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 비석 | 기타
주소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가학리 260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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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2003년 10월 20일에 문을 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의 애국선열들과 그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일제 통치로 전국이 탄압받던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이 드높았던 소안도는,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렸으며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힘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강정태
한자명
姜正泰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1963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5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에서 3.1운동(運動)에 참가(參加)하여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참가(參加)하였고 1924. 8월 완도군(莞島郡) 청년연합회(靑年聯合會) 및 노동연합회(勞動聯合會)에 가입(加入)하여 소작농(小作農)을 중심(中心)으로 한 농민운동(農民運動)을 위해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3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강정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경천
한자명
金敬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55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4월 1-2일경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홍성시장(洪城市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경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남두
한자명
金南斗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6 ~ 1937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6. 6월(越) 전남(全南) 완도(莞島)에서 배달청년회(靑年會) 및 농민대성회(農民大成會)의 간부(幹部)로서 농민운동(農民運動)과 항일사상(抗日思想) 고취 활동(鼓吹活動)을 하였으며 1927. 11월(越) 일본총독(日本總督)의 폭압정치(暴壓政治)를 규탄(糾彈)하는 격문(檄文)을 배포(配布)하다 피체(被逮)되어 2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겪은 사실이 확인됨.

김남두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사홍
한자명
金仕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3 ~ 1945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5년 국권침탈 후(國權侵奪後) 일제(日帝)는 토지 수탈(土地收奪)의 방법(方法)으로 토지 조사(土地調査)를 실시(實施)하고 소안면 토지소유권(所安面土地所有權)을 왕실(王室)인 이기용(李琦鎔)에게 귀속(歸屬)시킨바 있는데 면민대표(面民代表) 4인중 1인(人)이 되어 반환청구소(返還請求訴)를 제기(提起)하고 13년에 걸친 일제(日帝)와의 투쟁(鬪爭)끝에 승소(勝訴)한 주동자(主動者)로서 활동(活動)하였으며 승소 기념(勝訴紀念)으로 의연금(義捐金) 10,400원(圓)을 모집(募集)하여 소안학교(所安學校)를 설립(設立)하고 동교 교장(同校校長)으로 취임(就任)하여 인재양성(人材養成)을 위하여 주력(注力)하다가 이 학교(學校)를 일제(日帝)가 강제 폐교(强制廢校)시키자 이에 강력(强力)하게 항의(抗議)한 사실이 확인됨.

김사홍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통안
한자명
金通安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8 ~ 1952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6. 6. 15. 전북(全北) 완도(莞島)에서 청년노동단체(靑年勞動團體)인 살자회(會)에 가입(加入)하여 간부(幹部)로서 소작농(小作農)을 중심(中心)으로 한 농민운동(農民運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통안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홍기
한자명
金鴻機
운동계열
미주방면
생몰년도
1889 ~ 1946
본적
미상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4년 미국(美國)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1919년 러시아에서 한인교육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서오성(徐五星)과 독립운동 정보를 교환하고 지원하였으며, 1928년 9월 이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동지회 시카고지회 외사부 담당, 서기를 역임하였고, 1944년 6월 한국 외교위원부 내무위원부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19년 이후 특별의연, 내지한재의연,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의 명목으로 백여 원을 의연한 사실이 확인됨.

김홍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기숙
한자명
朴起淑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7 ~ 1974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24.9.15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에서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입석(立席)한 일경(日警)의 퇴장을 명한 후 소작인(小作人)을 기만한 악질 지주(惡質地主)와의 절교(絶交)를 결의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중 6월20일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박기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흥곤
한자명
朴興坤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4 ~ 1925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년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에서 강정태(姜正泰) 송내호(宋乃浩) 등이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를 조직(組織)하자 이에 가입(加入)하고 지(智),덕(德),체(體)를 3대목표(大目標)로 회원(會員)을 규합(糾合)하면서 노농연합(勞農聯合) 대성회(大成會)를 조직(組織)하였으며 그 총회장(總會場)에 입회(立會)한 일경(日警)을 퇴장(退場)케하며 악덕지주(惡德地主)를 응징(膺懲)하기 위(爲)하여 절교(絶交)를 선언 결의(宣言決議)하며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면소(免訴)를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1월5일간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박흥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백형기
한자명
白亨基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1940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24. 9. 15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에서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제2회 정기총회(定期總會)를 개최하고 입석(立席)한 일경(日警)의 퇴장을 명한 후 소작인(小作人)을 기만한 악질 지주(惡質地主)와 절교(絶交)를 결의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중 7월간(月間)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백형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송기호
한자명
宋琪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28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월초(月初)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재학중(在學中) 김정수(金丁洙) 등과 같이 광주 독립만세 시위(光州獨立萬歲示威)를 계획(計劃)하고 숭일학교(崇一學校) 학생(學生)을 규합(糾合)하여 3.10 대시위(大示威)에 가담(加擔)케 하는 등 시위(示威)를 주도(主導)하다 피체(被逮)되여 징역 1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내호
한자명
宋乃浩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95 ~ 1928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김기한 등(金起漢等)과 같이 유하현(柳河縣)에 본부(本部)를 두고 경성(京城)과 각 도(各道)에 지단(支團)을 설립(設立)하려는 계획(計劃)을 진행중(進行中) 왜적(倭敵)에게 피검(被檢),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1년 판결(一年判決). (동아일보(東亞日報) 1921년 7월 3일,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p. 288)

