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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이원면 건진리)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주소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건진리 739-30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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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건진리에 위치해있다. 1998년 12월 이원면 개심리 사유지에 설치된 기존의 현충탑이 무상 임대 기간이 만료되면서 부지 이전과 충혼탑 정비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군은 현충시설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현충탑을 재건립했으며 독립유공자탑을 함께 설치했다. 부조벽에는 6·25 및 베트남 참전 희생자 등 200명, 3·1 운동 관련 애국지사 등 22명으로 총 222명의 유공자를 명각했다. 또한 바닥에는 이원면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담은 93개의 박석을 설치했다. 박석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남, 이서의 2개면이 이원면으로 통합된 1929년과 현재 2022년과의 차이가 93년인 것을 고려하여 93개로 했다.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김용이(金龍伊)·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부조벽에는 이원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용이, 육창주, 이면호, 허상기, 공재익, 배용석, 이금봉, 이호영, 허간, 허상구,허상회, 허찬, 박만하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에 참가한 곽중규, 곽준희, 김응선, 곽중선, 김운용, 김성권, 송암우, 정명옥, 지팔문의 이름이 적혀있다.

인물정보

성명
공재익
한자명
孔在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8 ~ 1949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헌병주재소를 파괴하다가 3년형을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곽준희
한자명
郭俊熙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0 ~ 1940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07년 장운식 의진(張雲植義陣)에 소속되어 민한식(閔漢植)·신돌석(申乭石) 등과 협의하여 충북(忠北) 옥천(沃川)과 전북(全北) 금산(錦山)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0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곽중규
한자명
郭重奎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91 ~ 1950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21. 9월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1922. 3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 비서장(秘書長)으로 활동(活動)하다가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사(敎師)가 되어 민족 교육(民族敎育)을 실시(實施)하며 교포 자녀 교육사업(僑胞子女敎育事業)에 이바지하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忠淸道) 의원(議員)으로 선출(選出)되어 임시대통령(臨時大統領) 탄핵심판위원(彈劾審判委員) 상해교민단장(上海僑民團長)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韓族唯一獨立黨促成會) 간부(幹部) 겸(兼) 유호(留滬) 독립운동자동맹(獨立運動者同盟) 집행위원(執行委員) 강소성(江蘇省) 법남구지부(法南區支部) 조직부장(組織部長)으로 활동(活動)하다가 상해(上海) 일국 영사경찰(日國領事警察)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곽중선
한자명
郭重善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907 ~ 1935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26. 1. 1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조직(組織)된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 가입(加入)하여 상해일국(上海日國) 총영사관(總領事館)에 2차(次)에 걸쳐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하며 친일 선인(親日鮮人)의 주살(誅殺)과 적 기관(敵機關) 시설(施設) 등을 파괴(破壞)하는데 참가(參加)하고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성권
한자명
金聲權
운동계열
미주방면
생몰년도
1875 ~ 1960
본적
경상북도 경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2

공적개요

1918-1919년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의연금을 출연하였으며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興士團)의 이사장(理事長)으로 활동하였고,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미주지부의 집행위원장(執行委員長) 겸 동당(同黨)의 기관지인 『독립(獨立)』 신문사(新聞社)의 사장(社長)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운용
한자명
金云用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미상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5

공적개요

1926년 3월 1일 서울에서 창의단원(倡義團員)과 함께 일제 주요기관 폭파계획에 참여하여 경성부청(京城府廳) 폭파를 맡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응선
한자명
金應善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0 ~ 미상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6

공적개요

1910년 12월경 경기도(京畿道) 포천(抱川)․가평(加平)․영평군(永平郡) 등지에서 강기동 의진(姜基東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박만하
한자명
朴萬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51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0

공적개요

1919년 3월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배용석
한자명
裵用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26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27.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이원(伊院) 장터에서 허상기(許相基) 등과 같이 400여명(餘名)의 주민(住民)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동(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룬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암우
한자명
宋岩于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7 ~ 1959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26년 1월 서울에서 창의단원(倡義團員) 김응선(金應先) 등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조선신궁(朝鮮神宮) 등 식민지 주요기관 폭파계획을 수립하고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 폭파책임을 맡았다가 사전 발각되어 동년 7월 중순 체포되고 1927년 8월 징역 1년 6월(미결구류(未決拘留) 120일 통산(通算))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육창주
한자명
陸昌柱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50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3월 충북(忠北) 옥천(沃川)에서 허상기(許相基)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하여 동월(同月) 27일 동군(同郡) 이원시장(伊院市場)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원헌병주재소(伊院憲兵駐在所)의 헌병에게 연행되었으나 탈출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지휘하고 주재소에 투석하는 등의 항거를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금봉
한자명
李金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50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27 옥천(沃川) 이원(伊院) 3.1운동에 참가하여 1919.7.5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면호
한자명
李冕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8 ~ 1920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3.27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伊院)장날에 집결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거리를 누비면서 주재소로 몰려가서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2년을 받고 복역하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병보석(病保釋)되어 가료하다가 1개월후에 순국(殉國)(옥중사(獄中死) 간주(看做))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호영
한자명
李瑚寧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68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3월 27일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에서 육창주, 허상기, 김용이 및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제창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명옥
한자명
鄭明玉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8 ~ 미상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5

공적개요

1926년 1월 서울에서 창의단원(倡義團員) 김응선(金應先) 등과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는 계획에 참여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신청사(新廳舍) 폭파책임을 맡아 실행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지팔문
한자명
池八文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84 ~ 미상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5

공적개요

1907년 3월 충남(忠南) 대전(大田)에서 나인영(羅寅永) 등이 주도하는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 계획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응하여 서울로 상경, 남대문 부근에서 실행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유형(流刑) 10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허간
한자명
許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59 ~ 1942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27 옥천군(沃川郡) 이원(伊院)장에 모인 군중과 함께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익일에는 시위대열에 불참하고 보고만 있던 자(육사원(陸士源))을 난타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허상구
한자명
許相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58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3.1운동(運動)시에 만세 시위(萬歲示威)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年間) 옥고를 치른 후 신병으로 신유하다가 작고(作故)하였음 (기념비 사진 1964년 2월 1일 대전일보(大田日報))

인물정보

성명
허상회
한자명
許相淮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1 ~ 1968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19년 3.1운동시 이원(伊院)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여 2년 6월형을 받고 복역하였음(3.1운동 기념비문(記念碑文))

인물정보

성명
허찬
한자명
許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45
본적
충청북도 옥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3.27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伊院)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를 거사하기로 하고 행동통일을 기하여 이원(伊院) 장터에서 3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검거된 시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며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 8일간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