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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기미 3.1운동 기념비
운암 기미 3.1 운동 기념비는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중 하나이며, 임실 지역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최동안, 김정갑 등이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1983년 6월에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3·1독립운동이 막 시작된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천도교구장 한영태(韓榮泰, 1878~1919)는 전주교구실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강계대(姜啓大·1884~1971), 박판덕(朴判德·1900~1936), 우성오(禹成五, 1880~1943), 황성진(黃成?·1868~미상), 김영원(金榮遠·1853~1919), 박성근(朴成根·1855~1925) 등 교도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각 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3월 12일 임실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비롯하여 임실 각 지역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잇달았다. 한영태를 비롯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던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한영태와 김영원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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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태 묘
한영태(1878 - 1919)는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배포하였다. 그는 당시 임실군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3월 2일 전주(全州)교구실로부터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즉시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신자인 강계대(姜啓大)·박판덕(朴判德)·한준석(韓俊錫)·최양옥(崔養玉)·우성오(禹成五)·황성진(黃成 )·김영원(金榮遠)·박성근(朴成根) 등과 만나, 이의 배포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에 강계대에게 9매를 주어 읍내의 장터·학교·경찰서·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하고, 한준석·김영원은 운암면(雲岩面)내의 입석리(立石里)·선거리(仙居里)·학산리(鶴山里) 일대에, 박판덕 등 다른 신도들에게도 자기 거주면내와 이웃면내에 게시하게 하여, 3월 12일의 임실읍 독립만세시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전주(全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혀를 깨물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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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욱 유허비
노병욱(1887 - 1924)은 전북 임실(任實) 출신으로 이석용 의진(李錫鏞 義陣)에 참여하여 임실·진안(鎭安)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1908년 8월 전북 진안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 임실 출신의 유생 이석용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었다. 이석용은 1908년 9월 성재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자 종사(從事)로 참여하여 고창(高敞)에서 일본군 병참을 습격하였고, 용담(龍潭)에서는 김동신 의진(金東臣 義陣)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하여 의병진을 해산하고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 이석용의 고향 친구인 노병욱은 임실 지역의 거부(巨富)로 자신은 물론 처가의 재산까지 의병진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고, 각처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7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이석용 의진에 합류하여 1908년 3월 20일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태평리(太平里) 대운고개에서 일경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 1908년 음력 4월 11일 전북 전주군 상관면(上關面) 서준보(徐俊甫)의 집에서 그 곳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醵出)하였으며, 같은 면의 노동(蘆洞)에서도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5일에는 임실군 상북면(上北面) 사일리(士日里) 김미지(金美旨)에게 ‘엽전 300냥을 기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09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미결상태로 7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동년 8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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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3.1동산
임실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운동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동산이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기미년 3.1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충의의 고장인 임실 오수면 오수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3월 10일 만세시위가 시작 되었다. 임실읍내에서도 3월 12일에 2천 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게 된다.3월 23일 오수리 장날에는 이기송을 비롯한 2천 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또한 청웅면 비롯한 지사면, 강진면, 신덕면, 성수면, 운암면 등 인근 면 뿐 만 아니라 남원, 순창, 장수 등 에서도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 3월 15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이 4월 7일까지 지석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기간 동안 수 십 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겪었다.오수의 3.1독립만세 운동은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인과 교육자와 학생 민중들이 함께 일치단결한 항일항쟁 이었다.이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진 3.1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이 되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는 밑거름이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3·1동산을 건립하였다. 514평의 3.1 동산 내 부대시설은 기념비 외 독립 선언비, 팔각정, 3.1문 등이 있다. 3.1동산 내의 3.1운동 기념비는 기미년의 숭고한 3.1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임실지역의 뜨거운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며 희생당하신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기위해 세워졌다. 동아일보사가 창간 58주년을 기념하여 임실 3.1운동 기념비 건립위원회의 협력을 받아 1977년 3월 1일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충절을 기리고 후세들의 애국심 함양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이 기념비를 2002년 11월 1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항구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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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 3.1독립운동기념탑
