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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동상
강우규(1855-1920)의 자는 찬구, 호는 왈우, 이명은 강영일이며,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현 지부장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투탄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신민회 간부로서 함경도를 돌며 기독교 선교와 학교 설립 운동을 벌이던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후 영명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가족들을 러시아로 이주시켰다. 1911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두도구에 터를 잡고 만주와 러시아 옌하이저우〔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순회하였다. 1915년경에는 지린성 라오허현〔饒河縣〕으로 거처를 옮겨 100여 호의 마을을 조성하고 신흥동이라 명명하였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3 · 1운동 소식을 접하고 신흥동 동포 400~50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갔다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처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를 구입하였다. 1919년 6월 14일 수류탄 한 개를 품고 에치고마루라〔越後丸〕라는 일본 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왔다. 서울로는 8월 5일에 상경하였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났다. 그가 부임하는 날짜는 9월 2일이었다. 그 소식에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들여다보며 얼굴을 익혔다. 8월 26일에는 남대문역 부근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기고 매일 역 주변을 답사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1919년 9월 2일 명주 수건에 폭탄을 싸서 허리에 묶고 남대문역으로 향하였다. 오후 5시, 사이토 총독 일행이 탄 기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환영 행사를 마친 사이토가 미리 준비된 마차를 타려는 순간, 사이토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터졌다. 사이토는 혁대에 파편 몇 조각이 박혔을 뿐이었고 수류탄의 위력에 신문기자, 경찰 등 37명이 다쳤다. 그중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으나 보름 후인 9월 17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인 김태석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2월 경성지방법원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4월에 경성고등법원이 기각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5월에 경성고등법원이 기각하면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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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묘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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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로 광장 기념벽화
인동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3·16·27일, 4월 1일 네 차례에 걸쳐 대전면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대전 인동시장은 대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 시장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산물을 주로 거래한 장소이다. 인동시장에서는 1919년 3월 3일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쳤으며, 3월 16일에는 양사길·장운심·권학도 등의 주도 하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어 원동 일대까지 확산되었다. 3월 27일에는 김정철·김창규·김현태·조상련·윤명화·박종호·김성현·소홍규·김완봉·김완수 등이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직원·박종병 등이 주도하여 4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는 등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완봉(1899~1955), 김완수(1896~1972), 김정철(1900~1966), 김직원(1897~1933), 김창규(1885~1949), 박종병(1889~1971), 박종호(1890~1967), 소홍규(1882~1960), 윤명화(1879~미상), 조상련(1886~1970)은 1919년 3월 27일 대전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창규는 김정철로부터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독립신문」 등 3백여 매를 전달받고, 김완수는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일 오후 3시, 이들은 4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미리 준비해 간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였다. 하지만 시위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김완봉, 김정철, 박종호, 소홍규, 조상련은 징역 1년, 김완수는 징역 8월, 김직원과 박종병은 징역 10월, 김창규와 윤명화는 1년 6월을 선고받는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김정철, 김직원, 김창규, 박종병, 소홍규, 조상련에게, 1993년에 박종호에게, 1995년에 김완봉에게, 2009년에 윤명화에게 추서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1982년 김창규에게, 1983년 김정철에게, 1986년 소홍규와 조상련에게, 2020년 김완수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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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창학교(육영학교) 터
보창학교는 강화 대대장으로 있던 이동휘(李東揮)가 1904년 8월 강화도에 설립한 육영학교(育英學校)의 개명한 이름이다. 1905년 5월고종 황제가 보창학교라는 교명(보창은 넓게(普) 퍼지고 번창하라(昌)는 뜻이다. 여기엔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던 고종황제의 열망이 담겨있다.)을 내려 개명하였고, 내탕금 600을 하사 받았다. 보창학교는 이동휘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운영하였고 김성은을 교감으로 삼았으며 군영의 일부였던 강화읍 진무영 동영(東營)자리에 건립하였다. 군인과 일반인의 자제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였다. 교육과정으로는 소학보통과와 일어·영어과의 과정이 개설되고, 입학자격은 소학보통과는 신체 건강하고 정신에 결함이 없는 자로 8세 이상 16세 이하인 청소년으로 하고, 일어·영어과는 16세 이상 20세 이하인 자로 한문·국문·작문·습자에 능한 자로 하였다. 이동휘는 일본에 의해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방법으로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동휘의 보창학교 군사훈련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많은 애국지사들은 군사훈련의 필요성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유지자들은 군악기와 소총 다수를 구입하여 각 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1905년 3월에는 민영환(閔泳煥) 등 13명의 군인과 중추원 부의장 이근호(李根皓), 평리원장 민경식(閔京植) 등 당시의 고관과 명사들이 찬성금을 육영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러나 보창학교는 1907년 여름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진위대 영사 자리였던 열무당으로 이동했다가 1908년 2월에 다시 재건되었다. 이후 보창학교를 주축으로 한 강화지역 의무교육안이 마련되었고, 보창학교는 사범속성과와 중학과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1910년까지 강화지역 교육을 선도하였다. 하지만 1910년 병탄 이후에 재정난을 겪다가 1911년 구 이아(貳衙) 건물로 이전하였으나 결국 1915년에 문을 닫게 된다. 모두 현재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멸실되었다가 2022년 9월 7일 보창학교 터였던 강화교육지원청 미래교육지원센터에 그 설립 의의를 기리기 위한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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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묘
