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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사당(서강사)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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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사적비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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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식 집
장현식(1896 - 미상)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 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 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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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동농민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본 사적은 1919년 3월 20일 원평장터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룬 8명의 애국투사들과 만세운동에 참여한 어유동 농민들을 기리는 사적이다. 당시 이 마을은 40여호의 농촌으로서 전부 가난한 농민들이었지만, 주민들 대다수가 동학농민군의 후예들이었고 특히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전도명은 원평 구미난 싸움의 동학농민군 출신이었다. 만세운동 당일 이 마을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원평장터로 달려가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대표 8명은 일본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그 이튿날 새벽에 일본헌병 100여 명이 이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을 하였다. 군화발로 안방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뒤지고 노인 부녀자 할 것 없이 발로 걷어차며 총대로 욱박질렀다. 그러나 이 마을 농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위와 같은 어유동 농민들의 숭고한 독립투쟁정신을 받들고 길이 기억하고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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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사적비
정현섭(본명 정화암, 1896 - 1981)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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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렬등88애국지사충혼비
김형렬선생등 88애국지사 충혼비는 김형렬 선생 외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애국지사를 기리는 사적이다. 김형렬 성도의 미륵불교는 김구 선생에게 직접 자금을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자금은 성공적으로 전달됐지만, 두 번째 자금은 불행히도 발각되어 전도자가 해외로 도피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김제의 일본 헌병대가 금산사 미륵전을 습격해 김형렬 성도 등 미륵불교 신도 88명을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후 위의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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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배 추모비
김인배(1870 - 1894)는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의 최고 지도자를 가리키는 영호대접주란 직책을 맡았다. 그가 중심이 된 영호도회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역과 연대한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벌인 사례로 동학농민혁명에 기록되고 있다. 김인배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영호남 연합군이 순천에 본영을 두고 인근 광양현과 낙안군, 좌수영 지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하동과 진주 등 서부경남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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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구미란전적지
구미란 전적지는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당한 곳이다. 우금치 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은 논산, 전주를 거쳐 원평으로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1894년 12월 21일(음력 11월 25일) 동학농민군 원편 구미산에 품자 모양의 진을 치고 있었고, 관군과 일본군은 구미산에서 진을 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날 전투는 손시(오전8시30분~9시30분)부터 신시(오수3시~5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흩어진 동학농민군이 구미산에 남기고 간 군수품은 탄환 7섬, 화약 5궤짝, 쌀500섬 돈 3,000냥 등 이었다. 현재 구미란 전적지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이름없는 농민군의 무덤이 다수 남아있는데 1994년부터 구미마을에서는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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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원평장터 만세운동)
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는 본디 보은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지를 다졌던 집회였으나 오히려 보은집회의 방향을 돌리는 구실을 하였다. 단순한 포교의 공인을 넘어서 사회 운동·정치 운동으로 집회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893년 계사년에 일어난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한 인물은 김덕명과 전봉준으로 확인된다. 1892년부터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계속하던 동학 교단은 이듬해에 교조(敎祖) 최수운(崔水雲)이 1864년(고종 1) 대구감영에서 참수당한 날인 3월 10일을 기해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밀양, 전라도 원평에서 일제히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쪽의 충청도 보은집회와 때를 같이하여 남쪽의 전라도 원평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덕명을 비롯하여 전봉준·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化中)·최경선(崔景善) 등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집회를 주도하였다. 또 남접에 속하는 서장옥(徐璋玉)·황하일(黃河一)의 세력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기에 원평집회는 곧 터질 듯한 강렬한 분위기였다. 불갑사·백양사·선운사 등 전라도 유명 사찰의 승려들도 참여하였고, 이들 속에는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직업적 봉기꾼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보은집회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곧바로 제물포로 달려가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원평집회를 이끌면서 관의 주목을 피하고자 이름을 자(字)인 명숙(明叔)으로 바꾸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명성은 이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무장에서 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황토현에 이어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오를 정비한 뒤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갈재를 넘어 내달아 1893년 3월 13일 원평에 이르렀다. 원평에 설치한 대장소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전봉준이 원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이 보낸 이효응(李效應)과 배은환(裵垠煥)이 왕의 편지를 들고 대장소로 전봉준을 찾아왔고, 이주호는 하인 2명을 데리고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들고 찾아왔다. 전봉준은 내탕금을 빼앗은 뒤 원평 장터에 군중을 모아 놓고 이들의 목을 베어 시체를 마을 뒤에 버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증명서와 문서는 시체 위에 던졌다. 왕이 보낸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았다. 좀처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봉준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전봉준과 농민군은 감영군과 중앙군을 격파하고 왕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내탕금마저 빼앗았으니 영락없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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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 추모비
김덕명(1845 - 189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하였던 동학농민군 대접주이다.1886년에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 등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금구 지역의 대접주(大接主)였다. 1886년에 동학에 입도한 그는 1887년에 원평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포교에 힘썼고, 1891년 6월에는 교주 최시형이 원평에 있는 김덕명의 집으로 와서 많은 도인들을 만나 포덕(布德) 행사를 벌였다. 1892년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는 원평집회를 주도하였으며, 1893년 2월에는 광화문 복합상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94년 4월 무장기포 이후 백산집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 등에서도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아울러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에는 원평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지휘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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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추모비
이종희(1890 - 1946)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를 거쳐 광동(廣東)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를 졸업하고 상해(上海) 남경(南京)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중국군 부대 상위연장(上尉連長)으로 복무하면서 남경(南京)에서 의열단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하여 군사국 특무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제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김약산(金若山)·박효삼(朴孝三)·이익성(李益星)·김세일(金世日) 등과 함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조선혁명청년들에게 정확한 전투적 정치 노선을 제시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의 소교(少校)로 임명되어 총무조장으로 복무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 본부는 중경(重慶)에 있었으며, 주로 대원들의 군량 수급 사무,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훈련과 연합군측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요청할 경우의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지대장 특명으로 수시 적 점령지구로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 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는 초대 지대장인 김약산(金若山)의 뒤를 이어 제2대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전라도 의원선거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 시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광복군 고급참모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귀국 도중 선중(船中)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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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원평집강소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다. 1894년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군 전봉준 장군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관민상화의 원칙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건물은 백정 출신 동록개가 대접주 김덕명 장군에게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헌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신분을 해방하는 등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전라도 일대에 설치되어 농민통치를 실시했던 집강소는 지방 자치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집강소를 바탕으로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등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은 집강소를 통한 농민의 권력 참여는 한국 근대사의 새 장을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집강소의 운영은 동학농민혁명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