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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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선학원은 불교단체인데, 불법(佛法)의 정통인 선리(禪理)를 탐구하고, 선풍(禪風)을 선양함으로써 불교중흥을 이룩하고자 만공(滿空)·용성(龍城)·혜월(慧月)·도봉(道峰)·석두(石頭)·남천(南泉)·상월(霜月) 등 여러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서울특별시에서 설립하였다.일제강점기에는 서정희(徐正熙)·여운형(呂運亨)·신명균(申明均)·김법린(金法麟)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고, 광복 후 불교정화의 산실이 되었다. 이처럼 호국(護國)과 호민(護民)의 뚜렷한 법통을 굳혀온 선학원은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허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지하 1층, 지상 4층의 현대적 대가람으로 중창되었고, 선의 실수(實修)나 보급을 위하여 상설 선원(禪院)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531개의 사암을 가지고 있으며, 산하에 선우회(禪友會) 등의 신행단체를 두고 있다. 월간지 『선원(禪院)』을 간행하고 있으며, 종로어린이집·반포어린이집 등의 시설도 운행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600개소의 분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3년 현재 정산 법진(靜山 法眞)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다. 최근 조계종과 소속여부를 놓고 논란이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결론은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준 집
이준(1859 - 1907)은 함경남도 북청(北靑)군 속후(俗厚)면 중산(中山)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를 거쳐 검사로서 관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에 가담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한국정부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에 가입하여 그 총무의 직책을 맡고 격렬한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보안회의 회장은 송수만(宋秀晩), 부회장은 원세성(元世性)이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로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였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은 이상설, 부회장은 이준, 총무는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은 이상재, 서무부장은 이동휘,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 위(許蔿) 등이었다. 대한협동회는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에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의 책임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준을 6개월의 유배형(流配刑)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귀양보내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이준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동지들인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김 구(金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을사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회 2회로 도끼를 메고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체포당하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하였다. 제1회의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고 다섯 명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대한문 앞에 몰려가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경찰이 출동하여 상소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이준 등은 가두연설을 하여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하면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탄압하고 이준 등 지도자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준은 1906년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이 목적을 전국 각 지방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하여 그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제의 완전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국왕이 조약체결의 전제권을 갖지 않고 의회가 이를 심의하고 동의케하는 제도로 개혁해야 함을 주장하여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헌정연구회가 확대개편되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덕기 이회영(李會榮) 박(朴)상궁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 고종에게 이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서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가 군사적 강압을 가하여 체결된 것으로 고종은 찬동한 바 없는 조약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종이 이에 동의했으므로 극비리에 밀사(密使)로서 정사(正使)에 이상설, 부사(副使)에 이 준과 이위종(李瑋鍾)이 임명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다. 이상설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고, 이위종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다. 이준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의 밀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가 출발하기 직전인 4월초에 양기탁과 안창호(安昌浩)가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에 가입했으나 곧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므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밀사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 받았다. 이준 등 세 밀사는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가 방해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밀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 또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밀사의 활동에 협조적이었던데 비하여,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준은 이에 분개하여 통탄하다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준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송진우 집
송진우(1887-1945)의 호는 고하이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자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송진우의 관리 아래 중앙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관철했으며 수많은 애국적 청소년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11월 이상재(李相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평양연안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국내대표로 암석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5년 11월에 함경남도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時代日報) 지방부장 홍남표를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무명회(無名會)의 교섭위원으로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집
이상재(1851-1927)의 자는 계호, 호는 월남이며,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자(落榜擧子)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濬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조선어학회 회관터 표지석
