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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념광장

유형
조형물 | 안내판·표지석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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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서울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조선 후기 정조의 맏아들로 세자 책봉까지 받았으나 1786년 다섯 살의 나이로 서거한 문효세자를 비롯하여 왕족들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던 자리이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불법으로 주둔하면서 훼손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골프장이 들어서는 등 공원화되었다. 1940년에 조선총독부가 공원으로 고시한 이후, 1944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충령탑 설립을 명목으로 조선조 왕실 무덤을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창공원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깊은 뜻으로 독립선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어 오늘날의 효창공원에 이르고 있다. 효창공원은 김구 선생의 묘소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인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의 묘소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소,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유서깊은 공원이다. 광복70주년 기념광장은 광복70주년을 맞이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의미있는 10개의 태극기를 포함한 태극조형물을 설치하고, 우리 겨례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무궁화 70주를 식지하여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며 광복 70주년 기념광장을 조성한 것이다.

인물정보

성명
김구
한자명
金九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6 ~ 1949
본적
황해도 벽성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세(歲)에 동학당(東學黨)에 가입하여 해주 동학군(海州東學軍)의 선봉이 되었으니 당시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음 2. 해주(海州) 죽산장(竹山場)에서 총군(銃軍) 7백명(百名)을 거느리고 해주(海州)를 습격하려다 실패함. 3. 1896년 2월에 안악 치하포여점(安岳鴟河浦旅店)에서 왜 육군중위(倭陸軍中尉)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참살, 동년 5월에 피체되어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됨. 4. 1898년 3월 탈옥하여 삼남 각지(三南各地)를 방랑하여 공주 마곡사(公州麻谷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익년 귀향 하속 하였음. 5. 그 후 고향에서, 교육에 종사하다가 1909년 11월 이등저격사건(伊藤狙擊事件)의 혐의로 해주(海州)에 투옥됨. 6. 1910년 서울 양기탁가(梁起鐸家)에서 신민회 중요간부회의(新民會重要幹部會議)를 개최하여 남만(南滿)에 무관학교설립(武官學校設立)을 의결하고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으로 피검되어 17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7월에 출옥함. 7. 3.1 운동(運動) 후 상해(上海)로 탈출하여 임정경무국장(臨政警務局長)에 취임(就任)하고 1923년 임정내무총장(臨政內務總長) 1927년에 국무령(國務領)에 취임(就任)함. 8.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을 시켜 왜황(倭皇)을 저격(狙擊)케하고 동년 4월 윤봉길(尹奉吉)을 시켜 상해(上海)에서 왜장(倭將) 백천의칙(白川義則) 등에 폭탄을 투척토록 함. 9. 장개석(蔣介石)과 만나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한인무관양성(韓人武官養成)의 특설반(特設班)을 설치할 것을 약속하고 사관 백명을 양성함 10.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정 주석(臨政主席)에 취임후 서안(西安)에 광복군(光復軍)을 설치(設置)하고 훈육(訓育)시켰으며 입국 항전(入國抗戰)을 계획중 1945년 11월 15일에 귀국하였음 11. 1948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음 향년 73세(歲)

인물정보

성명
백정기
한자명
白貞基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6 ~ 1934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919년 3.1운동(運動)에 참가 후(參加後) 만주봉천방면으로 망명하였으나 독립운동 자금 조달(獨立運動資金調達)을 위하여 수차(數次) 잠입하여 활약(活躍) 1922년 북경으로 망명(亡命)하여 그곳에다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근거를 삼아 국내외동지들과 긴밀(緊密)한 연락을 취(取)하였음. 1928년 9월 중국 남경(中國南京)에서 개최(開催)된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大會)에 한국 대표(韓國代表)로 참석(參席) 1933년 3월 당시(當時) 일본 주화대사(日本駐華大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상해 홍구(上海虹口)에 있는 육삼정(六三亭)(일본 요정(日本料亭))에서 일본정객(日本政客) 참모부원(參謀部員)들을 위시(爲始)한 친일 중국 정객(親日中國政客) 및 군인 100여명(軍人百余名)을 초대 회합(招待會合)을 가진다는 것을 탐지(探知)하고 이들을 일시(一時)에 몰살(沒殺)시키려고 수류탄(手榴彈) 등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거사전야(擧事前夜)에 발각(發覺)되어 불의(不意)에 왜 관헌(倭官憲)의 역습(逆襲)을 받아 체포(逮捕)되었으며 일본(日本) 장기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無期刑)을 받고 복역(服役) 중(中) 옥사(獄死)(이상(以上)은 공적서(功績書) 이외(以外)에 동아일보(東亞日報) 1933. 7. 12와 동국혈사(東國血史) 119혈(頁),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242~245혈(頁), 321혈(頁)에 의한 것임)

