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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영 묘
윤주영 선생은, 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단경옥(段慶玉) 등과 함께 충주군 신니면(薪尼面)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용원(龍院)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해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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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니면민 만세운동유적비
1919년 4월 1일 충북 충주군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충주시에서 건립하였다. 처음 세워진 것은 1984년이며, 2003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구성된 신니면민만세운동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재건립하였다. 4월 1일 장날을 기하여 약 200여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에 호응하는 남녀노소의 독립만세 소리는 온 장터를 뒤흔들고 끝없이 메아리쳐갔다. 이 시위의 주동인물은 단경옥·이희갑·손승억·윤주영·윤무영·이강호·김은배·이강렴 등 8명인데 모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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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추마을 유래비
충북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방추마을 입구 마을 유래비와 독립유공자 손승억 묘소 안내판을 찾아왔다.이 곳의 주소는 충북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510-4이다. 마을 유래비에 손승억 선생의 약력이 기재되어 있으며, 선생과 마을의 독립운동사를 기리기 위하여 1993년 마을 주민들이 건립하였다. 다만 손승억 선생의 묘소는 1973년에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는데, 아직도 이 곳에 묘소 안내판이 위치하고 있었다. 참고로 손승억 선생은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독립유공자-122에 안장되었다. 손승억은 충청북도 중원(中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동지들과 함께 이희갑(李喜甲)의 집에서, 이튿날 신니면(薪尼面) 용원(龍院)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단경옥(段慶玉)·이희갑·이강렴(李康濂) 등과 독립선언서를 제작, 등사하였다. 4월 1일 약 200여명의 군중이 모인 장터에서 그들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청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게 될 때 옥문에서 재차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재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출옥은 하였지만 일본 헌병·경찰 등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자, 1934년 4월 16일 독립만세를 외치고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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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억 집 터
손승억(孫承億, 1893∼1934)의 호는 태경(泰慶)이다. 1919년 3월 31일 동지들과 함께 이희갑의 집에서, 이튿날 신니면 용원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이희갑·이강렴 등과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등사하였다. 그는 4월 1일 약 200명의 군중이 모인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청주형무소에서 출옥할 때 옥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재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헌병·경찰 등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자, 1934년 4월 16일 독립만세를 외치고 목을 매어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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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공적비
해당 공적비는 충주 일원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공적비 본체를 중심으로 주변에 총 30명이 넘는 유공자 분들의 이름과 활동 내역을 기재한 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공적비는 2012년 광복회가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충주시가 지원하였다. 건립문은 다음과 같다. 건립문일본에 빼앗긴 국권과 조국을 찾고자 국내외에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지푸라기와 같이 여겨 조국의 수호신으로서 목숨을 바친 거룩한 애국선열들의 호국 정신을 천추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충주시와 후손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이곳에 독립 유공 공적비를 세운다. 공적비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유공자 분들의 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설계되었고, 중앙의 공적비를 둘러싸고 있는 명각비는 대한민국 산천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유공자 분들의 공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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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응 집
권태응 선생은 충북 충주 사람이다. 1935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최인형·염홍섭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UTR구락부에 가입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했다. UTR구락부는 원래 급우생들의 친목모임으로 출발했으나, 학교측의 민족차별과 노예교육에 반발하면서 항일학생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1937년 3월 4일 동교 졸업식 당일 친일적 발언을 일삼던 친일학생들을 구타하여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와세다 대학에 재학하던 중 쥬오대학에 다니던 UTR구락부 동지 염홍섭 등과 함께 공산주의를 선전 계몽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1937년 9월 재도쿄 경성고보 제33회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사회주의 학습반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 모임을 중심으로 1939년 5월까지 조국의 독립 및 신사회의 실현방안을 논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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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항일독립운동역사관
이 항일독립운동역사관은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세운 대한민국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서 빼앗긴 조국의 주권 회복과 민족자존을 위해 일제 억압에 맞서 싸우다 목숨과 피눈물로 독립된 숭고한 희생정신과 그 공훈을 기록 전시하여 국민과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운동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여 독립정신을 국민정신으로 계승하고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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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한말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이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충청남도 홍성지방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셔졌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자료인 <홍양일기>. <홍양기사>, <조선최근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인, 많게는 수백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묘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의 오른쪽에는 정인보가 짓고 심상직이 쓴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사당인 창의사(彰義祠)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