조선어학회는 각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조선어 연구회는 주로 한글 철자법을 연구하였고, 동인지 『한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반포일을 ‘가갸날’ 혹은 ‘한글날’로 명명하고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한글 보급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한글 사전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우리글의 의미를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며, 민족의 글과 정신을 일깨워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갱생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전 편찬을 위해서는 통일된 표준어와 맞춤법 등이 필요하였다. 이에 1930년 12월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1년 1월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인 조선어 학회로 개편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시작으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차례로 확정하였다. 1940년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수정 발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 사전은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조선어대사전』 출판을 허가받았고, 194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글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원고와 서적은 전부 압수되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가 사전 편찬에 참여하던 교사 정태진(丁泰鎭)에게서 강제로 조선어 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조선어 학회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하는 찬조 회원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에게는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이윤재(李允宰)와 한징(韓澄)은 옥사하였으며, 이극로,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정태진의 5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 학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해방 후 석방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조선어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한글 사전 편찬은 1945년 10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에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를 되찾으며 다시 추진되었다. 조선어 학회는 1947년 한글날을 기해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1957년 6권 발간을 마지막으로 한글 사전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이한응 기념비
이한응(1874 - 1905)는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일명 한응(漢膺).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이경호(李璟鎬)의 아들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에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제1차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준 동상
이준(1859 - 1907)은 대한제국기 대한협동회 부회장, 국민교육회 회장, 헤이그 특사단 부사 등을 역임한 항일운동가. 애국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함경남도 북청 출신. 아버지는 이병관(李秉瓘)이다. 1887년(고종 24)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해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수만(宋秀晩)·원세성(元世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후속단체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고, 다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강력히 반대해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윤하영(尹夏榮)·양한묵(梁漢默) 등과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이 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하였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된 뒤 1905년 5월 윤효정(尹孝定)·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전덕기(全德基)·최재학(崔在學)·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전덕기·유성준(兪星濬)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고향인 함경도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지도해 함경도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6, 7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준은 전덕기·이회영(李會榮)·박상궁(朴尙宮)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해 고종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하고, 다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고당기념관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83년 2월 1일 출생. 아버지는 조경학(曺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 김씨(鎭江金氏)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주3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남궁억 집 터
남궁억(1863 - 1939)는 일제강점기 황성신문 사장, 대한협회 회장, 배화학당 교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이다.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서울 출신. 아버지는 도사(都事) 남궁영(南宮泳)이다. 1884년(고종 21)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해관(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고종 23) 내아문(內衙門) 부주사(副主事)가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 · 러시아 · 독일 순방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주1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 궁내부(宮內府)별군직(別軍職)을 거쳐, 1893년 칠곡군수를 지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 내부 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 중앙위원 · 서기 · 사법위원 · 평의원 등에 선출되는 등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인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2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래 우리나라를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러 · 일협정의 침략적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과 총무 나수연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정미칠조약주2을 체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새세대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 그 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적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신문사 표지석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다. 계몽적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탄생했다. 거액의 정부 예산이 지원되어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근대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화 근대화 사상을 강조하며 국민을 교육·계몽하는 일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립협회가 수구파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정부의 매각 강요에 굴복해 1899년 12월 4일자 신문을 끝으로 종간했다. 정부는 신문사 매수 후 속간을 약속했다가 영구 폐간시켰다.
이범진, 이위종 집
이위종(1887 - 미상)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독립운동가이다.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에 있는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주재 공사에게는 철수령이 내렸으나,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은 2등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위종과 함께 철수하지 않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체류하였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있자, 서울에서는 이 회의에 한국대표를 참석시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하여 정사(正使)에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이 준(李儁)과 이위종 등 세 밀사를 임명하였다. 이준은 황제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이미 1년 전에 망명해 와 있는 이상설과 만나 합류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밀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1907년 6월 25일 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에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이위종이 교섭과 문서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열강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반면에 신문기자들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이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알리는 공고사(控告詞)를 이상설 이 준 이위종 등 세 특사의 연서로 작성하여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프랑스어로 된 이 장문의 공고사와 그 부속문서의 프랑스어 본은 이위종이 작성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위종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신문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會)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강연을 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회합에는 각국대표와 이름 있는 언론인 및 각국 수행원들까지 광범위하게 참석했는데, 이위종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서 의결하게 까지 하였다. 