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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거 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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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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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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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나석주(1892 - 1926)는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그는 재령 명신학교(明新學校) 2학년을 수료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23세때 만주로 건너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27세때에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표면상 점포를 경영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한대홍(韓大弘)과 같이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 일경과 상월면장을 사살하였고 다시 안악군(安岳郡) 친일파(親日派) 부호를 사살한 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1920년 9월 22일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약하다가 하남성(河南省)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있으면서 보안육군강무당(保安陸軍講武堂)에 적을 두었으나 이때 봉직전(奉直戰)관계로 퇴학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1926년 4월 천진(天津)으로 가서 김창숙(金昌淑)과 상면하여 김창숙으로부터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조선은행(朝鮮銀行)·식산은행(殖産銀行) 등을 폭파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를 구해 달라는 권고를 받고 이를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여 지부이통환공사(芝 利通丸公司)의 역부로 가칭하고 천진(天津)에서 상선 융극호(戎克號)에 편승하여 위해위(威海衛)를 거쳐 이튿날 27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는 28일 오후 중국청년으로 변장하고 동척(東拓)으로 가서 회사의 상황을 정찰한 다음 그 길로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 일반 통용문으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앞에서 폭탄 한 개를 던졌다. 다시 오후 2시 동척(東拓)으로 가서 수위실 책상에서 무언가 쓰고 있던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자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따라 올라오던 사원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쓰러 뜨리고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장실로 들어가서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과 과장 능유풍(綾由豊) 등을 저격한 후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그는 다시 층계를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갔다. 정문에 들어서자 회사 수위 송본필일(松本筆一)과 마침 이곳에 왔던 천진당(天眞堂) 점원 김정열(金井悅)을 쏜 후 황금정(黃金町) 길거리로 발길을 옮길 때 경기도 경찰부(京畿道警察部) 경부 전전유차(田畑唯次)를 만나 그를 사살하였다.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은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권총 세발을 자신의 가슴에 쏘고 쓰러졌다. 일경은 그를 총독부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약간 정신이 되살아 나는 듯 하였다. 이때 일경이 그의 이름을 묻자 "나석주(羅錫疇)"라 대답하고, "김창숙(金昌淑)과 밀의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일경은 폭탄 두 개, 스페인제 10연발 권총 1정, 탄환 66발을 그 자리에서 압수하였다. 1927년 5월에 동지 이화익(李化翼)이 북경에서 붙잡혀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자 비로소 그의 의거가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다. 동월 31일에 그의 장남 응섭(應燮)이 상경하여 사진으로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유해를 인도받아 안장하였다. 응섭(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변성명한 후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상해의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서울 중구 을지로2가 181 지하철 2호선 2번 출구 외환은행 본점 옆 화단 나석주 의사 의거터를 찾았다. 나석주 의사 의거터 표지석과 동상이 함께 위치해 있었다.

인물정보

성명
나석주
한자명
羅錫疇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92 ~ 1926
본적
황해도 재령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재령(載寧) 명신학교(明信學校) 2년 수업(年修業) 후(後) 농사에 종사하다가 23세 때(歲時)에 간도(間島)로 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하고 27세에 귀국 황해도(黃海道) 겸이포(兼二浦)에서 상업을 경영하면서 적정(敵情)을 탐지함. 2. 29세 때(歲時)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 일어나매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자금을 조달하고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駐在所) 왜경(倭警) 및 상월면장(上月面長)을 총살하였으며 안악군(安岳郡) 모 부호(某富豪)를 사살한 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무국(警務局) 경호원(警護員)을 거쳐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대 장교로 복무함. 3. 1926년 4월 유림대표(儒林代表) 김창숙(金昌淑)의 말에 감동되어 은행 및 동척(東拓)의 파괴를 결심하고 4.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동척(東拓)에 가서 내외를 탐지한 후 식산은행(殖産銀行)으로 가서 대부계(貸付係) 철책에 투탄하고 다시 동척(東拓)으로 와서 수위실에 있던 조선부업협회 잡지기자(朝鮮副業協會雜誌記者)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였으며 또다시 이층으로 가서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 차석(技術課次席) 대삼태차랑(大森太次郞), 과장(課長) 능전풍(陵田豊) 및 사원(社員)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넘어뜨리고 5. 다시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가 수위 송본(松本)과 용산(龍山) 천진당 시계점원(堂時計店員) 금정열기(金井悅己)에 각각 1발을 쏘아 치명상을 입히고 황금정(黃金町)쪽으로 피해가다가 6. 경기도(京畿道) 경찰부(警察部) 전전유부(田畑唯夫)를 쏘아 즉사케 하니 마침내 그들은 기마대(騎馬隊)까지 동원하였다가 역전(力戰) 끝에 자결(自決)함 (향년 35세)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