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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읍 3.1만세운동 항쟁지
춸원읍 관전리, 중리, 월하리, 사요리, 외촌리의 읍내 중심가는 1919년 3월 10일과 11일 강원도 최초로 일제에 항거한 대규모 만세시위의 중심지이다.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 학생, 교회의 청년 그리고 지역 내 청년 250여 명이 중심이 되어, 군청 뒷산인 북관산에서 미리 준비한 커다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을 외치며 강원도 최초로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서문거리를 거쳐 철원군청, 헌병분견소 등을 이동하면서 시위를 벌였으며, 날이 어두워지자 7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10일의 1차 집회를 해산하였다. 1919년 3월 11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서문거리에 모인 군중들은 4㎞ 떨어져 있던 철원역으로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철원역 광장에서 7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인 뒤, 관전리의 철원군청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이후 농업학교, 보통학교 학생 및 군민들이 더 크게 합류하면서 읍내로 진입했으며, 일본 헌병 5명의 1차 저지와 기마 헌병의 2차 저지를 무너뜨리며 서문거리에 이르렀다. 일경은 공포를 발사하며 무력 강제 진압한 3차 저지과정에서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4,000여 명의 대규모 군중들도 강제 해산되면서 2차 집회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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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애국단 결성지(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동송에 위치한 도피안사는 1919년 9월 철원의 애국지사들이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한 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의 철원지부를 결성한 곳으로, 6.25 전쟁 시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해방 후 주둔군에 의해 재건되었다. 철원의 중요한 항일운동이면서 초기 임정의 국내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원애국단의 회의장소였다.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은 1919년 3·1운동 후 서울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 지부인 철원군단으로 1919년 8월 결성되었으며, 강원도의 조직을 총괄하며 애국단강원도단, 철원에서 조직되었고 철원에 본부를 두어 철원애국단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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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근 부조
강종근(1901 - 1942)은 서울 사람으로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교회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였다. 만주 철령에 있는 육영학교를 다닌 강종근은 이 학교에서 이동교회(裡洞敎會) 목사이며, 민족주의자인 최학기(崔學基)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 들어와 경성신학교·배재학당 등을 다니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종근은 1930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연천교회에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강종진은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겨서도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강종근은 1940년 6월 철원 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붙잡혔다. 그래서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6월 고문으로 인한 신병의 악화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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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읍 3.1만세운동 항쟁지
철원읍 관전리, 중리, 월하리, 사요리, 외촌리의 읍내 중심가는 1919년 3월 10일과 11일 강원도 최초로 일제에 항거한 대규모 만세시위의 중심지로,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 학생, 교회의 청년 그리고 지역 내 청년 250여 명이 중심이 되어, 군청 뒷산인 북관산에서 미리 준비한 커다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을 외치며 강원도 최초로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 시위대는 서문거리를 거쳐 철원군청, 헌병분견소 등을 이동하면서 시위를 벌였으며, 날이 어두워지자 7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10일의 1차 집회를 해산하였다.1919년 3월 11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서문거리에 모인 군중들은 4㎞ 떨어져 있던 철원역으로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철원역 광장에서 7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인 뒤, 관전리의 철원군청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농업학교, 보통학교 학생 및 군민들이 더 크게 합류하여 읍내로 진입했으며, 일본 헌병 5명의 1차 저지와 기마 헌병의 2차 저지를 무너뜨리며 서문거리에 이르렀고, 공포를 발사하며 일제의 무력 강제진압한 3차 저지과정에서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4,000여 명의 대규모 군중들도 강제 해산되면서 2차 집회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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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집
박용만(1881 - 1928)은 상동청년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1905년 미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수감될 정도로 개혁과 구국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고 실천적이었다. 1915년을 전후하여 미·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때를 독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사회적 조직체인 국민회를 〈정치적 조직〉, 즉 임시정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對日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 양성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군단의 세력을 국내와 중국, 러시아지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아울러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도록 무형정부론을 앞서 주창하며 <신한민보(新韓民報)>, <신한국보(新韓國報)> 등의 주필을 맡아 우리 민족이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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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애국선열추모비
철원군은 강원도에서 3·1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으로,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군내에 뿌려졌고 3월 10일 철원읍을 필두로 3월 12일 갈말읍과 김화읍에서 많은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19년 8월에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일명 철원애국단)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 철원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철원애국선열기념사업회, 철원애국선열추모비건립위원회에서 세운 『愛國先烈追慕碑(애국선열 추모비)』의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고, 비문 서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비문에는 15명의 애국선열(이봉하, 박연서, 박용만, 오세덕, 강대려, 김철회, 엄재형, 박용철, 박건병, 김완호, 김세준, 박용규, 김재근, 이용우, 조종대)이 적혀있다. 1967년 4월 15일 건립하였으며, 철원중고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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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유적비
