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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근, 한봉인 집

유형
멸실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557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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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한봉근(1894-1927)은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길림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1919년 11월에 조국의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그는 1920년 매국노들과 일제의 중요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의열단원인 김원봉, 신철휴 등과 상의하여 폭탄, 권총, 탄약 등을 입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동지인 이종암 등이 상해에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곽재기, 이성우 등은 각종 무기와 폭약을 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입수된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여 장차의 거사에 대비하도록 했다.1923년 12월, 국내의 적 관청과 친일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유석현, 남영보, 이현준 등과 함께 필요한 폭탄과 무기를 서울로 반입하려 했으나 일경에게 발각되어 거사를 실행치 못하였다. 또한 1926년에는 김창숙 등 국내의 유림(儒林)이 모금한 3,000원으로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에는 김구도 관련되었고, 그 실행은 그를 비롯해 유우근, 이승춘 그리고 나석주 등과 함께 추진되었는데 최종적으로 나석주가 단독으로 입국하여 투척하게 되었다. 한봉근은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2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인(1898-1968)은 경남 밀양 사람으로, 한봉근의 남동생이다. 그 또한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함으로써 무력투쟁을 통한 조국 독립을 결의하였다.1920년 12월, 국내에 입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면서 동지인 김원석(김상윤) 등과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관여하였다. 1925년에는 의열단의 군자금 모집의 밀양 지역 담당으로 활약하면서, 동지 이종암과 함께 모종의 거사를 위해 반입하려던 무기와 폭탄과 관련하여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6년 12월, 징역 8개월 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현재 한봉근, 한봉인의 집은 멸실되어 터만 남았고, 집터 주위에 관련 안내판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밀양시 가곡동에는 의열단과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한봉근, 한봉인 선생 형제 외에
한봉삼, 이병철 애국지사의 탄생지이지만 관련 안내판 존재하지 않았다.

인물정보

성명
곽재기
한자명
郭在驥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93 ~ 1952
본적
충청북도 청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919. 7 독립운동하려고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으로 건너감 2. 1919. 9 상해(上海)에서 폭탄을 구매하려다가 실패 3. 1920. 6 신흥학교(新興學校)에 모여 의열단(義烈團) 조직 4. 임정(臨政)과 연락하여 총독부(總督府) 요로(要路)와 친일분자(親日分子) 관공서(官公署) 동척회사(東拓會社)등을 폭발(爆發)하려고 폭탄 구입 은닉(爆彈購入隱匿) 5. 밀양 폭탄사건(密陽爆彈事件) 주범(主犯)으로서 1921년 폭발물 취체벌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일부 감형되어, 1927년 1월 22일 출옥.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91, 214, 439 기려수필(騎驪隨筆) p. 283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 71, 286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7.30, 1921.3.5, 1921.6.22, 1926.11.11, 1927.1.23

인물정보

성명
김구
한자명
金九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6 ~ 1949
본적
황해도 벽성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세(歲)에 동학당(東學黨)에 가입하여 해주 동학군(海州東學軍)의 선봉이 되었으니 당시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음 2. 해주(海州) 죽산장(竹山場)에서 총군(銃軍) 7백명(百名)을 거느리고 해주(海州)를 습격하려다 실패함. 3. 1896년 2월에 안악 치하포여점(安岳鴟河浦旅店)에서 왜 육군중위(倭陸軍中尉)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참살, 동년 5월에 피체되어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됨. 4. 1898년 3월 탈옥하여 삼남 각지(三南各地)를 방랑하여 공주 마곡사(公州麻谷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익년 귀향 하속 하였음. 5. 그 후 고향에서, 교육에 종사하다가 1909년 11월 이등저격사건(伊藤狙擊事件)의 혐의로 해주(海州)에 투옥됨. 6. 1910년 서울 양기탁가(梁起鐸家)에서 신민회 중요간부회의(新民會重要幹部會議)를 개최하여 남만(南滿)에 무관학교설립(武官學校設立)을 의결하고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으로 피검되어 17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7월에 출옥함. 7. 3.1 운동(運動) 후 상해(上海)로 탈출하여 임정경무국장(臨政警務局長)에 취임(就任)하고 1923년 임정내무총장(臨政內務總長) 1927년에 국무령(國務領)에 취임(就任)함. 8.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을 시켜 왜황(倭皇)을 저격(狙擊)케하고 동년 4월 윤봉길(尹奉吉)을 시켜 상해(上海)에서 왜장(倭將) 백천의칙(白川義則) 등에 폭탄을 투척토록 함. 9. 장개석(蔣介石)과 만나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한인무관양성(韓人武官養成)의 특설반(特設班)을 설치할 것을 약속하고 사관 백명을 양성함 10.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정 주석(臨政主席)에 취임후 서안(西安)에 광복군(光復軍)을 설치(設置)하고 훈육(訓育)시켰으며 입국 항전(入國抗戰)을 계획중 1945년 11월 15일에 귀국하였음 11. 1948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음 향년 73세(歲)

