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백범 광장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비석 | 동상·부조 | 안내판·표지석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164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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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곽낙원(1859 - 1939)은 김구의 어머니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곽낙원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살면서 지역과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되었다. 김구를 낳기 전까지 남편에 대한 애정도 삶의 희망도 별로 없이 김구를 공부시켜 출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동학에 입도하면서 곽낙원도 반일감정이 싹텄으며, 치하포사건으로 반일의식이 성장하였다. 치하포사건이란 김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고자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가 감옥에 있을 때 곽낙원은 남편 김순영(金淳永)과 함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 뒤 1911년에 김구가 신민회(新民會)에 연루되어 다시 15년형을 받자 구명운동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항일의식도 더욱 커졌다. 한편 곽낙원은 며느리 최준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김구를 따라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이에 평안도, 황해도 지역 기독교인들의 반일민족 사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곽낙원은 1922년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함께 지냈다. 그러나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곽낙원은 1925년 12월에 다시 안악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절약하여 김구에게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4년 3월 다시 손자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을 돌보는 등 고락을 함께하였다. 제때 식사를 잇지 못할 정도의 곤핍한 생활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끼고 생신축하금으로 단총 2정을 구입,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는 등 별세하기까지 김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청년들에게 “오늘 신문 읽었나? 왜놈이 또 어데까지 밀고 들어 왔나? 비행기 공습이 심하다지” 등 전황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때문에 청년들은 중일전쟁의 전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팔순 잔치 대신 총보다는 붓으로 일본과 싸우라는 의미에서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언제나 독립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곽낙원은 언제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임시정부내에서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손자를 고아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울 때는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으나, 독립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며, 김구와 임정의 독립운동을 한결 같이 지지, 격려하였다. 노년에는 항상 구국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어려운 일상을 이겨나갔다. 1939년 4월 26일 평생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인물정보

성명
곽낙원
한자명
郭樂園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59 ~ 1939
본적
황해도 재령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1.7.22 신민회(新民會)에서 중국(中國) 동삼성내(東三省內)에 독립기지(獨立基地) 창설(創設)을 위한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 계획(獨立運動計劃)을 추진(推進)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5년을 받은「아들」김구(金九)를 면회(面會)하면서 조금도 슬픈 기색(氣色)없이 위로(慰勞)하고 1922년에는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조석(朝夕)의 「끼니」가 어려울때 이겨내고 생신 축하금(生辰祝賀金)으로 단총(短銃) 2정(珽)을 구입(購入)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쓰도록 제공(提供)하면서 1922년부터 1939년 4월 26일 사망시(死亡時)까지 아들 김구(金九)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지원(支援)하고 부도(婦道)의 귀감(龜鑑)으로서의 활동사실이 확인됨.

곽낙원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구
한자명
金九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6 ~ 1949
본적
황해도 벽성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세(歲)에 동학당(東學黨)에 가입하여 해주 동학군(海州東學軍)의 선봉이 되었으니 당시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음 2. 해주(海州) 죽산장(竹山場)에서 총군(銃軍) 7백명(百名)을 거느리고 해주(海州)를 습격하려다 실패함. 3. 1896년 2월에 안악 치하포여점(安岳鴟河浦旅店)에서 왜 육군중위(倭陸軍中尉)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참살, 동년 5월에 피체되어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됨. 4. 1898년 3월 탈옥하여 삼남 각지(三南各地)를 방랑하여 공주 마곡사(公州麻谷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익년 귀향 하속 하였음. 5. 그 후 고향에서, 교육에 종사하다가 1909년 11월 이등저격사건(伊藤狙擊事件)의 혐의로 해주(海州)에 투옥됨. 6. 1910년 서울 양기탁가(梁起鐸家)에서 신민회 중요간부회의(新民會重要幹部會議)를 개최하여 남만(南滿)에 무관학교설립(武官學校設立)을 의결하고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으로 피검되어 17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7월에 출옥함. 7. 3.1 운동(運動) 후 상해(上海)로 탈출하여 임정경무국장(臨政警務局長)에 취임(就任)하고 1923년 임정내무총장(臨政內務總長) 1927년에 국무령(國務領)에 취임(就任)함. 8.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을 시켜 왜황(倭皇)을 저격(狙擊)케하고 동년 4월 윤봉길(尹奉吉)을 시켜 상해(上海)에서 왜장(倭將) 백천의칙(白川義則) 등에 폭탄을 투척토록 함. 9. 장개석(蔣介石)과 만나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한인무관양성(韓人武官養成)의 특설반(特設班)을 설치할 것을 약속하고 사관 백명을 양성함 10.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정 주석(臨政主席)에 취임후 서안(西安)에 광복군(光復軍)을 설치(設置)하고 훈육(訓育)시켰으며 입국 항전(入國抗戰)을 계획중 1945년 11월 15일에 귀국하였음 11. 1948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음 향년 73세(歲)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