이위종의 이 강연의 성과는 당시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여론의 환기에 상당히 큰 작용을 하였다. 밀사들은 투숙한 호텔정문에 태극기를 걸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밀사 중의 이 준이 7월 14일 순국하였다. 이위종은 이상설을 따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순방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서 군정부(軍政府)와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는 등 구국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범진(1852 - 1911)은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후에 사임하였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후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그런데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며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 그 뒤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하면서 복직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주1에 고종이 파견한 밀사 이상설(李相卨) · 이준(李儁) 등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다. 보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양옥 대건물로 신축해 다시 개교할 때 유지로 남겼던 1,000루블의 거액이 기금으로 쓰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양기탁 흉상
양기탁(1871~1938)은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적극적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될 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선교사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었다. 1902년에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 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改革黨)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4년에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에 간섭하면서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보안회(輔安會) 운동에 참가했고, 보안회가 해산 당하자 이상설 이준 등과 함께 그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요구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7월에 영국인 베델(earnest thomas bethell)과 합작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 맡고, 총무를 양기탁이 맡았으나 실제로는 양기탁이 신문사를 총지휘하였다. 처음에는 1896년의 『독립신문』의 모범을 따라 1일 6면에 국문전용의 한글판과 영문판을 같이 수록하여 발간하다가, 1905년 8월 11일부터 국문판은 국한문혼용의 『大韓每日申報』로 바꾸고 영문판은 별도로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나누어 발행했으며, 뒤에 1907년 5월 7일부터 국문전용판으로서 『대한매일신보』를 역시 별도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공식적으로 사장이 외국인(영국인) 이었으므로 일제통감부의 「신문지법」에 의한 검열을 받지 않고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활용하여 양기탁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고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구했으며,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즉각 전재하고 영문판 『korea daily news』에도 영어로 번역 게재해서 세계에 알리었다. 특히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다른 신문들은 일제의 「신문지법」의 제약 때문에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거나 보도하는 경우에는 「폭도」라고 표현하여 비난하면서 보도하는 실정이었다. 오직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만이 「의병」이라고 당당하게 호칭하면서 이를 국권회복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까지 되어 이 시기의 모든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월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개설하여 그 총무를 맡았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양기탁을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는데 국채보상운동까지 전국화하므로 이를 탄압하기 위하여 그를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날조가 오래 갈 수는 없어서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이 법정에 서서 공소사실이 허위조작된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거를 들어 부인함으로써 결국 양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7년 4월에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회영(李會榮)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 갑(李甲) 유동열(柳東說) 최광옥(崔光玉) 노백린(盧伯麟) 조성환(曺成煥) 등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여 총감독을 맡았다. 신민회는 전국의 주도적 애국계몽운동가 800여명을 입회시키어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실질적으로 배후에서 모두 지도하고 발전시켰다. 신민회의 본부를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두고 전국적으로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하고 지휘하였다. 일제의 병탄이 가까워 오자 1909년 봄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개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최고전략으로서 독립전쟁전략(獨立戰爭戰略)을 채택함과 동시에 그의 실천을 위하여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고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하여 1910년 8월에는 자신이 직접 독립군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 이회영 등을 출발시키어 결국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제는 황해도에서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 모금사건이 일어나자 양기탁 등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또한 신민회를 탄압하고 해체하기 위하여 1911년 9월에는 신민회가 일제 총독 사내정의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다는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으며 양기탁에게는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양기탁 등은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하여 항소심에서 징역 6년을 확정 받고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1916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규합에 노력하다가 중국 천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어서 2년간의 유배(거주제한)에 처하여졌다. 1919년 3·1운동 후 1920년 4월에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자 언론계의 원로로서 유 근(柳 瑾)과 함께 그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오자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립요청서를 제출하여 다시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복역 중 어머니 인동 장씨의 별세로 일시 가출옥된 것을 이용하여 거듭 망명을 결행해서 만주로 갔다. 1923년에 편강렬(片康烈)·남 정(南正)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는데 의성단은 봉천(奉天)의 만철(滿鐵) 병원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長春線)일대에서 활약한 용감한 독립군 단체였다. 1925년 1월에는 김동삼(金東三) 등 동지들과 함께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匡正團), 대한군정서 등을 통합하여 독립군단체로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의 대표로서 소련에서 돌아 온 주진수(朱鎭洙), 천도교 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당수)이 되었다. 고려혁명당은 주로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국무령 또는 주석으로 몇 차례 추대되었으나 거절해 오다가 1933년 10월에 국무령(국무위원)에 취임하여 1935년 10월까지 2년간 임시정부의 대표로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 1938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고당암(古堂庵)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