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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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공적충훈비
성주공적공훈비는 조국의 광복과 국가발전의 초석이 된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자유국가 수호를 위하여 헌신하신 우리 고장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깨우치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04년 1월 건립한 비이다. 이 조형물은 높이 8m의 주조형물과 머릿돌, 명각비, 설명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주출신 독립유공자 65명과 6·25전쟁 참전유공자 1,984명, 월남참전유공자 262명 등 총 2,31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는 하계마을 출신인 이만도, 이중언 등 25명의 독립운동가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지역 보훈문화창달에 기여하기 위해 2004년 11월 7일 건립된 비이다. 하계마을은 퇴계 이황 선생의 고택과 묘소가 있는 곳으로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정착해온 마을이다. 조선조에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25명의 애국지사를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다. 이만도 선생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지도자로서 백동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육성하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늑약을 당하자 24일간 단식 후 자결하였다. 그의 며느리인 김락 여사도 파리장서를 주관한 남편 이중업과 광복회사건의 아들 이동흠을 뒷바라지했고 자신은 3․1 예안만세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실명했다. 이만도 선생과 을미의병을 함께 일으켰으며 단식에 동참하여 순절한 동은 이중언 선생, 3․1 예안만세 운동의 이비호 선생, 만주항쟁의 이원일 선생, 한말에 의병활동을 한 이만원 선생,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이종흠(李棕欽) 선생이 모두 하계마을 출신이다.
이종흠 묘
이종흠(1900 - 1976)의 호는 반산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종흠은 1919년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초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을 모금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당시 안동 지역의 연락책이던 정수기가 만남을 주선하여 대구에서 김창숙을 만나 권총 한 자루를 받아 돌아왔다. 1926년 1월 15일 영양군 석보면에 살고 있던 외숙부 이현병(李鉉炳)을 찾아가 군자금 2만 원을 요구하였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이종흠은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구현 거처(송포정사)
김구현(1889 - 1969)은 1920년 음력 5월 안동 서후면 교리 권영묵(權寧默)의 집에서 흠치교에 가입하였다. 그는 흠치교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에 앞장섰는데, 교도를 모집하고 자금을 거두어들이는 등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구현은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구현은 흠치교(증산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흠치교는 뒷날 보천교(普天敎)로 불리는 종교단체이다. 보천교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을 따르던 차경석(車京石, 본명 車輪洪)이 창시한 흠치교 계열의 새로운 종교이다. 차경석은 강일순이 죽고 난 후 선도교(仙道敎)를 창시하였는데, 1921년 선도교를 보화교(普化敎)로 고쳤다가 이듬해 1922년에 다시 보천교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조선 독립을 표방하고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으며, 외국산 물품 배격과 자급자족 운동을 전개하며 물산장려 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200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흥락, 김용환 집
김흥락(1827 - 1899)의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 호는 서산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병약한 몸으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용환(1887 - 1946)의 본관은 의성, 자는 여현이며, 김흥락의 손자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우고자 1908년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적정(敵情) 탐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11년에는 김상태(金尙台) 의진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11년 경상북도 순흥 상단곡 전투에서 김현동이 부상을 당하자, 그를 업고 예천군 유천면 중평리로 돌아왔다. 또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일본 경찰에게 세 번이나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1919~1920년경 김용환은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안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1년에는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 지단(支團)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군 지원 단체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은 경상북도 안동을 비롯하여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상남도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친일 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922년 12월 28일 김용환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 대표마을 금계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금계마을 표지석은 금계마을의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운 표지석이다. 안동의 금계마을은 나라가 위협에 처할 때마다 불굴의 의리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독립운동사에도 그대로 드러나, 17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금계마을의 항일투쟁은 1895년 의병항쟁으로 시작되었다. 학봉11대 종손 김흥락은 안동 을미의병의 첫 장을 여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김희락, 김윤모, 김호락, 김진의, 김준모는 직접 의병을 이끌었다. 중.후기 의병시기(1904~1909)에는 13대 종손 김용환과 김현동.김규헌 등이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저항을 이어갔다. 3.1운동 후 김익모는 파리장서에 서명했으며, 의용단 김용환.김병동 등과 김세동이 자금 모집에 힘쓰다가 고초를 겪었다. 김동식.김화식 형제는 2차 유림단 의거에 앞장 섰고, 김연환과 김원식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펼쳤다. 이 밖에도 김흥락 아래서 학문을 닦았던 후학 가운데 60여명이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김용환 묘