임실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12일까지 임실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3월 12일 임실읍 장날 임실읍 장터(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소재)[현 임실읍 이도리 762 일대]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1000여 명이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청웅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5일 오후 9시경 구고리(九臯里)에서 1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16~7일에는 박용식(朴庸植)·이강세(李康世)·이기섭(李起燮)·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한기수(韓淇洙)·한도수(韓道洙) 등이 구고리에서, 박준창(朴準昌)·정필조(鄭弼朝) 등 약 150명은 남산리(南山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석두리(石頭里)·옥전리(玉田里)에서도 약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21일에는 구고리와 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경찰서에 몰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석방 시위를 하였다. 3월 20~21일에는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 김영필(金泳弼)·최기현(崔基鉉)·최상학(崔相鶴)·최영렬(崔永烈)·한인석(韓麟錫)이 50여 명의 군중에게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한 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3일 갈담 장날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 엄길영(嚴吉永)·이중혁(李重赫) 등이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신덕면(新德面)의 나학용(羅學用)·한정교(韓正敎) 등이 삼길리(三吉里)와 신흥리(新興里)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김제룡(金濟龍)·문성술(文成述)·송귀남(宋貴男)·송성학(宋性學)·최극삼(崔極三) 등이 성수면 오봉리(五峰里)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2일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영원(金榮遠)이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부를 받아 선거리(仙居里)·입석리(立石里)·학산리(鶴山里) 등지에 붙이고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임실에서는 3·1운동으로 80여 명이 옥고를 치렀는데, 그 중 김영원과 한영태는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임실군의 3·1운동은 1달 이상 지속되면서 임실군 전역에서 일어났다. 형을 받은 사람만 80여 명에 이를 만큼 대대적인 시위였으며,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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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웅 기미3.1독립운동 기념비
청웅기미3.1독립운동기념비는 청웅면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이다. 청웅면은 마한으로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군.현의 중심지였고 외침의 국난기마다 많은 층의 열사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경술국치로 국권상실의 비운속에 기미년 3월은 겨레가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대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구고면 선거리 감나무골에 일찍이 삼요정을 짓고 기미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두 분인 박준승 양한묵 선생 등 애국지사를 양성한 김영원 선생이 이 곳 구고리 양지마을에 삼화학교를 설립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의 선봉에 서자 그 제자들이 임실 각 지역 3.1독립운동 지도자가 되었으며 청웅면민들도 떨쳐 일어나섰으니 그 과정을 살펴보면 3월 2일 삼화학교 출신인 박성근 지사가 임실 천도교 교구에서 밤은 독립선언서를 장남 원엽씨가 면사무소 게시판에 붙여 불길을 올리자 3월 11일 100여 군중이 구고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른 후 3월 15일 현 기념공원 입구 느티나무 아래 수백 군중이 모여 본부를 설치하고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후 면내 각 마을을 순회 행진하며 독립만세 고창 3월 16일 17일 남산리, 옥전리를 왕래하며 야간 횃불 군중시위 계속 3월 21일 주민 대표 15명이 임실경찰서에 구속된 독립투사 석방을 요구하며 감방 농성 투쟁 1925년 봄 청웅면 농악단의 풍물놀이를 강제해산 시킨 왜경 사또를 결박하여 모랫재에 끌고 가 생매장을 위협하는 등 면민들의 저항운동은 광복 그날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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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 집결지 표지석
이 표지석이 놓인 곳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던 곳으로 1919년 3월 11일과 15일에 청웅면민들이 본부를 정하고 독립선언 경축식을 거행한 장소이다. 당시 청웅면에서 있었던 질서정연한 만세 운동과 독립운동 주동자로 옥살이를 한 청웅면의 11분들 영혼과 면민들의 숭고한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을 세웠다. 