인물정보

성명
안중근
한자명
安重根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79 ~ 1910
본적
황해도 신천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의병(義兵) 3백명을 양성하여 두만강(豆滿江)부근에서 왜적(倭敵)과 싸움 2.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驛頭)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고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형당하였음 향년 33세

인물정보

성명
윤봉길
한자명
尹奉吉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908 ~ 1932
본적
충청남도 예산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세 때(歲時)부터 야학을 경영함 2. 1931년 2월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모직공장직공 세탁소외교원을 거쳐 김구(金九)를 만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함 3. 1932년 4월 29일 왜황(倭皇)의 천장절(天長節)을 기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하회가 상해 홍구공원(上海虹口公園)에서 개최됨을 듣고 일본시민차림으로 오전 11시 40분 식대(式台)정면에 투탄하여 왜 거류민단장(倭居留民團長) 하서(河瑞)가 즉사했고 최고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은 5월 26일에 죽고 제3함대사령관(艦隊司令官)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은 한쪽 눈이 상실되고 제9사단장(師團長) 식전겸길(植田謙吉)은 다리가 절단되고 공사(公使) 중광규(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지고 촌정우야 민단서기 외(村井友野民團書記外)에 왜 부녀자(倭婦女子) 수명이 부상하였음 4. 윤의사(尹義士)는 왜 헌병(倭憲兵)에 피체되어 일본 대판(日本大阪)으로 이송되고 12월 9일 대판위수형무소(大阪衛戍刑務所)에서 취의(就義)하였음 향년 24재(才)

인물정보

성명
이동녕
한자명
李東寧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69 ~ 1940
본적
충청남도 천안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에 이상설(李相卨) 정순만(鄭淳萬) 등과 같이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設立)하고 청소년 교육(靑少年敎育)에 힘을 썼음 2. 1907년 귀국(歸國)하여 안창호(安昌浩) 이회영(李會榮) 김구(金九) 이동휘(李東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組織)하고 활약(活躍) 3. 1910년 솔선(率先)하여 서간도(西間島)로 옮겨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設立) 4. 1913년 남만(南滿)에서 청년운동(靑年運動)을 하다가 해삼위(海蔘威)로 가서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음 5.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장(議長),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총리(國務總理), 국무위원(國務委員) 겸(兼) 주석(主席)을 역임(歷任)

인물정보

성명
이봉창
한자명
李奉昌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901 ~ 1932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0세에 용산(龍山) 문창보통학교 입학(文昌普通學校入學) 4년 후(後) 필학(畢學)하고 2. 1922년에 도일(渡日)하여 목하창장(木下昌藏)으로 변성명(變姓名)하여 왜정(倭情)을 탐지(探知)하고 1931년 1월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정 주석(臨政主席) 김구(金九)의 지도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한 후 왜황 격살(倭皇擊殺)을 선서(宣誓)하고 동년(同年) 12월 17일에 폭탄을 휴대(携帶)하고 도일(渡日), 익년 1월 8일 동경에 있는 좌좌목련병장(佐佐木練兵場)에서 만주(滿洲)의 괴뢰왕인 부의(賻儀)와 친병식(親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는 왜황(倭皇) 유인(裕仁)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실패(失敗)함에 의사는 태연히 공중(公衆) 앞에 태극기(太極旗)를 내어들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조용히 포박(捕縛)되어 ※동년(同年) 9월 동경대심원(東京大審院)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3. 동년(同年)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의 형장(刑場)에서 사형(死刑)을 집행 당(執行當)함. 향년 33세

인물정보

성명
조성환
한자명
曺成煥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75 ~ 1948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12년 일본총리 계태랑(桂太郞)이 만주행(滿洲行) 기회를 이용하여 자살하려다 발각되어 거제도(巨濟島)에 1년간 유형(流刑) 당하였음 2. 1919년 도만(渡滿)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사부장(軍事部長), 대한독립군 외교부장(大韓獨立軍外交部長), 신민회 외교위원장(新民會外交委員長) 등의 직책으로 활약하였고 곧 상해(上海)로 가서 임정 국무위원(臨政國務委員) 겸 최고통수부(最高統帥部)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8년간 활약하였음 3. 1940년에 서안(西安)에 가서 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닦음 4. 8.15 광복 후 귀국하여 1948년 10월에 병(病)으로 낙산장(駱山莊)에서 작고하였음

인물정보

성명
차이석
한자명
車利錫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81 ~ 1945
본적
평안북도 선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청년시대부터 신민회원(新民會員)으로 광복운동에 활동함 2. 1911년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사건으로 피체되어 3년간 복역함 3. 3.1운동 후 상해(上海)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간부, 임시의정원의원(臨時議政院議員)을 각각 역임함 4. 193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臨時政府國務委員)으로 선임되어 이후 13년간 비서장으로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병서(病逝)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