김용환(1887 - 1946)의 본관은 의성, 자는 여현이며, 김흥락의 손자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우고자 1908년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적정(敵情) 탐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11년에는 김상태(金尙台) 의진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11년 경상북도 순흥 상단곡 전투에서 김현동이 부상을 당하자, 그를 업고 예천군 유천면 중평리로 돌아왔다. 또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일본 경찰에게 세 번이나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1919~1920년경 김용환은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안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1년에는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 지단(支團)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군 지원 단체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은 경상북도 안동을 비롯하여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상남도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친일 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922년 12월 28일 김용환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 대표마을 부포마을 표지석
안동의 부포마을은 15명의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경북 최초로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취지의 예안통문을 올린 사람이 바로 부포 출신의 이만응이었다. 이명우는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던 날 유서를 남기고 자정순국自靖殉國하였다. 그러자 아내 권성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부포 마을 3⋅1 만세 운동은 예안 장터와 안동 장터에서 발생했다. 이곳에 참가한 사람들은 금용문, 금용운, 이성호, 이회벽,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이었다. 의병에서 계몽 운동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조직인 충의사에 가담했던 이규락의 아들인 이동하는 퇴계 종가를 도와서 보문의숙을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동하의 아우 이경식은 장진홍, 이원기, 이원록 등과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경식의 딸 이병희는 종연방적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하고 1940년에는 북경으로 망명, 이육사와 같이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처녀의 몸으로 북경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병하의 종손녀 이효정 또한 항일 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한편 이선호는 1925년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순종 인산 당일에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1929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펼쳐 나가던 중 수상 관저를 습격한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동생 이면호와 함께 1933년 메이데이 기념 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선호의 부친 이중진은 예안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사회 운동을 펼쳤다. 이밖에 이 마을 출신으로 독립 대열에 선 사람으로 이원혁과 이원태를 들 수 있다. 이원혁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서울지회와 본부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 진상 규명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한 죄로 검거되어 징역을 살았다. 이원태는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징역을 살았다. 1925년 김창숙이 몽골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모은 일로 6천여 명의 유림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선 부포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횡성 조씨와 봉화 금씨 문중 사람들이 다소 가세하였다. 이 마을 독립 운동가 가운데 국가로부터 포상이 추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금용문, 이경식, 이동하, 이명우⋅권성 부부, 이병희, 이선호, 이성호, 이원태, 이원혁, 이효정,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 15명이다.
부포애국지사공원
안동시 예안면에 위치한 부포애국지사공원은 예안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2022.12.30일 조성한 공원으로 부포리 선착장 옆에 있다. 공원에는 이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약력을 새긴 조형물들이 함께 건립되어있다. 안동의 부포마을은 15명의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선 부포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횡성 조씨와 봉화 금씨 문중 사람들이 다소 가세하였다. 이 마을 독립 운동가 가운데 국가로부터 포상이 추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금용문, 이경식, 이동하, 이명우⋅권성 부부, 이병희, 이선호, 이성호, 이원태, 이원혁, 이효정,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 15명이다.
