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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천도교당
1906년 4월 교구장 강봉수(姜琫秀) 등을 중심으로 천도교인들의 모금으로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초가 5칸으로 지었으며 부속 건물은 4칸이었다. 그 뒤 1918년 전남의사원(全南議事員) 신명희(申明熙), 장흥교구장 김재계, 수령 강봉수, 윤세현 등의 주도로 개축하였다. 개축 건물은 성화실(聖化室)과 사무 응접 등의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천도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920년에는 차양실(遮陽室)을 건축하였다. 교당 건물은 전통 목구조 형식의 가옥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의 납도리집이다. 정면에는 출입구로 유도하는 포치(Porch)가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방을 두고 전면에 유리창을 설치하였다. 중앙 3칸은 마루를 깐 대청인데, 가운데 뒷면에는 제단을 놓고 앞면에는 유리창을 사용한 4분합문과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천장은 평천장으로 처리하였다. 왼쪽(향좌)에는 부엌을 덧달았으며 정면과 오른쪽면은 낙수에 대비하여 차양을 기단 밖까지 내어달았다. 건립과 개축에 참여한 인물과 건축 비용(1918년 건립시 모금액 2,300원, 실 건축비 1,600원), 건립 기간 등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고 전통한옥이 근대 공공기관 건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알 수 있어 건축사적, 학술적, 향토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2003년 5월 27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재단법인천도교유지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도교는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외세에 의해 진압된 뒤,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처형되자 도통은 손병희(孫秉熙)에게 전수되었다. 손병희는 초기에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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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엽 의적비
김영엽(1869 - 1910)은 전남 장흥(長興광) 사람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선비를 찾아다니다가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깊게 교제하였다. 한 번은 '사교도(邪敎徒)가 바른 도덕(儒學)을 능멸히 여기는 것'을 보고 수판(手板)으로 때렸는데 후에 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이 일로 혐의를 받게 되어 송사에게로 피신하여 몇 해를 산 일도 있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1906년 의제 정석면(義齋 鄭錫冕)과 함께 의거하였으며, 각 의진을 출입하면서 계책을 일러주고 협조하였다. 이 때 신창영(申昌榮 혹은 申昌學)이 복흥(福興) 산중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군율이 엄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달려갔다. 신창영은 김영엽의 능력을 인정하고 군사 반을 선뜻 떼어 주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06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적에게 체포되고, 다시 그의 의진이 김공삼(金公三)·박도경(朴道京)에 의해 수습되어 다른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도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합진하여 적과 대전하였다. 그 후 전해산(全海山)의 의진과 합진하여 대치(大峙)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였다. 대치 전투는 제 의진들과 연합하여 치른 것으로서, 이 전투에는 전해산·김영엽 의진뿐 아니라 홍재도(洪在道)·신창학·심남일(沈南一)의 의진도 참가하였다. 그 후 자은촌(自隱村)에서 적과 교전하고 전해산 의진과 분진(分陣)하였다. 1908년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여 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심남일 의진에 입진하여 장흥(長興)·강진(康津) 등에서 왜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의진과의 연합전선을 전개하고 이합을 되풀이하는 동안 다른 의병장과는 의기투합할 수 있었으나 유독 유종여(柳宗汝)와는 대민관계에서 의견 차가 크게 벌어졌다. 끝내 유종여가 하수인 황운룡(黃雲龍)·정 섬(鄭蟾)을 시켜서 1910년 장성 운문암(長城 雲門庵)에 유진하고 있던 김영엽을 암살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공삼과 박도경이 호군장 손 형(孫 兄)을 시켜서 하수인을 잡아 총살시켰으나 유종여는 그 후 행방을 감춰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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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장흥 석대 일대는 정읍 황토현, 공주 우금치, 장성 황룡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이며, 대규모 농민군이 참여한 최후, 최대의 격전지이다.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9년에 이어 국가지정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시실에는 동학 관련 각종 책자 및 고문서를 전시하고 있으며, 동학 농민군 및 일본군이 사용했던 무기류도 볼 수 있다. 특히 ‘세계 속의 동학 농민 혁명’ ‘최후의 항쟁, 석대들 전투’ 등의 코너에서는 입체감 있는 영상물을 통해 관람자가 마치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약했던 장태장군 이방언 및 이인환, 이사경, 구교철, 문남택 대접주를 비롯하여 소년 뱃사공 윤성도, 경국지색 여장군 이소사, 열세 살 소년 장수 최동린 등 수많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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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관아 터(농민군 점령지)
장흥·강진 지역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장흥군(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의 박병락(朴炳樂) 부부(부인, 文方禮)가 입도한 1864년이지만, 이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증한 시기는 이인환(李仁煥), 이방언(李邦彦), 문남택(文南澤) 등 지역의 지식인들이 입도하기 시작한 1891년 이후였으며,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이 일어났던 1892·1893년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동학교세가 확산되면서 장흥·강진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와 1893년 1월의 광화문 복합상소, 같은 해 3~4월에 열린 보은과 금구집회에 모두 참가하면서 연대의식을 키워나갔다. 전주성을 점령했던 농민군은 5월 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해산한 뒤 각기 자기 고을로 돌아왔다. 귀향한 농민군들은 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에 들어갔다. 