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불꽃 및 흉상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외곽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 6월 20일 개관한 시설이며 전국에서 세번째로 건립된 독립운동기념관이다.
조형물은 중앙에 놓인 선열의 불꽃탑을 중심으로 밀양출신 독립지사 36분의 흉상이 둥글게 둘러싼 모습인데 선열들의 '조국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아 조성한 것이다. 흉상에 새겨진 애국지사들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애족장 이상의 서훈자 서른여덟 분 중 서른네분(손경헌,손봉현,오학성,백운하 제외)과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 을강 전홍표,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서른 여섯 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36분의 존함은 가나다 순으로 강인수선생, 고인덕선생, 김대지선생, 김명규선생, 김병환선생, 김상윤선생, 김성두선생, 김성수선생, 김영복선생, 김원봉선생, 김홍규선생, 권잠술선생, 박지원선생, 손일민선생, 손호선생, 손봉현선생, 신석원선생, 윤창선선생, 이상관선생 ,윤세복선생, 윤세용선생, 윤세주선생, 윤치형선생, 이병철선생, 이언권선생, 이찰수선생, 임굉(임병찬)선생, 전홍표선생, 조우식선생, 최수봉선생, 한봉근선생, 한봉삼선생, 한봉인선생, 홍재문선생, 황문익선생, 황상규선생이시다.
탐방로그
독립기념관 건물 내부는 추모공간과 전시공간이 마련되어있으며 전시 공간은 크게 6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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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199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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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中國軍將校)로서 활동하였으며 광복군 창군요원(光復軍創軍要員)으로 입대하여 광복군 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에서 활약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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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192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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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8년 만주(滿洲)로 망명, 길림(吉林), 상해(上海) 등지에서 광복을 도모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후 구입한 폭탄을 가지고 밀양(密陽)으로 들어와 거사 전에 피체(被逮)되어 폭탄 모의 사건(爆彈謀議事件)으로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3년 복역 중 1920년 가출옥, 이후 가옥을 방매(放賣)하여 삼천원을 군자금으로 해외에 송부(送付)하고, 1925년 10월 재거(再擧)하려다가 이종암(李鍾岩)이 피체(被逮)되는 바람에 연루(連累) 피체(被逮)되어 대구옥(大邱獄)에서 복역 중 1926년 12월 21일 옥중(獄中)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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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1965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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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0년 음력 10월경 경남(慶南) 밀양(密陽)에서 홍재문(洪在文), 김덕곤(金德坤)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7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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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194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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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8년 이래(以來) 만주(滿洲)에서 비밀결사 모의 활동하다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옥고(獄苦) 후 중국에 가서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임(被任)되었으며 의열단(義烈團) 간부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
1893 ~
1977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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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년 4월 17일 동래고보(東萊高普) 독립만세 주동자로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6월형 3년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계속 항일투쟁사 황상규(黃尙奎)(백민(白民))와 연락 길림무관학교(吉林武官學校) 설립기금 3천엔을 창녕(昌寧) 하경석(河慶錫)에게 강요 150엔을 강탈하여 황상규(黃尙奎)에게 전달 도중 경성(京城)에서 체포되어 1920년 12월 2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받고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
1889 ~
1947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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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3.13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밀양(密陽)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윤세주(尹世胄) 윤치형(尹致衡) 등과 주동하여 수천명의 시위군중을 모아 시위하고 그 다음날인 3.14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생(密陽公立普通學校生) 160명이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선도하다가 피체되어 징역6월을 받았으며 1920.5월에는 의열단(義烈團)에서 조선총독부 고관과 친일조선인을 주살(誅殺)하고 독립을 성취할 목적으로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였을 때 자가(自家)에 보관하고 있다가 피체되어 징역3년을 받았으며 1925.11월 의열단원(義烈團員) 양건호(梁健浩)(이종암(李鍾岩))이 대구은행에서 군자금으로 1만여원을 탈취한 것이 약 10년후에 피체됨에 연루자(連累者)로 검거되어 10월25일만에 면소(免訴) 출옥(出獄)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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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1927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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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 1919. 11. 9 김원봉(金元鳳)등 13명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義烈團) 조직(組織)함. 2. 1920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密陽警察署爆破事件) 가담(加擔) 후(後) 상해(上海)로 망명(亡命), 임정(臨政) 가담(加擔) 활동(活動)함. 3. 1927. 10. 19 상해(上海)에서 활약(活躍) 중 사인불명(死因不明)으로 사망(死亡), 복건성(福建省)에 묘비(墓碑)있음.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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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195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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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 정위(正尉)로 경상남도(慶尙南道) 소모관(召募官)을 역임하였으며 일시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국내에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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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196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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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년 중국망명 후 의열단(義烈團) 및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등 혁명단체원(革命團体員)으로 주화일본공사 등 거물급 일제 요인 폭살계획에 관련된 외에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38년 18년형을 받어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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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1993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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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44년 2월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학생(學生)으로 징역 2년 6월의 언도(言渡)를 받고 복역(服役) 중(中) 해방(解放)으로 출옥(出獄)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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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1908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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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성
1907.8.8 전남(全南) 영광(靈光)에서 김용구(金容球)가 거의(擧義)하니 입진(入陣)하고 일군(日軍)과 전투하다가 탄환이 절핍(絶乏)되어 후퇴하고 장성군(長城郡) 황룡산(黃龍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적군(敵軍)과 교전하다 전사(戰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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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
