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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학 기념비
습재 최제학(1882 - 1961)은 면암 최익현의 문인으로서 전라북도 진안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면암은 판서 이용원·김학진·관찰사 이도재·참판 이성렬·이남규 등에게 글을 보내어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면암은 제자들과 의논하여 태인에 있는 돈헌 임병찬과 제휴하기로 하였으며, 이어 1906년 3월 3일 최제학은 면암의 서신을 가지고 돈헌을 찾아가 일을 성사시켰다. 이에 면암은 최제학 등 문인과 함께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회동하여 유생 80여 명의 호응을 받아 6월 5일 정읍으로 출발하였다. 정읍에서 각종의 무기를 접수하여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하고, 6일 순창으로 들어가 무력을 보강하고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다시 회군하여 오산촌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와 돈헌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때 중군장 정시해가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 틈에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면암의 곁에는 20여 명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의병들이 대항하지 않자, 적은 포위망을 좁혀 왔으며, 이튿날 전원을 경성으로 압송한다는 황제의 칙명을 전달하였다. 이 때에는 면암과 최제학을 비롯한 13인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이들은 전주를 거쳐 6월 18일 경성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김기술·문달환 등은 석방하고, 최제학·고석진은 구류 4개월, 그리고 면암과 돈헌은 8월 하순 대마도 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최제학은 1907년 1월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의 운구에 참여한 후 지리산 중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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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동상
이재명(1887 - 1910)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였다. 1906년 3월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듣고 평양역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으며 인력거 밑으로 쓰러진 이완용을 난자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에게 붙잡혔다.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0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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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기념관
이재명(1887 - 1910)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였다. 1906년 3월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듣고 평양역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으며 인력거 밑으로 쓰러진 이완용을 난자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에게 붙잡혔다.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0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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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 묘
김순희(1908 - 1933)는 제주(濟州) 사람이다.1929년 3월말경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재학하고 있던 중 정관진(鄭寬鎭)·김태래(金泰來)·한경석(韓慶錫) 등과 함께 이학종(李學鍾)등이 1927년 3월경에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으로 확대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1929년 5∼6월 서울 관훈동(寬勳洞)에서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세포조직인 독서회를 각급학교에 결성토록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계몽하는데 힘썼으며, 동년 11월말경 서울 봉익동(鳳翼洞) 자택에서 정종근(鄭鍾根)·김태래(金泰來)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으로 붙잡힌 한국인 학생들의 즉시 석방과 식민지 교육정책을 반대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할 것을 논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그는 1931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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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의숙 터
신유의숙은 1921년 독립운동가인 회을 김성숙(金成淑)이 설립한 학교로 가파도의 유지였던 이응신, 이시화, 김옥천, 김한정, 이도일 등의 공으로 1922년 4월 가파 신유의숙이 개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일제강점기 초등교육)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였으며 한글교육과 나라사랑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숙가(교가) 및 교표(모표)에 무궁화를 넣었다는 사유로 1년간 폐교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을 공동체는 배움을 멈추지 않고, 교실 창문을 모포로 막아 호롱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숨어 학생과 어른 모두 주경야독하였다고 한다. 1932년 가파 신유 서당으로 교명을 바꾸어 신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46년 11월 가파국민학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김성숙의 신유의숙은 강문석의 한남의숙, 윤식명의 광선의숙과 함께 대정지역의 3대 사숙이라 통칭하는데, 후일 대정에서 항일인사가 많이 배출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유의숙의 교사들 대부분이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항일민족교육의 중심지로 정평이 나 가파도는 문맹자가 없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성숙(1896-1979)은 제주 출생이며 호는 회을(悔乙)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 김성숙은 가파도 355번지에 터를 잡고 1921년 소규모의 의숙을 세워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 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였다. 이후 마을 중심으로 이동하여 새 학교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당시 900엔(円)을 들여 가파리 275번지 421평 대지 위에 24평짜리 교사(校舍)를 건축하였다. 이후 1924년 신유의숙을 동지인 김한정에게 맡긴 뒤 김성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위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체포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81년 가파도 주민과 문하생들이 김성숙 선생 동상과 신유의숙 설립공로비를 가파초등학교 교정에 세워 그 고마움을 후세에 전하였다. 정부는 2005년 고인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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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규 기념비
강창규(1872 - 1963)는 1918년 10월 제주도 중문면(中文面) 도순리(道順里, 현재 도순동) 법정사(法井寺)에서 주지 김연일(金蓮日)을 중심으로 신도 및 농민들과 함께 일본인관리 축출과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하였다. 이들은 일격에 서귀포를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진로를 바꾸어 중문경찰관주재소(中文警察官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봉기한 세력은 400여 명의 대규모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강정리(江汀里)·도순리 사이 대천(大川)의 서안 부근에서 전선 및 전주 2본을 절단하고 서귀포 중문리의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태우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궐석재판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았고, 4년의 도피 끝에 1922년 12월 28일 체포되어 징역 8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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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석 구 묘