박용만(1881~1928)은 상동청년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1905년 미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수감될 정도로 개혁과 구국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고 실천적이었다. 1915년을 전후하여 미·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때를 독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사회적 조직체인 국민회를 〈정치적 조직〉, 즉 임시정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對日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 양성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군단의 세력을 국내와 중국, 러시아 지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아울러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도록 무형정부론을 앞서 주창하며 <신한민보(新韓民報)>, <신한국보(新韓國報)> 등의 주필을 맡아 우리 민족이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박용만의 자주독립정신의 높은 뜻을 길이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1991년 12월 30일 철원군에서 철원초등학교 교정 내에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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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병 집
박건병(1892~1932)은 강원도 철원(鐵原) 출신이고 본적은 강원도 김화이다. 1919년 8월 11일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군단조직인 철원애국단을 창설하였고 애국단의 학무과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강원도 도단부 설치에 참여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 우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 참여를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0년 1월 20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21년 4월 20일 북경 교외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1년 9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였다. 박건병은 1926년 10월 16일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32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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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달 묘
김경달(1849~1896)은 강원도의 한말의병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고, 유중락, 이만응 등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습재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 의병부대가 형성되자 유중락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가평·춘천·홍천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춘천 의병부대는 선비들이 대부분 구성되어 있어서 전략·전술에 익숙지 못해 서울에 속해있던 군사인 경군(京軍)에 패한 뒤 의병이 흩어지자, 제천의 의암 유인석 의진으로 들어가 최삼여의 지평 의진으로 편입되어 활동했다. 그러다가 경기도 양근 잠강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경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는 1896년 3월 21일 경군의 회유를 크게 꾸짖고 끝내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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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석 묘
유태석(1858~1933)은 강원도 춘천(春川) 사람으로, 유중악과 유중교에게 수학하였으며, 유인석의 문중 동생이다. 을미의병 당시 1896년 1월 이소응의 춘천의진에 가담하여 유홍석과 같이 가평 일대에서 의병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유홍석을 중심으로 재기한 춘천의진에 참가하여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1907년 11월 강원도 춘천군 남산외면 낙암리에서 족형인 유인석 의병장의 명을 받아 의병 40명을 소모하여 인근 의진과 연락을 취하며 유인석 의병장을 지원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의 국치 이래 국내의병이 해외로 흩어져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유태석은 향리인 가정리로 돌아와 1912년 약계서사(藥溪書社)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쓰다가 1933년 8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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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악 묘
유중악(1843~1909)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중암 김평묵과 집안 형인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평 용문산 아래에서 유홍석·이근원·이소응 등과 같이 회동하여 거의할 것을 결의,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고, 1896년 1월 이소응과 함께 춘천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소모하여 의암·진부산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처형하고 춘천창의포고문(春川倡義布告文)을 선포하였다. 자금으로 300냥씩 각출하고 여러 곳의 의병과 연락해 같은 해 2월 안보전투를 벌였으나 이춘영이 전사함으로써 의병진은 각기 흩어졌다. 1907년 7월 춘성군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유홍석과 함께 의병 6백여 명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군자금이 없고 탄환이 부족하자 유중악은 자진하여 소를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고, 의연금을 모아 탄약제조를 지원하였다. 그 후 가평 주길리(珠吉里)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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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유적지
의암(毅庵) 유인석(1842 ~1915)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있었고, 이를 계기로 같은 문인이었던 김평묵·유중교로부터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을 익히며 위정척사파로 성장하였다. 그는 단발령, 을미사변 등이 일어나자, 제자들의 추대에 의하여 영월에서 의병장이 되어 제천과 충주 등에서 크게 왜군을 물리쳤으나 낙후된 병기 등으로 인해 단양에서 크게 패한 후 해외로 가서 의병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10년 6월에 연해주 의병 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 결성 및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동포를 해삼위에 집결시키고 국내·외에 격문을 발송하고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는 등 활약하였으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15년 만주 봉천성에서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으며, 유해는 1915년 1월 29일 중국 요녕성 관전현 방취구에서 순국한 후 평정산에 안장되어 있었다가, 1935년 고향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 현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