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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집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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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이준(1859 - 1907)은 함경남도 북청(北靑)군 속후(俗厚)면 중산(中山)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를 거쳐 검사로서 관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에 가담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한국정부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에 가입하여 그 총무의 직책을 맡고 격렬한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보안회의 회장은 송수만(宋秀晩), 부회장은 원세성(元世性)이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로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였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은 이상설, 부회장은 이준, 총무는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은 이상재, 서무부장은 이동휘,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 위(許蔿) 등이었다. 대한협동회는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에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의 책임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준을 6개월의 유배형(流配刑)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귀양보내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이준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동지들인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김 구(金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을사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회 2회로 도끼를 메고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체포당하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하였다. 제1회의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고 다섯 명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대한문 앞에 몰려가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경찰이 출동하여 상소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이준 등은 가두연설을 하여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하면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탄압하고 이준 등 지도자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준은 1906년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이 목적을 전국 각 지방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하여 그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제의 완전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국왕이 조약체결의 전제권을 갖지 않고 의회가 이를 심의하고 동의케하는 제도로 개혁해야 함을 주장하여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헌정연구회가 확대개편되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덕기 이회영(李會榮) 박(朴)상궁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 고종에게 이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서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가 군사적 강압을 가하여 체결된 것으로 고종은 찬동한 바 없는 조약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종이 이에 동의했으므로 극비리에 밀사(密使)로서 정사(正使)에 이상설, 부사(副使)에 이 준과 이위종(李瑋鍾)이 임명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다. 이상설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고, 이위종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다. 이준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의 밀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가 출발하기 직전인 4월초에 양기탁과 안창호(安昌浩)가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에 가입했으나 곧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므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밀사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 받았다. 이준 등 세 밀사는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가 방해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밀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 또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밀사의 활동에 협조적이었던데 비하여,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준은 이에 분개하여 통탄하다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준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이준
한자명
李儁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59 ~ 1907
본적
함경남도 북청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의장(評議長)에 피선되고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반대운동을 하였으며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함 2. 1907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화란(和蘭) “해그”에서 개최케 되자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위임장과 조서를 가지고 가서 회의참석을 간청하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체결되었음을 설명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려고 하였음 3. 그러나 열국 위원(列國委員)들이 사정은 짐작하나 공식상 처리에 곤란하다 하여 3밀사(密使)에게 퇴장을 명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음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