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원평장터 만세운동)
사적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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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는 본디 보은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지를 다졌던 집회였으나 오히려 보은집회의 방향을 돌리는 구실을 하였다. 단순한 포교의 공인을 넘어서 사회 운동·정치 운동으로 집회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893년 계사년에 일어난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한 인물은 김덕명과 전봉준으로 확인된다. 1892년부터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계속하던 동학 교단은 이듬해에 교조(敎祖) 최수운(崔水雲)이 1864년(고종 1) 대구감영에서 참수당한 날인 3월 10일을 기해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밀양, 전라도 원평에서 일제히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쪽의 충청도 보은집회와 때를 같이하여 남쪽의 전라도 원평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덕명을 비롯하여 전봉준·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化中)·최경선(崔景善) 등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집회를 주도하였다.
또 남접에 속하는 서장옥(徐璋玉)·황하일(黃河一)의 세력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기에 원평집회는 곧 터질 듯한 강렬한 분위기였다. 불갑사·백양사·선운사 등 전라도 유명 사찰의 승려들도 참여하였고, 이들 속에는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직업적 봉기꾼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보은집회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곧바로 제물포로 달려가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원평집회를 이끌면서 관의 주목을 피하고자 이름을 자(字)인 명숙(明叔)으로 바꾸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명성은 이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무장에서 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황토현에 이어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오를 정비한 뒤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갈재를 넘어 내달아 1893년 3월 13일 원평에 이르렀다. 원평에 설치한 대장소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전봉준이 원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이 보낸 이효응(李效應)과 배은환(裵垠煥)이 왕의 편지를 들고 대장소로 전봉준을 찾아왔고, 이주호는 하인 2명을 데리고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들고 찾아왔다. 전봉준은 내탕금을 빼앗은 뒤 원평 장터에 군중을 모아 놓고 이들의 목을 베어 시체를 마을 뒤에 버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증명서와 문서는 시체 위에 던졌다. 왕이 보낸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았다. 좀처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봉준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전봉준과 농민군은 감영군과 중앙군을 격파하고 왕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내탕금마저 빼앗았으니 영락없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다.
또 남접에 속하는 서장옥(徐璋玉)·황하일(黃河一)의 세력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기에 원평집회는 곧 터질 듯한 강렬한 분위기였다. 불갑사·백양사·선운사 등 전라도 유명 사찰의 승려들도 참여하였고, 이들 속에는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직업적 봉기꾼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보은집회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곧바로 제물포로 달려가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원평집회를 이끌면서 관의 주목을 피하고자 이름을 자(字)인 명숙(明叔)으로 바꾸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명성은 이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무장에서 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황토현에 이어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오를 정비한 뒤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갈재를 넘어 내달아 1893년 3월 13일 원평에 이르렀다. 원평에 설치한 대장소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전봉준이 원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이 보낸 이효응(李效應)과 배은환(裵垠煥)이 왕의 편지를 들고 대장소로 전봉준을 찾아왔고, 이주호는 하인 2명을 데리고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들고 찾아왔다. 전봉준은 내탕금을 빼앗은 뒤 원평 장터에 군중을 모아 놓고 이들의 목을 베어 시체를 마을 뒤에 버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증명서와 문서는 시체 위에 던졌다. 왕이 보낸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았다. 좀처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봉준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전봉준과 농민군은 감영군과 중앙군을 격파하고 왕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내탕금마저 빼앗았으니 영락없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다.
인물정보
- 성명
- 전봉준
- 한자명
- 全琫準
- 운동계열
- 해당없음
- 생몰년도
- 1855.01.10 ~ 1895.04.24
- 본적
- 전라북도 고창
- 포상훈격
- 해당없음
- 포상년도
- 해당없음
공적개요
전봉준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손화중
- 한자명
- 孫華仲
- 운동계열
- 해당없음
- 생몰년도
- 1861.6.17 ~ 1895.3.30
- 본적
- 전라북도 정읍
- 포상훈격
- 해당없음
- 포상년도
- 해당없음
공적개요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동학의 대접주(大接主)이자,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주역으로서, 1차 봉기에서 총관령을 맡아 무장·고창 지역과 장성·광주 인근 지역의 농민군을 통솔하여 황토현·황룡촌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1894년에는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재차 봉기하여 광주 일대를 지키며 전쟁에 필요한 돈이나 식량을 조달하였으나 대세가 기울어지자 12월에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1895년 1월, 손화중의 아들을 생포한 관군의 협박으로 일본군에 인계된 후 나주 감옥에 갇혔다. 같은 해 3월 29일에 전봉준, 최경선, 김덕명 등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손화중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김개남
- 한자명
- 金開南
- 운동계열
- 해당없음
- 생몰년도
- 1853.9.15 ~ 1894.12.3
- 본적
- 전라북도 정읍
- 포상훈격
- 해당없음
- 포상년도
- 해당없음
공적개요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大接主)이자,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華仲)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다. 1894년 초 전봉준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주도하자,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을 일으켜 4월에는 백산(白山)에 동학 운동본부인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총관령(總管領)을 맡았다.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 요충지인 남원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진입하였고, 남원 진입 후 적극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라도 동북부 군현들의 동학 조직을 장악하였으며, 경상도 함양과 안의까지 세력권 확대를 시도하였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뒤, 재봉기를 시도하여 1894년 10월경에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임실을 거쳐 전주로 들어와 활약하였다. 이후 11월 들어 북상할 계획을 시도하여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을 점령하였고, 이튿날 신탄진(新灘津)을 거쳐 청주를 공격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기습을 당하였다. 이후 전라도로 돌아간 김개남은 대군의 위세를 유지하지 못하다가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김개남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김덕명
- 한자명
- 운동계열
- 해당없음
- 생몰년도
- ~
- 본적
- 포상훈격
- 포상년도
공적개요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운동은 총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 2차 봉기는 일제의 내정간섭 및 갑오개혁 등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동학운동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 동학운동을 실패로 이끈 우금치전투 등이 있다.
김덕명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최경선
- 한자명
- 운동계열
- 해당없음
- 생몰년도
- 1859 ~ 1895
- 본적
- 포상훈격
- 포상년도
공적개요
최경선은 동학농민혁명 5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이다.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1894년 정월 전봉준(全琫準)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부민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동학교도 300명을 집에 집결시켰다가 고부농민 1,000여 명과 합세해 고부관아를 습격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 제1차 농민봉기 백산(白山)에서 농민군을 조직할 때, 영솔장(領率將)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서남해안을 돌아 5월 6일 전주성에 입성할 때까지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한편, 5월 7일의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는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돌며 집강소 설치를 감독하였다. 7월에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의 동학접주 오권선(吳權善)의 군대와 합세하여 총공격을 단행했으나 집강소 설치에는 실패하였다.
8월 13일 전봉준이 단신으로 나주성에 입성해 부사 민종렬(閔鍾烈)과 담판해 집강소 설치가 가능해지자,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해 행정을 감독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이 전해진 그 해 9월에 제2차 농민군봉기가 삼례회의(參禮會議)에서 결정되었다. 전봉준을 수행, 정읍·장성·담양·동복·벽성 등지로 순행하며 농민군 봉기를 독려하는 한편, 태인에서 7,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우금치에서의 패전 이후 12월에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수성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孫華中) 등과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개화정권의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최경선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