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독립운동 집결지 표지석
사적지 개요
이 표지석이 놓인 곳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던 곳으로 1919년 3월 11일과 15일에 청웅면민들이 본부를 정하고 독립선언 경축식을 거행한 장소이다. 당시 청웅면에서 있었던 질서정연한 만세 운동과 독립운동 주동자로 옥살이를 한 청웅면의 11분들 영혼과 면민들의 숭고한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을 세웠다.
임실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12일까지 임실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3월 12일 임실읍 장날 임실읍 장터(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소재)[현 임실읍 이도리 762 일대]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1000여 명이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청웅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5일 오후 9시경 구고리(九臯里)에서 1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16~7일에는 박용식(朴庸植)·이강세(李康世)·이기섭(李起燮)·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한기수(韓淇洙)·한도수(韓道洙) 등이 구고리에서, 박준창(朴準昌)·정필조(鄭弼朝) 등 약 150명은 남산리(南山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석두리(石頭里)·옥전리(玉田里)에서도 약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21일에는 구고리와 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경찰서에 몰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석방 시위를 하였다. 3월 20~21일에는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 김영필(金泳弼)·최기현(崔基鉉)·최상학(崔相鶴)·최영렬(崔永烈)·한인석(韓麟錫)이 50여 명의 군중에게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한 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3일 갈담 장날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 엄길영(嚴吉永)·이중혁(李重赫) 등이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신덕면(新德面)의 나학용(羅學用)·한정교(韓正敎) 등이 삼길리(三吉里)와 신흥리(新興里)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김제룡(金濟龍)·문성술(文成述)·송귀남(宋貴男)·송성학(宋性學)·최극삼(崔極三) 등이 성수면 오봉리(五峰里)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2일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영원(金榮遠)이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부를 받아 선거리(仙居里)·입석리(立石里)·학산리(鶴山里) 등지에 붙이고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임실에서는 3·1운동으로 80여 명이 옥고를 치렀는데, 그 중 김영원과 한영태는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임실군의 3·1운동은 1달 이상 지속되면서 임실군 전역에서 일어났다. 형을 받은 사람만 80여 명에 이를 만큼 대대적인 시위였으며,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임실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12일까지 임실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3월 12일 임실읍 장날 임실읍 장터(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소재)[현 임실읍 이도리 762 일대]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1000여 명이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청웅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5일 오후 9시경 구고리(九臯里)에서 1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16~7일에는 박용식(朴庸植)·이강세(李康世)·이기섭(李起燮)·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한기수(韓淇洙)·한도수(韓道洙) 등이 구고리에서, 박준창(朴準昌)·정필조(鄭弼朝) 등 약 150명은 남산리(南山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석두리(石頭里)·옥전리(玉田里)에서도 약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21일에는 구고리와 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경찰서에 몰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석방 시위를 하였다. 3월 20~21일에는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 김영필(金泳弼)·최기현(崔基鉉)·최상학(崔相鶴)·최영렬(崔永烈)·한인석(韓麟錫)이 50여 명의 군중에게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한 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3일 갈담 장날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 엄길영(嚴吉永)·이중혁(李重赫) 등이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신덕면(新德面)의 나학용(羅學用)·한정교(韓正敎) 등이 삼길리(三吉里)와 신흥리(新興里)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김제룡(金濟龍)·문성술(文成述)·송귀남(宋貴男)·송성학(宋性學)·최극삼(崔極三) 등이 성수면 오봉리(五峰里)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2일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영원(金榮遠)이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부를 받아 선거리(仙居里)·입석리(立石里)·학산리(鶴山里) 등지에 붙이고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임실에서는 3·1운동으로 80여 명이 옥고를 치렀는데, 그 중 김영원과 한영태는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임실군의 3·1운동은 1달 이상 지속되면서 임실군 전역에서 일어났다. 형을 받은 사람만 80여 명에 이를 만큼 대대적인 시위였으며,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탐방로그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494-1 양지교 앞 3.1독립운동집결지 표지석은 기미만세공원의 입구에 있다.
인물정보
- 성명
- 박성근
- 한자명
- 朴成根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55 ~ 1925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3.2 전북(全北) 임실군(任實郡) 청웅면사무소(靑雄面事務所) 앞 게시판(揭示板)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게시(揭示)하도로고 장남(長男)에게 지시(指示)하고 장래(將來) 우리나라는 독립(獨立)을 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일본 정부(日本政府)를 반대(反對)한다는 독립 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하였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1월 7일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박성근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박용식
- 한자명
- 朴庸植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81 ~ 1958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3.16~19 3일간에 걸쳐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구고리(九皐里) 동내(洞內) 중앙(中央)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선창(先唱)하고 운집(雲集)한 200여명(余名)의 시위 군중(示威群衆)과 함께 동내(洞內)를 순회(巡廻)하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시위(示威)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용식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박준창
- 한자명
- 朴準昌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90 ~ 1962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 3. 16~17 양일(兩日)에 걸쳐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에서 동리민(洞里民) 15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준창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양성도
- 한자명
- 楊成道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80 ~ 1960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포상년도
- 1995
공적개요
1919.3월초(月初) 전북(全北)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 소재 예수교병원 사무원으로 있던 중 동리(同里) 소재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교사 이두열(李斗悅), 김수영(金洙榮), 박연세(朴淵世) 등과 3월 6일 군산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양성도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강세
- 한자명
- 李康世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94 ~ 1937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919.3.16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에 참가(參加)하다, 체포(逮捕)되어 1919.4.16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징역 1년6 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강세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기섭
- 한자명
- 李起燮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81 ~ 1969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 3. 16~19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구고리(九臯里)에서 많은 군중과 함께 리내(里內)를 돌아다니며 3일간에 걸쳐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기섭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성의
- 한자명
- 李聖儀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84 ~ 1938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 3. 16~19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에서 시위군중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동리(洞里)를 순회 시위(巡廻示威)를 하다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성의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정필조
- 한자명
- 鄭弼朝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61 ~ 1930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포상년도
- 1992
공적개요
1919. 3. 16 전북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뒷산에서 주민(住民) 150여명(餘名)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정필조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최종수
- 한자명
- 崔宗洙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97 ~ 1974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 3. 16~19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에서 시위군중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리(洞里)를 순회(巡廻) 시위(示威)를 하다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최종수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한기수
- 한자명
- 韓基琇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미상 ~ 1927
- 본적
- 미상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2009
공적개요
1923년 중국(中國) 길림(吉林) 연길(延吉)에서 적기단(赤旗團) 모연대(募捐隊) 장철(張澈)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 순국(獄死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한기수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한도수
- 한자명
- 韓道洙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901 ~ 1942
- 본적
- 전라북도 임실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3.16~19 3일간에 걸쳐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구고리(九皐里)에서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의 주동(主動)이 되어 다수(多數)의 시위 군중(示威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여 시위(示威)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한도수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