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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애국선열추모비

유형
비석 | 안내판·표지석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54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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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철원군은 강원도에서 3·1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으로,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군내에 뿌려졌고 3월 10일 철원읍을 필두로 3월 12일 갈말읍과 김화읍에서 많은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19년 8월에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일명 철원애국단)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 철원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철원애국선열기념사업회, 철원애국선열추모비건립위원회에서 세운 『愛國先烈追慕碑(애국선열 추모비)』의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고, 비문 서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비문에는 15명의 애국선열(이봉하, 박연서, 박용만, 오세덕, 강대려, 김철회, 엄재형, 박용철, 박건병, 김완호, 김세준, 박용규, 김재근, 이용우, 조종대)이 적혀있다. 1967년 4월 15일 건립하였으며, 철원중고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탐방로그

철원애국선열추모비는 강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54 철원중고등학교 내에 있다. 붉은색 건물과 테니스 코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인물정보

성명
강대려
한자명
姜大呂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9 ~ 1959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19. 3. 1 운동 당시(運動當時) 애국단(愛國團)을 조직(組織)하여 임정 연락하(臨政連絡下)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展開)타가 체포(逮捕)됨. 2. 1920. 11. 23 징역 3년 언도(言渡)됨.

강대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세준
한자명
金世晙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7 ~ 1961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17년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군관학교(軍官學校))를 졸업한 후 1921. 4월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에 미령 포왜국민군(美領布哇國民軍) 대표로 참가하여 군사통일 방안을 협의하는 한편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委任統治請願) 사실을 비난하고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으며 1924년 국민대표회의의 결렬후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925년 북경(北京)에서 선두자사(先頭者社) 동인(同人)으로서 항일투쟁에 중국민족과 연대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동년 중국군벌 마옥상(中國軍閥溤玉祥)이 설립한 서북군(西北軍) 간부학교에 입학하는 등 활동사실이 확인됨.

김세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완호
한자명
金完鎬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5 ~ 1973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 1919년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재무국장으로 활약타가 경성(京城) 지방법원 재판회부 (조선연합사 479-492 한국독립운동사 116, 항일순국의열사전 67) ○ 1920. 11. 30 징역 8개월 (매일신보 4673호) ○ 1921. 3월 14일 경성(京城) 복심원에서 공소기각 (동아일보 1921. 3. 15)

김완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재근
한자명
金載根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4 ~ 1964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908년 김화(金化)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 설립코 민족정신 선장 2. 1911년 2월 김화경찰서(金化警察署)로부터 상기 교를 폐교 당함 3. 1915년 수원농림학교(水原農林學校) 삼년 재학중 배일주모자로 중퇴 4. 1919년 3월 만세사건에 관련 피체되었다가 8월 6일에 석방됨. 5. 1919년 8월 7일 임시정부(臨時政府) 안창호(安昌浩)의 지령으로 애국단(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을 철원(鐵原)에 설치함. 6. 1920년 3월 9일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사건으로 피검되어 서대문(西大門), 원산(元山), 강릉(江陵)에서 징역 4년을 복역하고 출감함. (이상은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 P.849,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 6. 29 1921. 3. 15에 의함)

김재근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철회
한자명
金喆會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7 ~ 1960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철원(鐵原)에 배양학교(培養學校)를 설립하고 애국 사상(愛國思想) 고취하다가 당국(當局)으로부터 불온(不穩)하다하여 폐쇄 2. 동지(同志)들과 규합하여 애국단(愛國團)을 조직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년형을 받고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12.24) 복역 만기 출옥함 3. 1919.3.1 동지 조종대(趙鍾大)의 시체(옥사(獄死))를 비밀히 인수 안장(安葬)한 관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 4. 출감 후 요시찰인으로 감시가 심해지자 일본(日本) 신호(神戶)로 밀항하여 지하공작타가 체포되어 본국(本國)으로 송환됨