인물정보

성명
신만희
한자명
申晩熙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1 ~ 1985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24. 9. 15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에서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입석(立席)한 일경(日警)을 퇴장시킨 후 악질 지주(惡質地主)에 대한 절교(絶交)를 결의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3월 16일 여(餘)의 옥고(獄苦)를 치른끝에 면소(免訴)되었으며 1925. 11. 8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집행위원회(執行委員會)의 사회를 맡아 도초도(都草島) 소작쟁의(小作爭議)에 지원금(支援金)을 보내기로 결의하였고 1925. 12월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중앙집행위원회(中央執行委員會)의 사회를 맡아 농민운동(農民運動)과 노농단체(勞農團體) 결성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1926. 4월 완도청년연합회(莞島靑年聯合會)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의장(議長)으로서 노농운동(勞農運動) 등 각(各) 부문별(部門別) 운동(運動)의 추진방안을 논의하는 등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신만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신준희
한자명
申晙熙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9 ~ 1943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4. 8월 전남(全南) 완도(莞島)에서 완도청년연합회(莞島靑年聯合會) 및 완도노동연합회(莞島勞動聯合會)를 조직(組織)하여 간부(幹部)로서 활동하였으며 배달청년회 간부(倍達靑年會幹部)가 되어 일경(日警)에게 불언동맹 실행(不言同盟實行)을 주도(主導)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6월을 받고 1926. 6월 소작농(小作農)을 중심(中心)한 농민운동(農民運動)을 하다 징역 3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신준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각재
한자명
李恪宰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4 ~ 1977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3년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에서 강정태(姜正泰) 송내호(宋乃浩)등과 같이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를 비밀결사(秘密結社)하여 지(智)·덕(德)·체(體)의 3대 목표(三大目標)를 세우고 회원(會員)을 규합(糾合)하면서 일경(日警)과는 「말」을 하지말자는 불언동맹(不言同盟)을 결성(結成)하여 실천(實踐)하고 또한 사립소안학교(私立所安學校)의 강제 폐쇄(强制閉鎖)에 항거(抗拒)하다 피체(被逮)되어 금고(禁錮)6월, 3년간 집행유예(年間執行猶豫)를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년6월20여일간(餘日間)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이각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갑준
한자명
李甲俊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7 ~ 1968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24. 9. 15.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소안면(所安面)에서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제2회 정기총회(定期總會)를 개최하고 입석(立席)한 일경(日警)의 퇴장을 명한 후 소작인(小作人)을 기만한 악질 지주(惡質地主)와의 절교(絶交)를 결의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갑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정동
한자명
李廷東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5 ~ 1983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7.11월 전남(全南) 완도(莞島)에서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해체(解體)에 따른 선언문(宣言文)」을 작성(作成) 등사(謄寫)하여 대중(大衆)에게 정치적(政治的) 의식(意識)을 각성(覺醒)케 하였으며 완도청년동맹(莞島靑年同盟) 석상(席上)에서 선언문(宣言文)을 낭독(朗讀)하여 민족 해방 운동(民族解放運動)의 선구대(先驅隊)로서 활동(活動)하도록 고취(鼓吹)케 하다가 1927.11.26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금고(禁錮) 6월, 3년간 집행유예(年間執行猶豫)를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년4월간(月間)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이정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정남국
한자명
鄭南局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7 ~ 1955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월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완도면(莞島面)의 3.1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을 주도(主導)하고 1924년 노농회(勞農會)에 가입(加入)하여 활동(活動)하다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6월을 받았고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부회장(副會長)이 되어 소안사립학교(所安私立學校)의 강제 폐교(强制廢校)를 강행(强行)하려는 일제(日帝)에게 조직적(組織的)으로 항거(抗拒)하며 일본국(日本國) 대판(大阪)으로 가서 재일본노동총동맹위원장(在日本勞動總同盟委員長)이 되어 대판(大阪), 동경(東京), 횡빈(橫濱) 완도향우회원(莞島鄕友會員) 1,000여명(餘名)으로 규탄 대회(糾彈大會)를 열고 일 내각 문부대신(日內閣文部大臣)에게 항의(抗議)하며 조선총독정치(朝鮮總督政治)의 실정(失政)을 시정 요구(是正要求)하였으며 1929. 7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후계당(後繼黨) 관계(關係)로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8월을 받은바 있으나 광복후(光復後) 국회의원(國會議員)으로서 국가건설(國家建設)에 참여(參與)한 사실(事實)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석규
한자명
鄭錫奎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12 ~ 1982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광주 학생사건 관련(光州學生事件關聯) (금고(禁錮)4월)(판결등본(判決謄本)) 1930 독서회사건(讀書會事件)으로 2년 6월형(판결등본)

정석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형천
한자명
崔亨天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1969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4.8월 전남(全南) 완도(莞島)에서 완도청년연합회(莞島靑年聯合會) 및 완도노동연합회(莞島勞動聯合會)를 조직(組織)하여 간부(幹部)로서 활동(活動)하였으며 일경(日警)에게 불언동맹(不言同盟)을 주도(主導)하다 징역 6월을 받았으며 소작농(小作農)의 권리 옹호(權利擁護)를 위하여 「살자회(會)」를 조직 활동(組織活動)하다 징역 3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최형천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