장흥지방 집강소는 6월 20일경 부산면 자라번지에 가장 먼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라번지는 이사경 접주의 근거지로서 당시 그 세력은 묵촌리의 어산접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이사경이 군수가 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사』에는 6월 20일경 “장흥군 부산면(夫山面) 자라번지(鱉番地)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7월 3일에는 장흥읍내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사」에 따르면 7월 3일 장흥의 농민군이 장흥읍 내로 이동하여 도회(都會)를 열었으며, 농민군들은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혹은 십여인 혹은 수십인, 삼사십인이 길에 끊어지지 않았는데, 서로 부르기를 접장(接長)이라 하였고, 아이들은 동몽접장(童蒙接長)이라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속인(俗人), 자신들은 도인(道人)이라고 하였으며, 상좌(上座)의 사람을 교장(敎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흥의 농민군은 10월 중순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기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사에는 이때 농민군이 “장흥 사창시(社倉市)에 1,000여 명이 모였으며, 영암 덕교(德橋)와 강진 석전시(石廛市)에도 계속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장흥부사 박헌양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수성소를 설치하였다. 장흥 수성군과 벽사역의 역졸, 전라병사 휘하의 병영군까지 동원, 무장 관군은 3천명에 달하였다. 10월 19일부터 벽사역 찰방·장흥부사·강진현감·전라병사들은 일제히 농민군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적지 않은 농민군이 집을 헐리거나 곤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흥·강진 지역 수성군의 위세를 본 농민군은 11월 초순 멀리 함열과 금구 등지의 농민군에게 지원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강진현에서도 10월 29일 순무영에 급보를 보내 강진현의 힘으로는 농민군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장흥의 농민군은 장흥 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11월 하순부터 웅치로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곧 이어 보성으로 이동하였고, 금구(김방서)와 화순(김수근), 능주(조종순) 등지에서 5천여 명이 도착하자, 장흥의 농민군 5,000여명과 합세한 이들은 12월 1일에는 북면 사창으로 진출하였다. 장흥부사 박헌양과 병영의 서병무(徐丙懋) 병사, 그리고 벽사 찰방 김일원(金日遠)과 강진현감 민창호(閔昌鎬)도 농민군의 위세를 듣고 서둘러 대비책을 마련하였다.12월 3일 아침 사창으로부터 벽사역 인근으로 진출한 농민군 1만여 명은 12월 4일 새벽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벽사역관에 포격을 가했다. 이미 역졸들은 도망가 버려 저항하는 세력이 없어 단숨에 점령하고 말았다. 벽사역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점령할 수 있었다. 벽사역을 쉽사리 점령한 농민군이 12월 5일 새벽 장녕성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쌌다. 동이 트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력부대는 정면에 있는 동문에 진군하였다. 죽창을 휘두르는 소리를 신호로 3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동문에 진공했던 농민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파괴하고 입성하였으며, 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하여 남문과 북문으로도 농민군이 입성하였다. 당황한 수성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이 광경을 본 박헌양은 문루에서 내려와 동헌으로 들어갔다. 1시간만에 장녕성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부사 박헌양을 체포하여 문책하였으나, 박헌양은 오히려 성을 내며 꾸짖다가 농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부사 이외에도 농민군의 공격을 막다가 희생된 수성군 장졸의 수는 96명이다. 전사자가 대부분이지만, 붙잡혀 항거하다 처형된 사람도 있었다. 특히 기실(記室, 부사 측근에서 기록을 맡았던 벼슬) 박영수(朴永壽)와 수성별장 임기남(任璂南, 昶南), 통장(統將) 주두옥(周斗玉), 호위장(護衛將) 주열우(周烈佑)도 같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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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를 몰아내어 패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운동이다. 정치는 두루 부패하여 백성들은 지주들과 관리들의 무자비한 늑탈을 견디다 못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먹을 것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았고,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여러 강국들은 우리나라를 넘보는 형편이었다. 이때,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동학도를 중심으로 전봉준 장군을 앞세우고,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자, 서양 세력과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는 깃발을 휘날리며 일어서자, 이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 그해 12월에는 20여만 명의 대군을 헤아렸다. 여기 장흥농민들은 이방언 장군을 앞세우고 남도에서는 가장 거세게 일어나, 특히 관군을 크게 무찌른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눈부시게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가 처음으로 전투에 나선 공주 우금고개 대회전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농민군은 이 공주전투에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신무기에는 당할길이 없었다. 여러번 반격을 꾀하던 농민들은 마지막으로 석대들에서 이곳 농민군을 중심으로 3만여명이 일본군과 회심의 일전을 벌였지만, 이것이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항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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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루
장흥읍 석대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최후의 불꽃이 장렬하게 튀겼던 마지막 격전지이다. 1894년 반봉건, 반외세의 깃발을 들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은 황토재 전투와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뒤 전주에 입성하자 관군과 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 폐정을 개혁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최신 무기의 위력 앞에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이 공주 전투에 이어 태인 전투에서도 패하자 3만여 명의 농민군이 이 지방 출신 이방언 장군의 휘하로 몰려 이곳에 집결했다.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은 패잔병이라고 얕보며 저항하는 이곳 부사를 비롯한 아전 등 관군 95명을 사살하고 강진과 병영성을 무너뜨린 다음 1895년 1월 8일 미니미 소좌가 이끈 일본군 및 관군의 연합 부대와 이 들판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구르프포와 무라다시라이플 등 최신 무기 앞에는 역불급이었다. 농민군은 주로 해남 쪽으로 패퇴했으나 바다에는 일본군 군함이 수십 척 포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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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완 집