인물정보

성명
김상윤
한자명
金相潤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97 ~ 1927
본적
경상남도 밀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19. 11. 9 김원봉(金元鳳)등 13명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義烈團) 조직(組織)함. 2. 1920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密陽警察署爆破事件) 가담(加擔) 후(後) 상해(上海)로 망명(亡命), 임정(臨政) 가담(加擔) 활동(活動)함. 3. 1927. 10. 19 상해(上海)에서 활약(活躍) 중 사인불명(死因不明)으로 사망(死亡), 복건성(福建省)에 묘비(墓碑)있음.

인물정보

성명
김창숙
한자명
金昌淑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9 ~ 1962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을사(乙巳))에 청토오흉칠적소(請討五兇七賊疏)를 올렸다가 일경에게 잡혀 악형을 받음. 2.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慶尙道) 유림(儒林) 백여의 연서(連署)를 받아 파리평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만들어가지고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김규식(金奎植)에 위탁하여 파리로 송치하고 또 한통을 우편으로 우송함. 3.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을 조직하여 초대 대의원이 됨. 4. 만주(滿洲) 황무지를 개척하여 둔전식 양병(屯田式養兵)을 계획하고 광동(廣東)에 가서 손문(孫文)과 대면한 후 군사자금 20만원을 받았음. 5. 1921년에 북경(北京)에서 “천고”라는 독립선언 유지(獨立宣言維誌)를 발간함. 6. 1923년에 정수기(鄭守基)를 고국에 보내서 군자금을 모집케 하고 7.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세워 선전위원장(宣傳委員長)이 되고 8. 1924년에 주만독립군 군사고문(駐滿獨立軍軍事顧問)이 되었으며 9. 1925년 8월에 군자금모집 사명으로 귀국하여 익년 3월에 상해(上海)로 돌아감. 10. 1926년 6월 김원봉(金元鳳)의 추천하는 나석주(羅錫疇)를 국내에 기송하여 동척(東拓)과 식은(殖銀) 폭파사건을 일으키다. 11. 국내유림단 제1차, 제2차 사건이 모두 김창숙(金昌淑)의 의거에 발단된 것이다. 12. 1927년 4월에 김창간(金昌侃)의 밀고로 상해 공동조계(上海共同租界)에서 체포되어 일본 장기(長崎) 경유 대구(大邱)로 압송되어 징역 14년 언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나석주
한자명
羅錫疇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92 ~ 1926
본적
황해도 재령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재령(載寧) 명신학교(明信學校) 2년 수업(年修業) 후(後) 농사에 종사하다가 23세 때(歲時)에 간도(間島)로 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하고 27세에 귀국 황해도(黃海道) 겸이포(兼二浦)에서 상업을 경영하면서 적정(敵情)을 탐지함. 2. 29세 때(歲時)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 일어나매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자금을 조달하고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駐在所) 왜경(倭警) 및 상월면장(上月面長)을 총살하였으며 안악군(安岳郡) 모 부호(某富豪)를 사살한 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무국(警務局) 경호원(警護員)을 거쳐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대 장교로 복무함. 3. 1926년 4월 유림대표(儒林代表) 김창숙(金昌淑)의 말에 감동되어 은행 및 동척(東拓)의 파괴를 결심하고 4.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동척(東拓)에 가서 내외를 탐지한 후 식산은행(殖産銀行)으로 가서 대부계(貸付係) 철책에 투탄하고 다시 동척(東拓)으로 와서 수위실에 있던 조선부업협회 잡지기자(朝鮮副業協會雜誌記者)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였으며 또다시 이층으로 가서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 차석(技術課次席) 대삼태차랑(大森太次郞), 과장(課長) 능전풍(陵田豊) 및 사원(社員)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넘어뜨리고 5. 다시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가 수위 송본(松本)과 용산(龍山) 천진당 시계점원(堂時計店員) 금정열기(金井悅己)에 각각 1발을 쏘아 치명상을 입히고 황금정(黃金町)쪽으로 피해가다가 6. 경기도(京畿道) 경찰부(警察部) 전전유부(田畑唯夫)를 쏘아 즉사케 하니 마침내 그들은 기마대(騎馬隊)까지 동원하였다가 역전(力戰) 끝에 자결(自決)함 (향년 35세)