김철회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건병
한자명
朴健秉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2 ~ 1932
본적
강원도 김화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9. 8. 11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김상덕(金相德) 등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을 조직하고 활동, 같은 해 10월 10일 철원 사요리(四要里) 우시장(牛市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그후 중국에 건너가 1920. 1. 20 상해임시정부 의정원(上海臨時政府議政院) 의원(議員)(강원도(江原道) 대표)에 선출되고, 1921. 4. 20 북경(北京)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國民代表會籌備委員)에 선임되어, 같은 해 9월 상해(上海)의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석하였으며, 1926. 10. 16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의 집행위원에 선출, 1928. 5. 12 만주(滿洲) 화전(樺甸)과 반석(盤石)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에 참석하여 중국관내 및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는 등 1919년에서 1928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용각
한자명
朴容珏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98 ~ 1957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19~1920년 및 1923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강원도(江原道) 의원(議員)을 역임하였고, 1921년 이승만(李承晩) 등의 대미 위임통치 청원(對美委任統治請願)을 비난하는 성토문(聲討文)을 발표하였으며, 1925년 현재(現在) 대한청년동맹회(大韓靑年同盟會) 후보(候補) 집행위원(執行委員)으로 있었으며, 이후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조선인(朝鮮人) 간부훈련단(幹部訓練團)에 관여하였고, 1935. 10월 현재(現在) 의열단원(義烈團員)으로 일제(日帝)의 감시, 추적을 받는 등 활동(活動)한 사실이 인정(認定)됨.

박용각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용만
한자명
朴容萬
운동계열
미주방면
생몰년도
1881 ~ 1928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참가, 활동하였고, 1904년 보(輔)(보(保))안회(安會) 간부로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1908.7월 미국 덴버시에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열었으며, 1910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열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고, 1911년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 1912년 『신한국보(新韓國報)』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2.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 북미지방총회대표로 참가, 외교원에 선임되었고, 1914.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결성,단장(團長)으로 사관학교를 운영하였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小弱國同盟會)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1919.3월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태평양시사」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외무총장(外務總長)에 선임되었고, 1921년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개최를 주도하고 1922년 천진(天津)에서 대일무력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1923년 상해(上海)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창조파(創造派)로서 활동하면서 1924년 창조파 중심의 인사들이 설립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비서처(秘書處) 비서장(秘書長)에 선임되는등 독립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용철
한자명
朴容喆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904 ~ 1976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3.10 철원(鐵原)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피체되었다가 석방된 후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상해(上海) 한인유학생회(韓人留學生會) 집행위원(執行委員)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12월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議員)으로 피선되었고 1934년에는 항주(杭州)에서 한국독립당원(韓國獨立黨員)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오세덕
한자명
吳世悳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7 ~ 1986
본적
경기도 고양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19. 8 강원도(水原道) 철원(鐵原)에서 애국단 조직(愛國團組織) 2. 1919 임정(臨政)에 애국단 강원도대표(愛國團江原道代表)로 특파(特派) 3. 1919. 11. 상해 임정(上海臨政)으로부터 강원도 조사원(江原道調査員)에 피임(被任)(민족운동연감(民族運動年鑑) p. 62) 4. 1919. 12. 의열단 사건(義烈團事件)으로 서대문(西大門)에서 징역 1년(一年)받고 복역(服役)

인물정보

성명
이봉하
한자명
李鳳夏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0 ~ 미상
본적
경기도 파주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9년 3월 27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봉하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용우
한자명
李用雨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2 ~ 1966
본적
강원도 철원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철원(鐵原)에서 애국단(愛國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체포되여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용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조종대
한자명
趙鍾大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3 ~ 1922
본적
황해도 금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919년 기미 독립운동시(己未獨立運動時) 강원도(水原道)대표로 선출됨 철원애국청년단(鐵原愛國靑年團) 조직의 주동자 2. 1919년 12월에 철원애국단 사건으로 피검되어 5년 금고형을 받고 함흥(咸興)감옥에 수감됨 3. 1922년 7월 25일 함흥감옥에서 옥사함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67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166 동아일보(東亞日報) 1921. 3. 15, 1922. 7.30

조종대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