고영완(1914 - 1991)은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일본에 유학중인 1939년 12월에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서영원(徐泳原)·윤주연(尹柱淵) 등이 중심 되어 조직한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가하여 동회의 전라도책임자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동회는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 동안에 이들은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고 동경유학생 등 해외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기르는 한편 동지규합 및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동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동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동년 9월에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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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자금헌성기념탑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온 국민의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 민족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역시 우리 민족의 국권을 찾기 위한 독립투쟁 운동이었다. 바로 이 때 장흥군에서도 회진면 명덕을 주축으로 손의암 도주의 교령에 의하여 235명의 의사들이 독립자금 모금에 헌신하였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 총칼의 세월 속에서도 한 줌, 두 줌, 좀도리 쌀을 모으고, 논밭을 팔고, 금반지와 은반지를 모으고, 고추알 바람 속에서 김 한 속, 두 속 모아 상해로 보낼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이러한 독립자금 헌성에 참여했던 선조들의 숭고한 업적을 길이 전하고자, 지난 2001년 2월 12일 독립자금헌성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2003년 3월 14일에 독립자금헌성 기념탑을 건립하기로 의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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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식 추모비
박종식(1911 - 1948)은 전남 진도(珍島) 사람이다. 전남 목포(木浦)공립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光州)에서 대대적인 학생시위항쟁이 벌어져 수십 명이 피검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그는 최창호(崔昌鎬) 등 동교 학생들과 수 차 회합하고, 목포에서도 동월 19일을 기해 동조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재실(李在實)이 「피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木棉) 대기(大旗)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小旗) 약 120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찬규(鄭燦圭)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19일 아침 그들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하여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운동으로 그는 다른 주동학생 21명과 함께 붙잡혀,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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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식 집
박종식(1911 - 1948)은 전남 진도(珍島) 사람이다. 전남 목포(木浦)공립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光州)에서 대대적인 학생시위항쟁이 벌어져 수십 명이 피검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는 최창호(崔昌鎬) 등 동교 학생들과 수 차 회합하고, 목포에서도 동월 19일을 기해 동조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재실(李在實)이 「피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木棉) 대기(大旗)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小旗) 약 120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찬규(鄭燦圭)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19일 아침 그들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하여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운동으로 그는 다른 주동학생 21명과 함께 붙잡혀,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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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행적비
김병규((1865) - 1935)는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189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재종제 김교환(金敎環)과 함께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의진에 참여하였다. 김병규는 김태원 의병의 참모가 되어 기삼연(奇參衍)부대와 연합하여 항쟁하는 등 전술전략을 수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김병규는 김태원의병장과 함께 월현(月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붙잡혀 혹형(酷刑)을 받았다. 그는 1919년 광무황제의 승하소식을 접하고 마을 산에 단(壇)을 쌓고 북향망곡(北向望哭)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문대한독립만세(聞大韓獨立萬歲)]라는 시를 지어 독립을 기원했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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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연 기적비
정기연(1903 - 1983)은 전라남도 함평(咸平) 사람이다. 1920년 3월 26일 함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조사현(曺士鉉)·송대호(宋大浩)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곳의 유지인 조사현·송대호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마침 국장에 참배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에 그는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大洞面),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의 야만적인 무력행사로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결국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