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이범진, 이위종 집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1-1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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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이위종(1887 - 미상)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독립운동가이다.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에 있는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주재 공사에게는 철수령이 내렸으나,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은 2등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위종과 함께 철수하지 않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체류하였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있자, 서울에서는 이 회의에 한국대표를 참석시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하여 정사(正使)에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이 준(李儁)과 이위종 등 세 밀사를 임명하였다. 이준은 황제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이미 1년 전에 망명해 와 있는 이상설과 만나 합류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밀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1907년 6월 25일 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에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이위종이 교섭과 문서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열강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반면에 신문기자들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이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알리는 공고사(控告詞)를 이상설 이 준 이위종 등 세 특사의 연서로 작성하여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프랑스어로 된 이 장문의 공고사와 그 부속문서의 프랑스어 본은 이위종이 작성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위종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신문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會)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강연을 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회합에는 각국대표와 이름 있는 언론인 및 각국 수행원들까지 광범위하게 참석했는데, 이위종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서 의결하게 까지 하였다. 이위종의 이 강연의 성과는 당시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여론의 환기에 상당히 큰 작용을 하였다. 밀사들은 투숙한 호텔정문에 태극기를 걸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밀사 중의 이 준이 7월 14일 순국하였다. 이위종은 이상설을 따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순방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서 군정부(軍政府)와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는 등 구국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범진(1852 - 1911)은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후에 사임하였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후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그런데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며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 그 뒤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하면서 복직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주1에 고종이 파견한 밀사 이상설(李相卨) · 이준(李儁) 등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다. 보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양옥 대건물로 신축해 다시 개교할 때 유지로 남겼던 1,000루블의 거액이 기금으로 쓰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탐방로그

서울 중구 충무로1가 21-1 서울중앙우체국 광장 애국지사 이범진, 이위종 열사의 집터 안내판을 찾았다. 이범진 열사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였던 이위종의 부친이자 초대 주러시아 공사를 역임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이범진
한자명
李範晋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52 ~ 1911
본적
함경남도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구한국 정부의 법무대신 등 주요관직을 역임하고 1900년 주로공사(駐露公使)를 지내면서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에 온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을 도와 외교적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재로동포들의 민족교육에 힘쓰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自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위종
한자명
李瑋鍾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87 ~ 미상
본적
함경남도 미상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화란 “해그” 밀사(密使)로 갔으나 참석(參席)치못하고 미국협회(美國協會)(신문기자협회(新聞記者協會))밖에서 일본(日本)의 강압(强壓) 박해(迫害)함을 통론(痛論)하여 청중(聽衆)으로 하여금 비분(悲憤)을 금(禁)치 못하게 하였음.

이위종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