白山)에 은거하다가 별세(別世).(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P443)
여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유동열
- 한자명
- 柳東說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79 ~ 1950
- 본적
- 평안북도 박천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포상년도
- 1989
공적개요
1906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加入)한 이래(以來)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부 요직(軍部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만주(滿洲)에 파견(派遣)되어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지휘(指揮)하다가 1931년 일제(日帝)가 만주(滿洲)를 석권(席捲)하자 다시 임시정부(臨時政府)에 합류(合流)하여 의정원 의원(議政院議員) 국무위원(國務委員) 등으로 활약(活躍)하였고 3당통합운동(黨統合運動)을 벌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지원(支援)하는 등 현저(顯著)한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유동열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성우
- 한자명
- 李誠宇
- 운동계열
- 의열투쟁
- 생몰년도
- 1900 ~ 미상
- 본적
- 함경북도 경원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8
공적개요
1. 1920년 의열단원(義烈團員)으로 총독부(總督府) 및 중요 관공서(重要官公署) 폭파(爆破)를 기도(企圖)하여 폭탄(爆彈)을 국내(國內)에 반입(搬入)한 것이 발각(發覺)(세칭밀양폭탄사건(世稱密陽爆彈事件)) 되어 8년형(年刑)을 받고 복역(服役)(동아일보(東亞日報) 1921. 6. 22) 2. 복역(服役) 중 청진옥(淸津獄) 파옥 사건(破獄事件)으로 2년형(年刑)이 가형(加刑)되어 복역(服役)타가 1928. 3. 8 출옥됨. (동아일보(東亞日報) 1928. 3. 9)
이성우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황상규
- 한자명
- 黃尙奎
- 운동계열
- 중국방면
- 생몰년도
- 1891 ~ 1931
- 본적
- 경상남도 밀양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3
공적개요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를 조직활동 1919년 4월경 유동열 휘하(柳東說揮下)의 조선독립군정사 회계과장(朝鮮獨立軍政司會計課長)을 역임. 1920년 6월경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동지들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 상해 임정(上海臨政)에 참가하여 재정부원(財政部員)이 되어 군자금모집에 주력하여 동척 창녕지방 소작료(東拓昌寧地方小作料) 1년분을 매각하여 상해로 보내는 등 활발히 활동 의열단의 곽재기(郭在驥), 김재수(金在洙)등과 모의하고 조선총독부 폭파(朝鮮總督府爆破)를 계획타 발각되어 1921. 6. 29 피체(被逮)(동아일보(東亞日報) 1921. 3. 5, 1921. 6. 22,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214. 310)
황상규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