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기념관
사적지 개요
일제강점기 때 독립지사이자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세운 단재 영각을 중심으로 기념관, 묘소로 이루어진 곳이다. 단재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앞마루를 놓았다. 영각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정기문’이라는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사당이 있는 고드미마을은 미원장이나 내수장에 나무를 내다 파는 고드미장꾼들로 이름난 곳이다. 신채호 선생이 1887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가이자 교육자, 문학가,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은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초빙되는 등 일찍이 자주독립사상에 눈을 뜨고 ‘조선상고가’ 등의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한 역사가이자 1901년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신교육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교육자이다.아울러 우리 민족의 기상을 노래한 중편소설 「꿈하늘」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쓴 문학가이자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만들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단재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로 묘역에는 한용운 선생이 세운 묘표석과 사적비, 그리고 신채호 선생의 시 ‘하늘북’을 새긴 시비, 신채호 선생과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있다.
역사가이자 교육자, 문학가,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은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초빙되는 등 일찍이 자주독립사상에 눈을 뜨고 ‘조선상고가’ 등의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한 역사가이자 1901년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신교육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교육자이다.아울러 우리 민족의 기상을 노래한 중편소설 「꿈하늘」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쓴 문학가이자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만들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단재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로 묘역에는 한용운 선생이 세운 묘표석과 사적비, 그리고 신채호 선생의 시 ‘하늘북’을 새긴 시비, 신채호 선생과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있다.
탐방로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에 있는 고드미마을 단재 선생의 사당 및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매주 월요일, 신정, 설날, 추석이 휴관일이라고 한다.
인물정보
- 성명
- 신채호
- 한자명
- 申采浩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80 ~ 1936
- 본적
- 충청북도 청주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신채호는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했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고, 만민공동회 운동 때에는 간부급으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 해 연말에 독립협회가 해산당할 때 일시 투옥되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태어나 자란 문의군으로 돌아와 문동학원(文東學院) 등에서 신교육에 종사하였고, 1904년에는 신규식(申圭植), 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산동학당(山東學堂)이라는 신식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장지연(張志淵)의 요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 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18일에 소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가 이를 비밀에 부치자,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기표하여 이를 폭로 규탄하자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었다. 이에 양기탁(梁起鐸)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 기자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신채호는 신문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성력을 다할 것을 계몽하였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중 하나로,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십세기 신국민(二十世紀 新國民)」은 신민회의 이념을 국민에게 잘 천명한 대표적 논설이었다. 그 밖에도 합법단체로서의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에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했으며,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에도 다수의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국문 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부인 층의 계몽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계몽운동기에는 『독사신론』 (1908), 『을지문덕(乙支文德)』 (1908),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 (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 (1909),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 (1910, 실전) 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을 수립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당시 문화계에는 존화사관(중국을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생각하여 동경하는 사상)에 젖은 중세유교 사학과 더불어서, 일본 사학자들이 근대사학의 명목하에 『조선사(朝鮮史)』 등을 새로 저술하여 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을 지어내어 퍼뜨리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위한 정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국권 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여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통감하였다. 이를 계기로 격렬한 필치로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 사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 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시에 새로운 근대 민족주의사관에 의하여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하는 위의 저서들을 저술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1910년 4월에 신민회가 국외 독립군 기지 창건을 위하여 신민회 간부 일부를 망명시키게 되자, 신창호도 함께 국외로 망명하였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在亨), 정재관(鄭在寬) 등이 중심이 되어 교민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게 되자 그 주필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권업신문』을 통하여 노령과 만주의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문필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2년에는 윤세복(尹世復). 이동휘(李東輝), 이 갑(李甲) 등의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광복회는 1910년대의 중요한 독립운동 단체로 국내외에서 1918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14년에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 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朝鮮史)》(失傅)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여 그의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북경에 이주하여 국사연구와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성립된 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이승만이 2개월 전에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서 이에 반대하고 퇴장하였다. 제2회 의정원 회의에서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9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국민의회)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하였다.
1919년 10월에 상해에서 『신대한(新大韓)』지를 발행하여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언론 활동을 했으며, 남형우(南亨祐) 등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하여 그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에 『신대한』지의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이주하여 박용만(朴容萬) 등 동지 50여 명과 함께 『제이회보합단(第二回普合團)』을 조직하고 그 내임장(內任長)을 담당하였다. 「제이회보합단」은 독립군단체 「보합단」을 계승한 단체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유일한 독립운동방략으로 채택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9월에는 박용만, 신 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여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과 독립운동 방향의 통일을 추구하였는데, 이때 신채호는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의 지원을 받아 『천고(天鼓)』 잡지를 창간하여 격렬한 필치의 언론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20년 4월에는 54명의 동지들과 함께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공표하였다. 1923년 1월에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 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 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31년 서울에서 간행),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30년 서울에서 간행)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10년 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신채호의 유해가 돌아오자,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신백우가 고향에 이를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채호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