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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 묘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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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리 마을자랑비
하동리 마을 자랑비는 92년 건립되었다. 이 마을에서 김순구와 독립운동가 25명을 배출한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건립하였다.일제시대 도내에서 독립투사로 그 이름을 드날리던 김순구 선생을 주축으로 이마을 애국지사 25명을 비롯하여 면민이 1919년 4월 8일 만세봉에서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시다가 김순구 선생은 대표로 잡혀가 많은 고문을 받으시다 순절하였다.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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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만세운동기념비
군서만세운동기념비는 1919년 군서면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하동리 마곡마을 만세봉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다. 이 기념비는 후손들에게 만세운동의 참뜻을 알리고 당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김순구 열사를 비롯, 함께 만세를 불러 고초를 당한 26명 애국지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군서면 만세운동은 당시 음력 3월 8일 밤 마을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기로 협의한 후 짚단으로 각자 횃불을 만들어 마을 앞산에 올라 만세를 부름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을 앞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하여 그 뒤부터 이곳을 만세봉이라고 불렀으며 만세운동과 연루된 김순구 열사를 비롯한 26명의 애국지사들이 일본순사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해 대부분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비를 세운 3·1정신유지계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시대부터 비밀리에 조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지사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운영해 오고 있으며 매년 김순구 열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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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 사당 (충민사)
충민사는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나 충청도 일원을 무대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신 순국선열 김순구 선생과 항일투사 25인의 애국, 충정을 기리고 국민의 애국심 함양을 위하여 2002년 건립하였다.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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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권호 공적비
성권호(1921 - 1976)은 대전(大田) 사람이다. 1941년에 신사(神社)·군수공장(軍需工場)·군용열차(軍用列車) 등을 폭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동년 2월 일경에 붙잡혔다고 한다.1941년 12월 25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11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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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윤 망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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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석 사적비
배용석(1899 - 192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경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수묵동(水墨洞)에서 허상기(許相基)·육창주(陸昌柱)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미리 준비하여 동년 3월 27일 오후 1시경 이원(伊院) 장터에 운집한 주민 400여명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때 주동자가 피검당하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붙잡혔다.그리하여 동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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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석 묘
배용석(1899 - 192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경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수묵동(水墨洞)에서 허상기(許相基)·육창주(陸昌柱)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미리 준비하여 동년 3월 27일 오후 1시경 이원(伊院) 장터에 운집한 주민 400여명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때 주동자가 피검당하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동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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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옥천읍 마암리)
옥천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 있는 충혼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옥천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가했거나, 타지에서 태어나 옥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7명의 이름을 새긴 약 6m 높이의 독립유공자탑을 충혼공원내 충혼탑 옆에 세웠다. 명각대상자는 청산만세운동 김인수 외 6명, 이원만세운동 김용이 외 16명, 군서만세운동 김순구, 군자금모금 등 항일운동 곽중규 외 19명, 의병활동 송병선 외 11명 등 57명이다.탑의 형상은 애국정신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들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며 자유와 평화를 선언하는 애국지사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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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집
정구영(1899 - 1978)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 해방 후에는 독재를 굳건하게 반대했던 변호사였다.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911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상과, 1919년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재판소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1921년 대구지방법원 검사, 1923년 경성지방법원 검사를 지낸 뒤 1925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30년 경성조선인변호사회장, 1943년 경성변호사회장, 1946년 조선법조회 이사장, 1947년 조선인권옹호연맹 이사장, 1955년 변호사징계위원, 1956년 초대한국법학원장, 1959년 서울변호사회장·대한변호사협회장, 1960년 국제변호사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사건에 대해서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촉구성명을 발표하였다. 1961년 5·16 후 5·16의 주체세력인 민주공화당에 입당, 1963년 총재에 취임하고,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64년 민주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다시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3선개헌을 추진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3선개헌에 이어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1월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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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운동기념비(재건립)
옥천에 위치해있는 기미3.1운동기념비는 재건립되었다. 비석은 그대로이고 비를 받치고 있는 아래부분이 바뀌었다. 3.1운동 당시 주동자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허상기(許相基), 허상구(許相球), 허상회(許相淮), 김용이(金龍伊), 육창주(陸昌柱), 공재익(孔在翊), 조이남(趙伊男), 이금봉(李金奉), 이호녕(李瑚寧)등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 장날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형기를 다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애국지사들은 옥고에 시달려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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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이원면 건진리)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건진리에 위치해있다. 1998년 12월 이원면 개심리 사유지에 설치된 기존의 현충탑이 무상 임대 기간이 만료되면서 부지 이전과 충혼탑 정비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군은 현충시설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현충탑을 재건립했으며 독립유공자탑을 함께 설치했다. 부조벽에는 6·25 및 베트남 참전 희생자 등 200명, 3·1 운동 관련 애국지사 등 22명으로 총 222명의 유공자를 명각했다. 또한 바닥에는 이원면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담은 93개의 박석을 설치했다. 박석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남, 이서의 2개면이 이원면으로 통합된 1929년과 현재 2022년과의 차이가 93년인 것을 고려하여 93개로 했다.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김용이(金龍伊)·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부조벽에는 이원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용이, 육창주, 이면호, 허상기, 공재익, 배용석, 이금봉, 이호영, 허간, 허상구,허상회, 허찬, 박만하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에 참가한 곽중규, 곽준희, 김응선, 곽중선, 김운용, 김성권, 송암우, 정명옥, 지팔문의 이름이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