임실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12일까지 임실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3월 12일 임실읍 장날 임실읍 장터(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소재)[현 임실읍 이도리 762 일대]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1000여 명이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청웅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5일 오후 9시경 구고리(九臯里)에서 1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16~7일에는 박용식(朴庸植)·이강세(李康世)·이기섭(李起燮)·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한기수(韓淇洙)·한도수(韓道洙) 등이 구고리에서, 박준창(朴準昌)·정필조(鄭弼朝) 등 약 150명은 남산리(南山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석두리(石頭里)·옥전리(玉田里)에서도 약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21일에는 구고리와 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경찰서에 몰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석방 시위를 하였다. 3월 20~21일에는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 김영필(金泳弼)·최기현(崔基鉉)·최상학(崔相鶴)·최영렬(崔永烈)·한인석(韓麟錫)이 50여 명의 군중에게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한 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3일 갈담 장날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 엄길영(嚴吉永)·이중혁(李重赫) 등이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신덕면(新德面)의 나학용(羅學用)·한정교(韓正敎) 등이 삼길리(三吉里)와 신흥리(新興里)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김제룡(金濟龍)·문성술(文成述)·송귀남(宋貴男)·송성학(宋性學)·최극삼(崔極三) 등이 성수면 오봉리(五峰里)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2일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영원(金榮遠)이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부를 받아 선거리(仙居里)·입석리(立石里)·학산리(鶴山里) 등지에 붙이고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임실에서는 3·1운동으로 80여 명이 옥고를 치렀는데, 그 중 김영원과 한영태는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임실군의 3·1운동은 1달 이상 지속되면서 임실군 전역에서 일어났다. 형을 받은 사람만 80여 명에 이를 만큼 대대적인 시위였으며,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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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기 기적비
전석기(1860 - 1925)는 1908년 12월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던 정성련(鄭聖連)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간 뒤, 제2초(哨)의 십장(什長)이 되어 수십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전주(全州)·금구(金溝)·태인(泰仁)·임실 등지에서 1909년 3월까지 활동하다가 일제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09년 6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내란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7월 3일 대구공소원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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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기 묘
전석기(1860 - 1925)는 1908년 12월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던 정성련(鄭聖連)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간 뒤, 제2초(哨)의 십장(什長)이 되어 수십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전주(全州)·금구(金溝)·태인(泰仁)·임실 등지에서 1909년 3월까지 활동하다가 일제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09년 6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내란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7월 3일 대구공소원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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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근 묘
박성근(1855 - 1925)은 임실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와 3·1독립운동에 관한 연락이 천도교 전주교구(全州敎區)를 통하여 임실군 천도교 교구에 도착한 1919년 3월 2일, 그는 천도교 전교사(傳敎師) 최양옥(崔良玉)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그가 거주하는 청웅면(靑雄面) 지역을 책임맡아 배포하였다. 또한 그는 장남 원엽(元葉)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청웅면사무소 게시판에 붙이게 하였으며 장차 우리나라가 독립할 것이므로 일제에 반대하라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리하여 4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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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승 옥중시비동상
박준승(1866 - 1927)의 호는 자암이며, 3·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5세 때부터 2년간 김영원에게 유학(儒學)을 배웠다. 24세가 되던 1890년 4월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에서 동학농민군으로 가담하였다. 동학운동 이후 동학 교단을 재건하는 일에 나섰다. 1904년 동학 교단에서 문명개화운동을 위해 진보회를 조직하자, 임실 지회를 결성해 활동하였다. 1906년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한 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설립하였다. 1912년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에 올랐다. 1919년 2월 24일 상경하여 다음 날 손병희와 권동진을 만나 독립선언식 준비 소식을 듣고 민족 대표로서 참여하는 데 동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29명의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다. 1925년 천도교단이 신파와 구파로 나뉠 때 구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 3월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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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 은둔지
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는 동학의 2세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이 장수교인 김신종을 데리고 주치리 새목티 허선의 집에서 35일간의 설법을 시작하신 것이 처음이며 강진면에서 15일간 설법한 곳이다. 해월신사 은둔지는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이 1894년 9월 동학 우금치 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며 상황을 주시하였던 곳이다. 11월 25일 김제 원평에서 전봉준과 함께 손병희 동학군이 후퇴하여 갈담을 거쳐 찾아온 손병희(3세 교주)를 만나 12월 초 충청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