인물정보

성명
신철휴
한자명
申喆休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98 ~ 1980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시에서 의열단(義烈團) 결성에 참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6월에 곽재기 등 동지와 같이 체포되어 1921년 5월에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함.

인물정보

성명
유석현
한자명
劉錫鉉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900 ~ 미상
본적
충청북도 충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1920. 7 천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入團) 1923. 3 김시현(金始顯), 황옥(黃鈺), 김지섭(金祉燮) 등 동지(同志)를 포섭하여 전국적으로 대폭동(大暴動)과 요인 암살계획(要人暗殺計劃)이 사전(事前) 탄로로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성우
한자명
李誠宇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900 ~ 미상
본적
함경북도 경원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8

공적개요

1. 1920년 의열단원(義烈團員)으로 총독부(總督府) 및 중요 관공서(重要官公署) 폭파(爆破)를 기도(企圖)하여 폭탄(爆彈)을 국내(國內)에 반입(搬入)한 것이 발각(發覺)(세칭밀양폭탄사건(世稱密陽爆彈事件)) 되어 8년형(年刑)을 받고 복역(服役)(동아일보(東亞日報) 1921. 6. 22) 2. 복역(服役) 중 청진옥(淸津獄) 파옥 사건(破獄事件)으로 2년형(年刑)이 가형(加刑)되어 복역(服役)타가 1928. 3. 8 출옥됨. (동아일보(東亞日報) 1928. 3. 9)

인물정보

성명
이종암
한자명
李鍾巖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6 ~ 1930
본적
경상북도 대구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19년 상해(上海)에서 폭탄(爆彈)제조업을 습득하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 후 단원 최경학(崔敬鶴)에게 폭탄을 가지고 입국케 하여 밀양경찰서(密陽警察署)를 폭파하려다 실패 2. 1920년 의열단 부단장 3 1922년 3월 상해에서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저격하다가 실패 4. 1925년 11월 군자금모집 차 귀국하였다가 대구(大邱)서 피체되어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 1930년 순국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이현준
한자명
李賢俊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902 ~ 미상
본적
경상북도 달성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22년 중국(中國) 북경(北京)의 로하중학(潞河中學) 4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중 조선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고 동인의 권유를 받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김시현(金始顯) 등과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여 관공서 폭파, 관공리 암살 등을 실행하기 위하여 활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현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화익
한자명
李化翼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900 ~ 1978
본적
황해도 장연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920년 12월 최창한(崔昌翰)과 같이 장연(長淵)에서 동지를 규합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여 군자금모집에 활약 (기려수필(騎驢隨筆) p.387, 가출옥(假出獄) 414항) 2. 1922년 만주(滿洲)로 망명 북경(北京) 상해(上海)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진력 3. 1924년 상해(上海)에서 의열단에 입단 4. 나석주(羅錫疇)와 서울에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 동양척식회사 폭파계획(東洋拓植會社爆破計劃)에 참여(參與)한 혐의(嫌疑)로 1927년 5월 북경(北京)에서 피체(被逮) 신의주지방법원(新義洲地方法院)에서 15년형(年刑)을 언도(言渡) 받음

이화익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봉근
한자명
韓鳳根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4 ~ 1927
본적
경상남도 밀양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80

공적개요

1919.11월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하고 동지들과 국내에 입국하여 일본관청과 요인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수차에 걸쳐 폭탄과 무기를 반입하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한봉인
한자명
韓鳳仁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8 ~ 1968
본적
경상남도 밀양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이후 의열단(義烈團)에 참가하여 군자금모집과 밀양경찰서 폭파 및 무기 반입 등에 협력한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