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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부포마을 표지석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55-1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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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안동의 부포마을은 15명의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경북 최초로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취지의 예안통문을 올린 사람이 바로 부포 출신의 이만응이었다. 이명우는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던 날 유서를 남기고 자정순국自靖殉國하였다. 그러자 아내 권성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부포 마을 3⋅1 만세 운동은 예안 장터와 안동 장터에서 발생했다. 이곳에 참가한 사람들은 금용문, 금용운, 이성호, 이회벽,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이었다.

의병에서 계몽 운동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조직인 충의사에 가담했던 이규락의 아들인 이동하는 퇴계 종가를 도와서 보문의숙을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동하의 아우 이경식은 장진홍, 이원기, 이원록 등과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경식의 딸 이병희는 종연방적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하고 1940년에는 북경으로 망명, 이육사와 같이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처녀의 몸으로 북경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병하의 종손녀 이효정 또한 항일 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한편 이선호는 1925년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순종 인산 당일에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1929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펼쳐 나가던 중 수상 관저를 습격한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동생 이면호와 함께 1933년 메이데이 기념 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선호의 부친 이중진은 예안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사회 운동을 펼쳤다. 이밖에 이 마을 출신으로 독립 대열에 선 사람으로 이원혁과 이원태를 들 수 있다. 이원혁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서울지회와 본부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 진상 규명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한 죄로 검거되어 징역을 살았다. 이원태는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징역을 살았다. 1925년 김창숙이 몽골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모은 일로 6천여 명의 유림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선 부포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횡성 조씨와 봉화 금씨 문중 사람들이 다소 가세하였다. 이 마을 독립 운동가 가운데 국가로부터 포상이 추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금용문, 이경식, 이동하, 이명우⋅권성 부부, 이병희, 이선호, 이성호, 이원태, 이원혁, 이효정,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 15명이다.

탐방로그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55-1 성성재종택 입구 독립운동 대표마을 부포마을 표지석을 찾았다. 독립운동 대표마을 부포마을 표지석은 성성재종택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부포 출신의 선열들이 각 시기의 독립운동사를 대표할만 한 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그러한 공적을 기리고자 세운 표지석이다.

인물정보

성명
금용문
한자명
琴鏞文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6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17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예안 시위(禮安示威)는 신상면(申相冕) 예안면장(禮安面長)의 주동(主動)으로 면사무소(面事務所) 등사기(謄寫機)를 이용(利用)하여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과 태극기(太極旗)를 다량(多量)으로 제작(製作)하여 이날 모인 수천 명(數千名)의 시위 군중(示威群衆)에게 배부(配付)하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일인(日人)들이 세워놓은 소위(所謂)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넘어뜨린 후(後) 경찰 주재소(警察駐在所)를 파괴(破壞)하는 등 시위(示威)를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경식
한자명
李京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5 ~ 1945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25년 대구(大邱)에서 장진홍(張鎭弘)이 이정기(李定基), 이원록(李源祿) 등과 일제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27. 10. 18 장진홍 의사(義士)의 조선은행(朝鮮銀行)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피체되어 면소(免訴)될 때까지 약 2년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동하
한자명
李東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5 ~ 1929
본적
충청남도 청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4월경 충남 청양군 운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동하
한자명
李東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5 ~ 1929
본적
충청남도 청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4월경 충남 청양군 운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이두호
한자명
李斗鎬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59 ~ 1915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896년 3월과 4월에 강원도 강릉군, 경북 안동군 등지에서 김도현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함.

인물정보

성명
이병희
한자명
李丙禧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8 ~ 2012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32년 부친 이경식(李京植)이 장진홍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가족들이 모두 만주로 이주하려고 하였으나 조부의 연로 등으로 부친만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학업을 중단하고 1933. 5월 경부터 서울에서 종연방직(鍾淵紡織)주식회사의 여공(女工)으로 근무하면서 1936년 김희성(金熙星), 박인선(朴仁善) 등과 회합하여 여성동지를 획득하고 공장노동운동을 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2년 4월의 옥고를 치른 후 북경으로 망명하여 이육사(李陸史) 및 의열단원 등의 연락활동을 지원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 피체되어 이육사와 북경감옥에 함께 수감되었다가 1944. 1월 석방된 후 계속 복역 중이던 이육사가 옥사하자 시신과 유품을 정리하여 국내유족에게 인도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선호
한자명
李先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4 ~ 1950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25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제3학년 재학시 이병립(李炳立) 이천진(李天鎭) 등과 조선사회과학연구회(朝鮮社會科學硏究會)를 창립하였으며 1926.6.10 순종황제(純宗皇帝)의 국장일(國葬日)을 맞이하여 1919년 독립만세운동과 같은 거사를 일으킬 것을 목적으로 만세기(萬歲旗) 격문(檄文) 등을 제작하여 연도(沿道)에 도열(堵列)하고 있는 참예 군중(參詣群衆)에게 살포하며 대연(大輦)이 통과될 때 독립만세를 선창 연창하다가 피체되어 주동자로 징역1년(미결(未決)60일통산(通算))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성호
한자명
李成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68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0

공적개요

1919년 3월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원태
한자명
李源泰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5 ~ 1936
본적
충청남도 대전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25. 11월 중국(中國) 내몽고(內蒙古)지역의 황무지를 개척, 독립군 기지(獨立軍基地)를 건설하여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을 위해 귀국한 김창숙(金昌淑)을 도와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제공하며 동지들과의 접선기회를 제공하는 등 지원활동을 전개하다가 1926년 3월경(月頃) 피체(被逮)되어 약(約) 1년의 옥고(獄苦) 끝에 징역 10월,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원혁
한자명
李源赫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0 ~ 1968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新幹會) 서울지회와 본부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말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의 진상을 알리고 이 사건으로 피검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신간회(新幹會)가 주도한 조선민중대회(朝鮮民衆大會)를 개최하고자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4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효정
한자명
李孝貞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3 ~ 2010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33년 10월 서울에서 종방(鐘紡) 경성제사공장(京城製絲工場) 파업과 관련하여 체포된 바 있으며, 1935년 11월 서울에서 러시아 공산대학 출신인 김승훈(金承塤)이 이재유(李載裕)·권우성(權又成) 등과 의논하여 사유재산 제도의 부인과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결성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京城地方左翼勞動組合) 조직준비회(組織準備會)에 가담하여 노동자 동지 확보와 공산주의 사상 선전에 주력하다가 체포되어 약(約) 1년 1월의 옥고(獄苦)를 치른 후 예심(豫審)에서 면소(免訴) 처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방인
한자명
趙邦仁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43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17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예안(禮安)장터에서 독립만세에 참집(參集)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주재소를 습격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병건
한자명
趙炳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7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17 3.1운동을 주도하여 예안면(禮安面)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고 1500여 군중을 이끌고 일경 3명을 인질(人質) 무장해제(武裝解除)로 앞세워 대항하다가 피포(被捕)되어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형을 확정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사명
한자명
趙思明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6 ~ 1973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17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장터와 경찰서(警察署) 앞에 모인 수 백 군중(數百群衆)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동(主動)하고 경찰서(警察署) 기물(器物)을 파손(破損)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수인
한자명
趙修仁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1 ~ 1943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3. 17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의 3.1운동 주동자(主動者)로서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5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