독립운동 대표마을 정산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정산마을 표지석은 정산마을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리고자 2021년 세운 표지석이다. 예안의 정산마을은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3.1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 그리고 1920년대 신간회 안동지회에서 활약하였으며, 만주지역 항일투쟁사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정산마을의 항일투쟁은 배인환의 애국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던 그는 1912년 일가 10여 호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동진학교.협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아들 배재형은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배재형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 김씨도 18일 단식 끝에 절명하였다. 동포사회를 이끌던 자치단체 한족회는 이러한 김씨 부인의 행적을 기려 1919년 6월 포열장(褒烈狀)을 내렸다. 나라 안에서는 조방인.조병건.조수인이 1919년 3월 17일 예안 3.1운동을 이끌었으며, 박성경.박춘근.이두선은 3월 21일 임동면 편항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 김재원.배동환.이학우는 1920년 흠치교에 가담하여 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이들 가운데 배동환은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삼산광복운동기념비
삼산광복운동기념비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삼산리 선비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이다. 삼산광복운동기념비는 삼산정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삼산 유정원이 개척한 마을이 삼산리이며, 근대 백 년 동안 선비의 전통을 이은 독립운동가가 속출하였고, 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몸 바친 인사가 많아 이 마을이 주목받고 있다. 1894년 갑오왜란과 이듬해의 을미사변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서파 유필영 선생은 자신도 의병에 도서기로 참여하고 유창식은 종사관으로, 유인식 등의 문중 청장년을 모아 청량선에 진을 치고 의병을 일으켜 한국독립운동사의 막을 올렸다. 어어 함창, 태봉에 진주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의병 전쟁의 명성을 떨쳤다. 그 때 창식 인식 만식 삼종형제는 계몽주의운동으로 전환시켜 혁신 유림의 단서를 열었다. 천전리의 협동학교와 잔진리의 오산학교, 삼산리야학이 그의 유적이다. 전국적으로는 김대락 이상룡 이중업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김동삼 곽상훈등이 혁신 유림의 대표자들이다. 독립운동도 처음에는 의병운동으로 시작하여 계몽운동으로 발전한 혁신 유림의 역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서파를 중심한 삼산리 유림의 창안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온 문중과 안동의 선각적 지도가를 독려하여 망명길을 열어 독립운동 해외기지 개척을 착수하여 서간도에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곳곳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치하였다. 유인식이 경학사 교부장을 맡고 유연화는 연해주로 가고 유림은 북간도로 들어갔으며 유창식이 망명길에서 순국한 고사가 이때의 이야기이다. 유정희는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상복으로 은거하였으며 일제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났다. 유만식은 동후장터에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하고, 서파는 면우 곽종석, 심산 김창숙과 더불어 전국 유림대표 137인의 호응을 얻어 파리장서를 서명하여 3.1운동을 민족운동으로 대성함과 동시에 혁신 유림의 역사를 완성하였다. 그 작업의 비밀장소가 침산정이다. 1904년 의병운동이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혁신 유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파리장서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니 혁신유림의 역사는 서파를 중심한 삼산리 유림에 의하여 시작되고 완성되어 이곳 삼산리가 그 역사의 고장이 된 것이다. 삼산리 독립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유림과 유기준이 독립군을 거쳐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 또는 광복군으로 망명하여 활약했고 유기준은 끝까지 만주에서 광복군 제3지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유림은 무정부주의운동으로 주목을 받았고, 1926년 유면희가 중앙고보 재학중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학생과학위원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 동산의 장남인 준희는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곽상훈 김구경 박두숙 등과 2년간 운영하다가 강제 폐교 당하고 서파의 지시로 삼산리 야학을 침산정 인근에 유면희 유기태 유기복의 주동으로 동민이 힘을 모아 교사 다섯칸을 건립한 후 16년간 자력으로 유지하였으나 1940년 일경의 방화로 폐교되었다. 1924년 서파가 작고한 전,후에 동산은 이상재 유진태 박중화등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교육문화운동과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신간회 안동지회에 유기태 유기만 유기복이 참여하여 영주, 봉화, 영양지회를 이끌고 향교철폐를 비롯한 유교혁신운동과 양력과세를 비롯한 전통개혁운동등 선구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기만 유기일 형제가 안동청년동맹, 예안노농행동대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동산 유인식선생도 고문 여독으로 작고하면서 삼산리에도 세대교체가 이루어 졌다. 그때 유기태의 고가인 전주유씨 삼산종택을 비롯하여 집집이 독립운동의 유적지가 되었다.
김남수 기적비
김남수(1899 - 1945)의 자는 중심, 아호는 우전, 학산이며, 일제강점기 안동지방에서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 조선노동연맹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과 김동삼(金東三)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와 서울 중동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안 3·1운동에 참여한 김남수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 들었다. 1920년 가을에 유인식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김남수의 사회운동이 시작되었다.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다가 상경해 동향 출신인 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이준태(李準泰) 등과 무산자동맹에서 활동하며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6월 경성공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女工) 동맹파업의 전말(顚末)」이란 보도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3년 11월에 안동으로 내려와 양반지주 출신들인 이준태·권오설·안상길(安相吉)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해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1924년 이후 안동지방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김남수는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그 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남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8월 9∼10일 이틀 동안 친일·극우 인물들이 형평사예천지회 사무소를 파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켰는데, 이 때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상세하게 그 전말을 연일 보도해 형평사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안동청년연맹의 임시의장으로서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청년데이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연장선에서 1925년 10월에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를 결성했는데, 김남수가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또 1925년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어려운 옥살이를 참아냈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위조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광복을 맞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