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손연준 부부 묘
손연준(1902~1950)은 손양원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연준 목사상
손연준(1902~1950)은 손양원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을호 묘
이을호(1910~1998)는 전남 영광(靈光) 사람이다. 1934년 8월, 갑술구락부(甲戌俱樂部)·체육단(體育團) 등의 단체 결성에 참가하여 표면상 체육 장려를 내세웠지만, 내면으로는 단원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영광지역의 민족운동을 주도해 온 청년회(靑年會)와 농민회(農民會) 등이 일제의 강권으로 해산당하자,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필요했다. 그때 서울 약학전문학교(藥學專門學校)를 졸업한 이을호가 서울에 보급된 덴마크의 '닐슨북'이라는 도수체조를 배워가지고 귀향하여 영광읍 진명사(珍明社) 마당에서 이 지역의 지성인들을 모아 놓고 매일 아침, 이 도수체조를 가르쳤다. 이때 도수체조를 빙자하여 이 고장의 지도층 인사들은 1934년 4월 영광읍 교촌리 명륜당에 모여 영광체육단(靈光體育團)을 창단하였다. 이을호는 여기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체육단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배일사상이 고조되자, 일경은 1937년 9월 16일 밤에 '동방약소민족 옹호, 대한독립만세'라 쓴 벽보를 빌미로 3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붙잡혀 1년 4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9년 2월 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을호 집
이을호(1910~1998)는 전남 영광(靈光) 사람이다. 1934년 8월, 갑술구락부(甲戌俱樂部)·체육단(體育團) 등의 단체 결성에 참가하여 표면상 체육 장려를 내세웠지만, 내면으로는 단원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영광지역의 민족운동을 주도해 온 청년회(靑年會)와 농민회(農民會) 등이 일제의 강권으로 해산당하자,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필요했다. 그때 서울 약학전문학교(藥學專門學校)를 졸업한 이을호가 서울에 보급된 덴마크의 '닐슨북'이라는 도수체조를 배워가지고 귀향하여 영광읍 진명사(珍明社) 마당에서 이 지역의 지성인들을 모아 놓고 매일 아침, 이 도수체조를 가르쳤다. 이때 도수체조를 빙자하여 이 고장의 지도층 인사들은 1934년 4월 영광읍 교촌리 명륜당에 모여 영광체육단(靈光體育團)을 창단하였다. 이을호는 여기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체육단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배일사상이 고조되자, 일경은 1937년 9월 16일 밤에 '동방약소민족 옹호, 대한독립만세'라 쓴 벽보를 빌미로 3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붙잡혀 1년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9년 2월 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고금항일운동충혼탑
완도군 고금면을 중심으로 1920년부터 1933년까지 항일의병투쟁과 독립운동과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참살당하거나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투쟁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계승시키기 위해 충혼탑을 이곳 테마공원에 조성하였다. 1931년경 고금면 일부 사회운동가들은 농민조합 설립에 앞장서고 농민야학 등을 조직하여 농민개화운동이 완도군 일원으로 전파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총독부의 고금용지포 공유수면매립허가에 대항하기 위해 용지포 옹호동맹을 조직하고, 허가권을 쟁취하고자 투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우리민족이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2003년 10월 20일에 문을 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의 애국선열들과 그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일제 통치로 전국이 탄압받던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이 드높았던 소안도는,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렸으며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힘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당사도 항일전적비
일본은 1876년 우리나라와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 항구의 개항, 해안측량권, 해도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를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등어해와 남해에에 일본선박을 항해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선박의 안전 항해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 선생과 해남 이진 성명 미상의 의병 5,6명이 1889년 2월 24일 자지도 등대를 습격, 일본 등대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헌병 1개 소대 30여 명을 소안에 파견하여 소요에 대비한 후 명선리에서 일박하고 철수하였다.그런데 당사도 등대 근처에는 의거 당시 피살된 일본인 조난자를 위해 세웠던 조난기념비가 파손된채 보존되어 있다. 파손된 비에는 '등대 간수가 1909년 2월 24일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는 요지의 글이 남아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
소안도는 1909년 당사도 의거사건, 13년에 걸친 토지 소유권 소송 승리, 사립 소안학교 설립, 수의위친계, 소안 배달청년회 창립 등을 통해 줄기차게 조국 광복을 외쳤으며, 소안도 주민 8,000명 중 800여 명이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았던 곳이다. 송내호 등 2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으며, 면민 전체가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일의 함성이 거셌던 곳이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에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감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이준화는 1898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인본인 간수들을 처단했다.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르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소안도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김정상 공적(신지항일운동기념탑)
김정상(1894~1965)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1925년 5월 완도군(莞島郡) 신지중학교(新智中學校)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동료인 김창선(金昌善)·임재갑(任在甲)·송기호(宋琪浩)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에 1925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목고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하였다. 1927년 3월 1일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장병준(張炳俊)·송내호(宋乃浩) 등과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앞장섰으며, 전남 동북지역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재갑 공적(신지항일운동기념탑)
임재갑(任在甲, 1891~1960, 호 후룡)은 전남 완도 임촌 출생으로서 어려서 한문 수학. 서울 융희중학 졸업. 안중근 의거에 감동. 안창호 만나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로 맹세. 일본에 건너가 재일 유학생 지하조직에 가담. 1916년 귀국. 명신강습소 개설. 왜경에 체포되니 전 도민 항의로 석방. 만주로 망명. 신흥군관학교를 거쳐 용정 대성학교에서 교편이어.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투신. 운동자금 모금차 귀국. 19년 삼일만세 폭발로 전 도민을 지휘 항거. 다시 만주로 청산리싸움에 가담. 백호장군 호칭 받고 24년 귀국. 사재를 던져 신지 사립학교 설립. 이에 송내호 등 열혈투사들 결집. 인재 양성 전력 중에 27년 교사 전원이 피검 폐교되자 임재갑 사건으로 전국에 확산 3년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다. 다시 신간회 수양동우회 등의 중책을역임. 조국광복에 신명을 불사르다 60년 칠십 풍상의 생을 마쳤다.
신지항일독립운동기념탑
이 탑은 1994년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669에 신지면 출신 애국지사 임재갑, 장석천, 김정상 3인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을 후세에 알려 자라나는 2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하고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임재갑(1891~1960)은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1927년에 신간회 완도군지회장을 지냈다. 장석천(1903~1935)은 1928년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였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정상(1894~1965)는 신지중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다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신간회 활동에 앞장섰다.
약산 항일운동기념탑
전라남도 완도는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가장 치열하게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겨레의 섬이다. 1913년 사립중화학원 설립, 1914년 수의위친계 조직, 1920년 배달청년회, 1923년 사립소안학교 설립 개교, 1924년 소안 노농대성회, 1926년 살자회, 1927년 일심단 등 줄기찬 항일운동을 하며 항일독립정신을 잃지 않았고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완도 항일독립운동은 절해고도의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까지 무대로 하였고, 완도군에 속하면서 강진,장흥과 인접한 작은 섬이엇던 조약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역사의 물결에 참여하였다. 특히 교육사업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비밀결사를 통해 요원을 항일 격전지에 파견하였으며, 불법적 법률에 대해 법정에서 맞서 싸웠다. 이러한 완도 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