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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국 공적비
이진국(1898 - 1969)는 충청북도 영동(永同)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 인천 이씨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영동에서 무주(茂朱)에 이르는 도로공사 부역에 동원된 많은 군중과 합세하여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군중과 함께 학산면(鶴山面) 경찰주재소로 몰려가서, 돌을 던져 기물을 파괴하고 구속된 애국인사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경찰까지도 태극기를 들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그러나 결국 일본 경찰이 증원되어 시위군중이 부득이 해산될 때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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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국 묘
이진국(1898 - 1969)는 충청북도 영동(永同)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 인천 이씨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영동에서 무주(茂朱)에 이르는 도로공사 부역에 동원된 많은 군중과 합세하여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군중과 함께 학산면(鶴山面) 경찰주재소로 몰려가서, 돌을 던져 기물을 파괴하고 구속된 애국인사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경찰까지도 태극기를 들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그러나 결국 일본 경찰이 증원되어 시위군중이 부득이 해산될 때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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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순 동상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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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3.1운동기념비
이 비는 1919년 영동군민 2,000여명이 영동읍내 아랫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이고, 잇따라 매곡, 양산, 학산, 양강, 용산, 심천면 등지로 확산되어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영동군민들의 3.1만세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2002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영동의 만세운동은 충청, 경상, 전라도의 삼도 접경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서울의 지도부와 연결되지 않고 강제노역과 뽕나무 묘목 강제배부 등 경제착취가 직접적으로 작용해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 타 지역과 전개 양상이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월 25일 이후 각 면에서 일어난 영동의 3.1운동은 학산면이 가장 먼저 시작됐다. 발단은 영동-무주간 도로공사 강제노역 동원 등 극에 달한 일제의 민족말상정책 등 수탈정책에 기인하며 도로공사 부역에 나섰던 군중들이 양산면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날 군중들은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창문과 전화기를 파괴했으며 구속된 지사 구출을 시도했으나 출동한 일본의 지원병 때문에 실패하면서 7명이 체포되는 등 당시 상황이 구속된 지사들의 재판기록에 생생히 남아있다. 4월 2일부터 6일까지 안준 등이 주도한 매곡 만세운동도 영동에서 빼놓을 수 없다. 안준이 독립선언서를 얻어와 400여장의 태극기와 베껴 쓴 독립선언서를 들고 밤나무 묘포장 부역군들과 면사무소 마당에서 거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일과 4일은 마침 장날이어서 군중들이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고 추풍령 헌병 분견대가 출동해 주동인물을 구속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추풍령 분견소까지 추격해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등 영동군민들은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는 격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매곡면 3.1운동을 주도한 안준은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나와 광복 후 면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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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영동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9명 이름과 취지문을 새긴 탑이다. 영동군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얼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자연스러운 원형 좌대에 양쪽 수직방향의 화강석 기둥이 음과 양이 서로 상승 변화, 화합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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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사 독립만세운동비
7지사 독립만세운동비는 영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7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게 되었고, 이에 우리 민족은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이해 4월 4일 이곳 영동면에서도 2천 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7인의 애국지사의 충절을 기리고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하였다.장날을 이용하여 김태규(金泰奎)·박성하(朴聖夏)·한의교(韓義敎)·정성백(鄭聖白)·장인덕(張仁德)·정우문(鄭友文)·한광교(韓光敎)는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2,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였다. 이에 일경이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해산시키려 하자 몽둥이로 대항하다가 일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6명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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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식 묘
양봉식(1882 - 1950)은 충청북도 영동(永同) 사람이다.1919년 4월 3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학산면(鶴山面) 서산리(鋤山里) 장터에서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이날 밤 8시경에는 200여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면민들에게 강제로 나누어 줄 2만 8천 그루의 뽕나무 묘목을 뽑아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사무실과 숙직실을 파괴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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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만표 송덕비
전만표(1876 - 1959)는 충청북도 영동(永同) 사람이다.1919년 4월 3일 오후 4시경 학산면(鶴山面) 서산리(鋤山里) 장터에서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시 밤 8시경 약 20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구내에 심어 둔 뽕나무 묘목 2만 8천 그루를 뽑아 불태우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20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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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3.1독립의거기념비
3.1독립운동 6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비석이며 여규병, 정화중, 여규방, 여규일, 여중선, 김승림, 박두업, 박원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여규방(1886 - 1963), 여규병(1879 - 1935), 정화중(1888 - 1931), 여규일(1883 - 1974), 여중선, 김승림(1891 - 1952), 박두업(1898 - 1949), 박원포는 1919년 4월 16일 학산면에서 도로부역을 위하여 모인 군중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학산주재소를 일시 점거하고 건물과 기물을 방화, 파괴하고 일인이 임시로 심어둔 뽕나무 묘목에 불을 지르며 활동하였지만 일경의 무차별 발포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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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석 기념비
이건석(1852 - 1906)은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앞세우고 이에 동조하는 오적과 더불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다. 평소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학문(儒敎學問)에 종사하여 온 유림(儒林)들의 분노와 울분은 대단하였다. 또한 정부 내에 있던 문인 관리들은 망국조약이 있을 수 없는 망극한 일이라는 것과 적신(賊臣)들의 불법하고 불의(不義)한 사실을 들어 광무황제에게 상소하여 적신들의 처단과 조약의 취소를 청원하였다. 이건석은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소식을 듣고 이석종(李奭鍾) 등과 함께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이어서 조약의 부당함과 적신들의 처단을 조직적으로 상소하기 위하여 13도소청(十三道疏廳)을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서 유생(儒生)들은 일제와 매국노들의 온갖 방해와 협박을 무릅쓰고 연명으로 광무황제에게 조약의 폐기와 반역자들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고 그들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상소에 대해 의롭지 못한 만행으로 대처하여, 상소항쟁을 거듭하던 그를 비롯한 많은 애국자들을 회유하고 또 한편으로는 협박하여 기세를 꺾으려 온갖 책동을 다 부렸다. 그는 일본군 파견사령부에 감금되어 한편으로는 일제(日帝)의 협박과 회유에도 결코 굽히지 않고 소신을 지켰다.그의 절의(節義)는 몇 차례의 토혈(吐血)에도 굳게 이어졌으나, 결국 1906년 5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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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농민혁명전적지비
1894년 10월 29일 충북 옥천 증약 부근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나, 정확한 전투지 위치는 알 수 없다. 2009년에 옥천 증약전투 참여 유족과 옥천향토사연구회에서 ‘갑오년동학농민혁명전적지’ 기념비를 옛 증약역 인근에 건립하였다. 1894년 10월 29일 일본군 제18대대 하사 이하 17명과 교도중대 1개 소대는 회덕을 출발하여 주안으로 가는 도중, 옥천 증약 부근에서 동학농민군 1만여명을 만나 교전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깃발 50여개를 앞세우고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협공하였는데, 동학농민군 110여 명이 쓰러지고 관군은 겁을 먹고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동학농민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적군은 적다. 포위하라”고 외치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낸 뒤 문의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일본군이 쏜 탄약은 1,432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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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 순절비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