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김좌진 기적비

유형
비석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관련인물
관련사건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관련 동영상 보기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탐방로그

김좌진 선생 기적비는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백야기념관 앞에 위치해있다. 백야기념관은 김좌진 선생의 호인 '백야(白冶)'에서 따와 붙여진 기념관이다.

인물정보

성명
김좌진
한자명
金佐鎭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89 ~ 1930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 16세 때에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육영 사업(育英事業)에 종사함 2. 동년 10월 입경하여 윤치성(尹致晟), 노백린(盧伯麟) 등과 조직적 독립운동의 전개를 기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족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함 3. 1907년 이창봉(李昌奉) 설립의 고아원 총무 및 한성신보 이사(漢城新報理事)를 역임하여 국혼 고취(國魂鼓吹)에 진력함 4. 1908년 박상진(朴尙鎭)과 광복단(光復團)사건으로 3년을 복역 후 간도(間島)로 건너감 5. 3.1운동(運動) 당시(當時) 동만주(東滿洲)의 왕청현(旺청縣)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고 총사령(總司令)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를설치(設置)하여 독립군 간부양성(獨立軍幹部養成)에 진력(盡力)함 6.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同志 羅中昭), 이범석(李範錫)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靑山里作戰)에 참가(參加) 10배의 왜적(倭敵)을 대파(大破)하여 사상(死傷) 3천3백여명의 전과(戰果)를 거둠 7. 1922년 6월 중동선소분하지구(中東線小芬河地區)에서 사관양성(士官養成)에 주력(注力)함 8. 1926년 김혁(金赫)등과 더부러 신민부(新民部)를 조직(組織)하여 활동(活動)함 9.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中國救國軍司令官楊宇一)과 회담(會談)하고 공동전선(共同戰線)을 취(取)하였으며 10. 동년8월 국민당동삼성(國民黨東三省) 공작 책임자(工作責任者) 공패성장령(貢沛城將領) 악유사(岳維唆)과 회담(會談)하고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組織)하였으나 장작림(張作霖)의 탄압(彈壓)으로 실패(失敗)함 11. 1929년 정신(鄭信), 민무등(閔武等)과 중동선 일대(中東線一帶)에서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조직(組織)하고 주석(主席)으로 활동중(活動中) 동년음(陰)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高麗共産靑年會員) 주중한인청년동맹원(駐中韓人靑年同盟員) 박(朴)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拳銃狙擊) 피살(被殺)됨(향년 41재(才))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