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약산 항일운동기념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주소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장용리 685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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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전라남도 완도는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가장 치열하게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겨레의 섬이다. 1913년 사립중화학원 설립, 1914년 수의위친계 조직, 1920년 배달청년회, 1923년 사립소안학교 설립 개교, 1924년 소안 노농대성회, 1926년 살자회, 1927년 일심단 등 줄기찬 항일운동을 하며 항일독립정신을 잃지 않았고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완도 항일독립운동은 절해고도의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까지 무대로 하였고, 완도군에 속하면서 강진,장흥과 인접한 작은 섬이엇던 조약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역사의 물결에 참여하였다. 특히 교육사업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비밀결사를 통해 요원을 항일 격전지에 파견하였으며, 불법적 법률에 대해 법정에서 맞서 싸웠다. 이러한 완도 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탐방로그

처음에 약산항일운동기념공원을 찾아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 산121-19 주소를 검색해서 왔지만, 정확한 주소가 아니었다. 관련 기사를 통해 접근성 문제로 초반 계획과 다르게 건립 장소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역 주민들에게 묻고 물어서 찾아온 약산항일운동기념공원의 정확한 GPS상의 주소는 완도군 약산면 장용리 685이다.

인물정보

성명
고서동
한자명
高瑞東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2 ~ 1990
본적
전라남도 고흥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4. 1월 전남(全南) 장흥(長興)에서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組織)하고 각(各) 부락별(部落別)로 농민반(農民班), 소년반(少年班), 청년반(靑年班) 등을 구성(構成)하여 항일 의식(抗日意識)을 고취(鼓吹)하다 피체(被逮)되어 1년 6월간(月間) 옥고(獄苦)를 겪은 사실이 확인됨.

고서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경태
한자명
金敬太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5 ~ 1941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4. 6월~1938년까지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고금면(古今面) 장용리(藏龍里)에서 정후균(鄭後均)등 8명(名)의 동지(同志)들과 항일 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인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全南運動協議會再建委員會) 후속단체(後續團體)를 조직(組織)하여 농어민(農漁民)에게 배일 사상(排日思想)을 고취(鼓吹)하였고 부락단위 농민회(部落單位農民會)를 조직(組織) 동지(同志)를 규합(糾合)하면서 무산 아동 야학(無産兒童夜學)을 개설(開設)하여 문맹 퇴치(文盲退治)등의 활동중(活動中) 피체(被逮)되어 징역3년6월을 받고 복역(服役)하다 사경즉전(死境卽前)에 병보석(病保釋)으로 출감(出監)하였으나 「집」에 도착(到着)한 후(後) 사망 순국(死亡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김경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옥도
한자명
金玉道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9 ~ 1989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2.10경 완도군(莞島郡) 고금도(古今島)에서 전남농민운동협의회(全南農民運動協議會) 동지들과 협의하여 간척지 일본지주의 일방적인 소작료 강징(强徵)으로 발생한 쟁의를 항일투쟁으로 발전시켜 농민들의 단결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양석순
한자명
梁石巡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0 ~ 1958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33년 2월경 전남 완도군에서 완도운동협의회에 가입하여 농민반원 및 청년반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목포검사분국으로 송치됨.

양석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치오
한자명
兪致五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8 ~ 1996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학생 비밀결사(學生秘密結社) 성진회(醒進會)에가담(加擔)하여 2년간(年間) 활동(活動)하였으며 1929.11.3 광주학생(光州學生) 대시위 운동 후(大示威運動後)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1년 징역형(懲役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유치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정남균
한자명
鄭南均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5 ~ 1950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고(故) 정남균(鄭南均)은 1926년대 광주지구(光州地區)에서 항일운동(抗日運動)을 계속하여 상당한 공적을 거향(擧向)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병생
한자명
鄭炳生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3 ~ 1948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34년 8월 전남 완도군에서 전남운동협의회 재건 조직에 참여하고, 같은 해 10월 구성(九城) 농민반 책임자, 12월 선전부원 등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음.

정병생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정학균
한자명
鄭鶴均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3 ~ 1946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0

공적개요

1920. 1월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고금면(古今面)에서 광무황제(光武皇帝) 붕어(崩御) 1주기(週忌)를 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춘 후 고금도(古今島) 보통학교(普通學校)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고 군중을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4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정학균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차태희
한자명
車泰喜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3 ~ 2000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3.5월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해남위원회(海南委員會) 선전위원으로 야학 및 독서회를 조직 운영하고 농민과 청소년들에게 민조의식을 고취 활동하다 일경에 피검되어 1936. 12.13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차태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사열
한자명
崔士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82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5 서울에서 3.1독립만세’(獨立萬歲)가 일어난 후(後) 학생단(學生團)이 주도(主導)하는 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示威)가 남대문 역전(南大門驛前)에서 크게 일어났을때 이 대열(隊列)에 참여(參與)하고 3.8에는 “동포(同胞)여 일어나라” 라는 격문(檄文) 200 여매(餘枚)를 가회동(嘉會洞) 주민(住民)에게 배포(配布)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았으며 미결기간(未決其間)을 합산(合算)하여 1년 3월 28일간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최사열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선일
한자명
崔先日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8 ~ 미상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36. 2월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고금면(古今面) 관산리(冠山里) 천도교(天道敎) 교회당(敎會堂)에 곽사길(郭士吉)·박동규(朴東珪) 등과 함께 노동야학(勞動夜學)을 설립(設立)하여 교육(敎育)을 통해서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시키고 「노동가」등을 가르치면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필요성을 강조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중 1년 2월여(月餘)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최선일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귀재
한자명
韓貴才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11 ~ 1980
본적
전라남도 완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31년 1월 서울 종로에서 김기범(金基範), 진옥진(陳玉振) 등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을 재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하여 고학당 및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신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한 후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음.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