1951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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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7년 음력(陰曆) 9월 윤창선(尹昌善), 손봉현(孫鳳鉉), 손호(孫滸) 등과 함께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만주(滿洲)의 신민부(新民府)에 군자금(軍資金)을 제공하기 위해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 사연리(泗淵里)의 부호 김태진(金泰鎭)의 장남인 김용출(金龍出)을 해원교(解怨敎) 교주(敎主)와 만나게 해주겠다며 유괴하여 김태진에게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2차례에 걸쳐 3000원을 받아내는 등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28년 일경(日警)에 의해 체포(逮捕)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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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196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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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년 군자금(軍資金)을 모집(募集)하다 피체(被逮)되어 7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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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
196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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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7년 11월 윤창선(尹昌善)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에 군자금(軍資金)을 제공하기 위해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 사연리(泗淵里)에서 처남 김용출(金龍出)을 해원교(解怨敎) 교주(敎主)와 만나게 해주겠다며 장인 김태진(金泰鎭)에게 2차례에 걸쳐 3000원을 받아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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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1940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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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8.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에서 39인의 서명으로 독립선언을 발포(發布)할 때 그 중 1인으로 활동하고 1937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상임위원(常任委員)으로 피선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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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193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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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7. 4월 신민부(新民府) 위원장(委員長) 김좌진(金佐鎭)의 지령(指令)을 받고 신민부(新民府) 공작원(工作員) 신현규(申鉉圭), 손봉현(孫鳳鉉), 윤창선(尹昌善)과 권총(拳銃), 폭탄(爆彈)을 가지고 대구지방(大邱地方)에서 일제 고관(日帝高官) 및 친일분자(親日分子) 암살(暗殺), 주요 시설(主要施設) 폭파(爆破), 군자금(軍資金) 모집(募集) 등을 위하여 활약(活躍)하다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징역 10년형(年刑)을 언도(言渡)받아 복역(服役)하다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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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195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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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4년 음(陰) 3월 경상남도(慶尙南道) 밀양군(密陽郡) 하남면(下南面)에서 김찬규(金燦奎)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독립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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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
1960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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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 대종교(大倧敎) 제3교주(第三敎主)로서 독립운동자(獨立運動者) 2. 대종교(大倧敎)를 창설한 홍암대종사(弘岩大宗師) 나철(羅喆)이 한일합병후(韓日合倂後) 일제의 폭정에 통분(痛憤)하여 1916년 9월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유서를 남기고 절명하자 1942년 일본경찰이 만주 동경성(滿洲東京省)에 있는 대종교 교본부(大倧敎敎本部)를 습격 윤세부(尹世復) 이하 25명을 체포 투옥(逮捕投獄) 옥중 해방후(獄中解放後) 출옥(出獄) 귀국(歸國)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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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
1940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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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 국치 후(國恥後) 수만의 가재(家財)를 정리하여 남만(南滿)에 망명 동창학교(學校)를 설립 청년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 혁명지사와 연결하여 조국의 광복을 도모 2. 임정 요인(臨政要人)들에게 자금제공 3. 1926년 육군주만참의부장(陸軍駐滿參議副長)으로 시국 수습(時局收拾)에 노력하다가 1941년 2월 12일 북만(北滿)에서 병서(病逝)
- 생몰년도
-
1901 ~
194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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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년 밀양(密陽)에서 3.1운동(運動)을 주도(主導)한 후(后)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組織)하였으며 요인 암살용(要人暗殺用) 폭탄(爆彈)을 반입(搬入)하다 체포(逮捕)되여 징역 7년형(年刑)을 받고 중국(中國)으로 망명(亡命)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을 조직(組織)하여 무력(武力)으로 항쟁(抗爭)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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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197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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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7년 음력(陰曆) 9월 손봉현(孫鳳鉉), 손호(孫滸) 등과 함께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만주(滿洲)의 신민부(新民府)에 군자금(軍資金)을 제공하기 위해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 사연리(泗淵里)의 부호 김태진(金泰鎭)의 장남인 김용출(金龍出)을 해원교(解怨敎) 교주(敎主)와 만나게 해주겠다며 유괴하여 김태진에게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2차례에 걸쳐 3,000원을 받아내는 등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28년 7월 30일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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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1970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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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 3.1운동사건으로 부산지법(釜山地法)에서 1년 6월 징역, 1921. 6. 21에는 밀양(密陽) 폭탄 사건(爆彈事件)으로 경성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확정(確定))받음.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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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1925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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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 11월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직된 조선독립의열단(朝鮮獨立義烈團)의 단원(團員)으로 길림성 안동현(吉林省安東縣)에서 원보상회(元寶商會)라는 미곡상을 운영하며 동상회를 연락기점으로 삼아 1920년초(年初) 곽재기(郭在驥), 이성우(李成宇)등이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구입한 폭탄 16개, 권총 2정 탄원 100여발 중 폭탄 3개를 원보상회(元寶商會)를 통하여 경남(慶南) 밀양(密陽)에 거주하는 김환(金煥)에게 송부하였으며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義烈團)에 대해 재정조달(財政調達), 단원(團員)들의피신(避身), 은닉(隱匿) 및 국내 출입 안내(國內出入案內) 무기 반입(武器搬入)을 지원하는 등 활동(活動)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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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193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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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5년 중국(中國)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 남구 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고 1935년부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1월 체포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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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2008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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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43.10월 일제(日帝)에게 징집되어 중지파견 남경지구(中支派遣南京地區)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중국(中國)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탈출을 기도하다 성공하여 중국군(中國軍) 유격대(遊擊隊)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1945.4월 광복군 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토교대(土橋隊)에 편입되어 광복(光復)에 이르기 까지 4월간 복무하였으나 탈출시기와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확인됨.