조용한(1894 - 1935)은 1920년 음력 12월 20일경 김홍제(金鴻濟)·오인영(吳麟泳)과 함께 독립군자금을 모집한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완구용 권총 한자루를 구입한 다음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명의의 인장을 조각하여 군자금 영수증서를 작성하고 수원(水原)·안성(安城)·진위(振威) 등지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오인영을 방문하러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1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및 강도예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동년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8년 5월 중국 상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총장인 친형 조용은(趙鏞殷)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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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고주리 참살현장 입구 안내판
제암리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堤岩里)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절정에 달하였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發安里)의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에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사망하였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도 불에 탔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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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제주 지역 항일 독립 운동의 역사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다. 제주 지역 항일 독립 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나아가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 애향 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미밋동산인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공원 내에 위치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제1전시실·제2전시실·영상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전시실에는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1876~1945년의 항일 운동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항일운동연표, 일제 침탈과 기구의 개편, 송죽매의 결의, 지식층의 성장과 민족교육, 제주도 항일운동 발생지역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의병운동, 제주인의 항일운동 부조(浮彫), 일제의 강제 침략과 항일 운동 관련 사진 그래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3·1운동 전국상황도, 전국 3·1운동의 실체, 조천만세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백응선 비석, 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운동, 옥중생활사, 항일학생운동, 항일청년운동, 해녀항일운동의 매직비전과 패널, 종합그래픽, 제주인의 국외 항일 운동, 항복문서 조인식 모형, 백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관에서는 「제주의 빛」과 「세계 속의 낙원 북제주군」이라는 영상물이 30분가량 상영된다. 3·1운동 당시 제주 지역에서 맨 처음 만세운동이 시작된 제주항일기념관 앞 만세동산에는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소장 자료로는 항일 운동 관련 기록문서 110여 점, 독립 운동가 사진 170여 점, 국제한국연구원 기탁 자료 10여 점, 「일본군의 최후」 영상 필름 1점,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가 제공한 사진 자료 1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 70여 점, 훈장 4점, 기타 기증 자료 97점 등 총 6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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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전(부림전) 기념비
부림전(1920-1977)의 이명은 부두전이고,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일본에 있는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에 재학 중 1940년 5월 김봉각(金奉珏)·강금종(姜金鍾)·김병목(金丙穆) 등과 함께 흥아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흥아연구회는 1940년 5월 26일 계림동지회라고 개칭되었고, 부림전은 세계 동향 연구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계림동지회는 비밀은 누설하지 말 것, 반드시 출석하되 시간 엄수할 것, 회의는 반드시 한국말로 할 것, 행동을 삼가며 주색(酒色)에 빠지지 말 것, 동지의 영입은 김봉각·강금종·김병목·고봉조(高奉朝)·한만숙(韓滿淑)·부림전 등 6명의 전원 합의에 의해서 결정할 것, 회의 결과는 기록에 남기지 말 것, 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로 하되 장소 기타에 관한 것은 김봉각의 지령에 따를 것 등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계림동지회는 지식층을 포섭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연구하게 하고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 관계자를 회원으로 포섭하는 등 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부림전과 동지들은 1941년 2월 26일 체포되어 1942년 10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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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기념관
일제강점기 때 독립지사이자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세운 단재 영각을 중심으로 기념관, 묘소로 이루어진 곳이다. 단재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앞마루를 놓았다. 영각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정기문’이라는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사당이 있는 고드미마을은 미원장이나 내수장에 나무를 내다 파는 고드미장꾼들로 이름난 곳이다. 신채호 선생이 1887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가이자 교육자, 문학가,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은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초빙되는 등 일찍이 자주독립사상에 눈을 뜨고 ‘조선상고가’ 등의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한 역사가이자 1901년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신교육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교육자이다.아울러 우리 민족의 기상을 노래한 중편소설 「꿈하늘」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쓴 문학가이자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만들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단재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로 묘역에는 한용운 선생이 세운 묘표석과 사적비, 그리고 신채호 선생의 시 ‘하늘북’을 새긴 시비, 신채호 선생과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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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 팔의사 묘역
삼진 팔의사 묘는 삼진의거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양주(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8명의 의사의 묘소가 있는 묘역이다. 삼진의거는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는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4·3삼진의거에서는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앙주(高昻柱)·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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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 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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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설대비
조설대(朝雪臺)는 한일 강제합방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의 마애명(磨崖銘: 암각문)을 새긴 곳이다. 제주 애국지사 12인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곳에 모여서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하고, 이 바위에 그 맹약을 새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조설대를 새긴 마애명은 현무암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 현재는 보호석으로 가려져 있다. 동산에 세워진 대한광복의사(大韓光復義士), 조설대(朝雪臺) 비석, 집의계 광복의사경모비(集義契光復義士敬慕碑) 등은 후대에 따로 세운 것이다. 대한광복의사비는 일명 12인비라고도 하는데, 집의계를 구성한 12명의 유의 이름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