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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집 표지석
김복한(1860-1924)은 충청남도 홍성 사람으로,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설,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석방되었다. 대사성(大司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 이설 등과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상소하여 다시 투옥, 후에 석방되었다. 1906년 참판 민종식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1919년 3월 유림(儒林) 대표로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 지병을 얻어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후학 양성에 노력하다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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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기적비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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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집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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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비공원, 애국지사 시비
민족시비공원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시인들의 시가 새겨진 비석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한용운, 심훈 등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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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동상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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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모 묘
충청남도 홍성에 위치한 서은모의 묘이다. 서은모(1884-1936)는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주민들은 월산(月山)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게양하고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서은모도 이길성, 황문수, 이유홍, 이백영, 황통명, 하유숙, 최순보, 전남규, 이희보 등과 함께 횃불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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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태 흥학기념비
서승태(1854-1921)는 1906년에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에서 홍주성을 향하여 행진할 때, 지방 부호의 창고를 열어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1908년 홍주향교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을 때에는 영재 배출을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광천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하고 57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여 후진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19년 3월 18일에는 홍천군 광천면에서 오인섭(吳仁燮)·이명종(李鳴鍾)·최응모(崔應模)·성인배(成仁培)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500여 매를 등사하여 주민들에게 배부하는 등 시위 준비를 위해 활동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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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모 집
서은모(1884-1936)는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주민들은 월산(月山)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게양하고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서은모도 이길성, 황문수, 이유홍, 이백영, 황통명, 하유숙, 최순보, 전남규, 이희보 등과 함께 횃불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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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모 독립운동 기념비
서은모(1884-1936)는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주민들은 월산(月山)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게양하고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서은모도 이길성(李吉性), 황문수(黃文秀), 이유홍(李有弘), 이백영(李伯榮), 황통명(黃通明), 하유숙(河有淑), 최순보(崔順甫), 전남규(田南珪), 이희보(李熙輔) 등과 함께 횃불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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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집(하허당)
이설(1850-1906)의 자는 순명(舜命), 호는 복암(復菴)이며,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3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곧이어 을사오적 주살(誅殺)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국권을 잃음에 통분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 지 수십 일 만에 1906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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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묘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金福漢)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3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곧이어 을사오적 주살(誅殺)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국권을 잃음에 통분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 지 수십 일 만에 1906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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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환 구 묘
서기환(1849-1906)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지사들이 격렬히 반대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성에서도 민종식이 거의하여 홍주(洪州)성을 점거하고 인근의 의병을 소집하였다. 서기환 또한 전태진, 전경호와 함께 민종식 의진에 참가하여 동문령관(東門領官)에 임명되었다. 4월 9일 물러났던 적군이 전열을 수습하고 홍주성을 탈환하고자 습격해왔고, 서기환은 동문을 수호하며 끝까지 용맹하게 대전하였으나 역부족하여 홍주성은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서기환은 남은 군사를 동원하여 힘껏 싸웠으나 마침내 전태진, 전경호와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