-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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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찰수
- 한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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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刹修
- 운동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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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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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
1968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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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년 4월 4일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 태룡동(台龍洞) 시장(市場)에서 군중 1500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를 외치고 동소의 헌병주재소에 투석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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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1950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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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41년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 재학 중 장세파(張世嶓), 이태길(李泰吉), 최낙철(崔洛哲) 등의 급우들과 함께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고 교육부(敎育部) 책임을 맡아 장래 교원(敎員)으로 진출하면 우수한 학생들을 양성하여 조국 독립에 대비토록 할 것을 계획하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4년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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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
192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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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0년대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소재 사립(私立) 동화중학교(同化中學校) 교장(校長)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1921년 7월경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로 사형 순국한 최경학(崔敬鶴)의 시신을 인수한 후 최경학의 령(靈)을 위한 부의금(賻儀金)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음.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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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200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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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43년 경남학생건국회(慶南學生建國會)를 조직하여 마산(馬山) 진해지구(鎭海地區) 일 해군시설(日海軍施設) 및 배치도(配置圖) 등을 탐지(探知)하여 연합군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피포(被捕)되여 징역 단기(懲役短期)2년 장기(長期)4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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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
1921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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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20년 11월 밀양경찰서(密陽警察署)를 폭파한 후 피체 대구감옥(大邱監獄)에서 사형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355,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215)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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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
1927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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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9.11월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하고 동지들과 국내에 입국하여 일본관청과 요인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수차에 걸쳐 폭탄과 무기를 반입하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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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1933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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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31년 8월 경남(慶南) 밀양(密陽)에서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란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組織)하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았고, 출옥 직후인 동년 12월 밀양노동조합의 지도위원회(指導委員會)를 조직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고 일본의 타도를 촉구하는 문서의 작성과 배포에 간여하였다가 1932년 경 체포되어 동년 12월 징역 1년 6월을 받고, 징역 10월에 대한 형(刑)의 집행유예(執行猶豫)도 취소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고(獄苦)로 인한 질병(疾病)으로 집행정지(執行停止)되어 가택에서 요양하다가 1933. 8. 6 사망(死亡)한 사실이 확인(確認)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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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1968
- 본적
-
경상남도 밀양
1919년 이후 의열단(義烈團)에 참가하여 군자금모집과 밀양경찰서 폭파 및 무기 반입 등에 협력한 사실이 확인됨.
- 성명
-
홍재문
- 한자명
-
洪在文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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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1958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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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3.1운동에 참여하여 학생과 시민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립신문(獨立新聞) 발행 계획과 군자금모집 등의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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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
1953
- 본적
-
경상남도 밀양
1920.11월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 군정서 부속 흥업단(軍政署附屬興業團)의 군자금 20만원을 모금할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경남(慶南),북(北)을 본처로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에 2년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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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1931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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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를 조직활동 1919년 4월경 유동열 휘하(柳東說揮下)의 조선독립군정사 회계과장(朝鮮獨立軍政司會計課長)을 역임. 1920년 6월경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동지들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 상해 임정(上海臨政)에 참가하여 재정부원(財政部員)이 되어 군자금모집에 주력하여 동척 창녕지방 소작료(東拓昌寧地方小作料) 1년분을 매각하여 상해로 보내는 등 활발히 활동 의열단의 곽재기(郭在驥), 김재수(金在洙)등과 모의하고 조선총독부 폭파(朝鮮總督府爆破)를 계획타 발각되어 1921. 6. 29 피체(被逮)(동아일보(東亞日報) 1921. 3. 5, 1921. 6. 22,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214. 310)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