김만석(미상 - 1909)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고승천(高承天) 의진에 참여하여 제주에서 활약하였다. 김만석은 1902년 2월 25일 제주 광양동(廣陽洞)에서 고승천·이중심(李中心)·김석명(金錫命)·조병생(趙丙生)·김선일(金先一)·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노상옥(盧尙玉) 등과 거의하고, 고승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고승천 의진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인의 손에 제주 전역이 점령당하게 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는 격문을 비밀리에 제주 전지역에 배포하여 거의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 때 그는 고승천·조병생·김재돌·노상옥 등과 더불어 대정(大靜)군 영낙리(永樂里)·신평리(新坪里)·광청리(光淸里)·안성리(安城里) 등에서 의병 300여 명을 모으고, 군수품을 수합하여 의진 편성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3월 1일 그는 동광청리 민가에서 고승천과 함께 대정주재소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월 4일 고승천과 더불어 포승을 끊고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탈출하다가 대정 동문 밖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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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김만석(미상 - 1909)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고승천(高承天) 의진에 참여하여 제주에서 활약하였다. 김만석은 1902년 2월 25일 제주 광양동(廣陽洞)에서 고승천·이중심(李中心)·김석명(金錫命)·조병생(趙丙生)·김선일(金先一)·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노상옥(盧尙玉) 등과 거의하고, 고승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고승천 의진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인의 손에 제주 전역이 점령당하게 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는 격문을 비밀리에 제주 전지역에 배포하여 거의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 때 그는 고승천·조병생·김재돌·노상옥 등과 더불어 대정(大靜)군 영낙리(永樂里)·신평리(新坪里)·광청리(光淸里)·안성리(安城里) 등에서 의병 300여 명을 모으고, 군수품을 수합하여 의진 편성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3월 1일 그는 동광청리 민가에서 고승천과 함께 대정주재소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월 4일 고승천과 더불어 포승을 끊고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탈출하다가 대정 동문밖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고사훈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늑결되자, 호남의 의병장인 최익현(崔益鉉)과 신돌석(申乭石)이 의거의 기치를 올렸음을 듣고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여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1908년 김석윤(金錫允)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장성(長城) 출신 의병장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등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주(濟州) 및 광양(光陽)에서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한 무기를 비밀히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황사평(黃蛇坪)에서 훈련시킨 후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이때 김석윤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參謀) 및 모병책(募兵責)을 맡아 활약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2월 10일 국운이 풍전등화에 이르게 되자 의병운동을 거도적(擧島的)인 규모로 확대하여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인 김만석(金萬石)을 대동하고 대정(大靜)에서 창의 격문(倡義檄文)을 살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적에게 체포되어 음력 2월 13일 서광리(西廣里)에서 김만석과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제주시에는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의병항쟁기념탑이 건입동에 세워져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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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탑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1918년 10월 제주도에서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며 대규모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던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법정사가 있던 곳이다. 법정사는 1909년 관음사를 창건한 안봉려관(安逢廬觀)과 김석윤(金錫允)이 한라산 남쪽을 대표할 사찰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음사 다음으로 일으켜 세운 사찰로서, 1911년 9월 좌면 도순리 산 1번지에 창건되었다. 이 법정사에 1914년 경북지역에서 김인수·정구용과 함께 항일운동의 이력을 갖고 있던 김연일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방동화 등과 함께 이곳을 대대적인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법정사는 1918년 9월경 곤봉, 화승총, 깃발 등을 준비한 뒤 거사를 지휘할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1918년 10월 5일과 6일, 법정사 정기 예불일에 모인 사람들과 7일 새벽, 출정식을 갖고 도순리로 향하였다. 선봉대가 각 마을에서 참여자를 모집하였고 영남리·서호리·강정리·호근리를 순회하며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으며, 하원리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하였다.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 마을에서 700여명이 동조하여 참여하였다. 주민과 합세하여 힘을 얻은 이들은 중문리경찰관주재소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으며 일제에 구금되어 있었던 농민 10여명을 석방한 뒤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 그러나 항쟁은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의 저지로 제주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일제에 피체되어 검거된 인원은 60여명이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은 대상자는 30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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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현 기념비
변성현(1916 - 1938) 선생은 제주 서귀포 사람이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성현은 1931년 3월 서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3년경 사회주의 사상을 방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서귀면(西歸面) 법환리(法還里), 속칭 막원포(莫遠浦) 해안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변성현은 독서회 회원들과 수차례 모임을 갖고 민족의식의 고취, 일본 제국주의 비판, 무산자 계급 의식 고양 등을 주요 주제로 토론하고 일제의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차별 정책을 비판하였다. 1935년에는 집안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품앗이 형태의 갈개[호미]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과 부녀자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하다가 6월경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변성현은 1935년 10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37년 6월 4일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365일 통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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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붕해 묘
강붕해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8년 겨울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羅神父: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에게,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발진하여 중국의 상해(上海) 남경(南京) 방면을 도양폭격(渡洋爆擊)하고 있는데, 아마도 비행장 지하실에 폭탄을 저장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군사시설에 관한 정보에 제공하였다. 또한 1939년 9월경에도 나 신부에게 "중국군 비행기가 전라남도 목포(木浦)에 폭격하러 왔다가 일본 해군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말하였고, 1941년 9월경에는 "중국에 출정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적고, 오히려 다수의 군대는 소련 및 영미와 일전을 벌이려고 대기 중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을 통해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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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근 묘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부(光州府)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폐, 민족해방 등을 요구하는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강봉근(1908 - 1968)은 전라남도 여수공립수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됐다. 남은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천명했으나, 그를 포함한 2학년 11명, 1학년 9명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