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장흥관아 터(농민군 점령지)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 187-1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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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장흥·강진 지역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장흥군(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의 박병락(朴炳樂) 부부(부인, 文方禮)가 입도한 1864년이지만, 이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증한 시기는 이인환(李仁煥), 이방언(李邦彦), 문남택(文南澤) 등 지역의 지식인들이 입도하기 시작한 1891년 이후였으며,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이 일어났던 1892·1893년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동학교세가 확산되면서 장흥·강진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와 1893년 1월의 광화문 복합상소, 같은 해 3~4월에 열린 보은과 금구집회에 모두 참가하면서 연대의식을 키워나갔다. 
 
전주성을 점령했던 농민군은 5월 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해산한 뒤 각기 자기 고을로 돌아왔다. 귀향한 농민군들은 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에 들어갔다. 장흥지방 집강소는 6월 20일경 부산면 자라번지에 가장 먼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라번지는 이사경 접주의 근거지로서 당시 그 세력은 묵촌리의 어산접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이사경이 군수가 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사』에는 6월 20일경 “장흥군 부산면(夫山面) 자라번지(鱉番地)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7월 3일에는 장흥읍내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사」에 따르면 7월 3일 장흥의 농민군이 장흥읍 내로 이동하여 도회(都會)를 열었으며, 농민군들은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혹은 십여인 혹은 수십인, 삼사십인이 길에 끊어지지 않았는데, 서로 부르기를 접장(接長)이라 하였고, 아이들은 동몽접장(童蒙接長)이라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속인(俗人), 자신들은 도인(道人)이라고 하였으며, 상좌(上座)의 사람을 교장(敎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흥의 농민군은 10월 중순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기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사에는 이때 농민군이 “장흥 사창시(社倉市)에 1,000여 명이 모였으며, 영암 덕교(德橋)와 강진 석전시(石廛市)에도 계속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장흥부사 박헌양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수성소를 설치하였다. 장흥 수성군과 벽사역의 역졸, 전라병사 휘하의 병영군까지 동원, 무장 관군은 3천명에 달하였다. 10월 19일부터 벽사역 찰방·장흥부사·강진현감·전라병사들은 일제히 농민군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적지 않은 농민군이 집을 헐리거나 곤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흥·강진 지역 수성군의 위세를 본 농민군은 11월 초순 멀리 함열과 금구 등지의 농민군에게 지원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강진현에서도 10월 29일 순무영에 급보를 보내 강진현의 힘으로는 농민군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장흥의 농민군은 장흥 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11월 하순부터 웅치로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곧 이어 보성으로 이동하였고, 금구(김방서)와 화순(김수근), 능주(조종순) 등지에서 5천여 명이 도착하자, 장흥의 농민군 5,000여명과 합세한 이들은 12월 1일에는 북면 사창으로 진출하였다. 장흥부사 박헌양과 병영의 서병무(徐丙懋) 병사, 그리고 벽사 찰방 김일원(金日遠)과 강진현감 민창호(閔昌鎬)도 농민군의 위세를 듣고 서둘러 대비책을 마련하였다.12월 3일 아침 사창으로부터 벽사역 인근으로 진출한 농민군 1만여 명은 12월 4일 새벽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벽사역관에 포격을 가했다. 이미 역졸들은 도망가 버려 저항하는 세력이 없어 단숨에 점령하고 말았다. 벽사역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점령할 수 있었다. 벽사역을 쉽사리 점령한 농민군이 12월 5일 새벽 장녕성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쌌다. 동이 트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력부대는 정면에 있는 동문에 진군하였다. 죽창을 휘두르는 소리를 신호로 3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동문에 진공했던 농민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파괴하고 입성하였으며, 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하여 남문과 북문으로도 농민군이 입성하였다. 당황한 수성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이 광경을 본 박헌양은 문루에서 내려와 동헌으로 들어갔다. 1시간만에 장녕성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부사 박헌양을 체포하여 문책하였으나, 박헌양은 오히려 성을 내며 꾸짖다가 농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부사 이외에도 농민군의 공격을 막다가 희생된 수성군 장졸의 수는 96명이다. 전사자가 대부분이지만, 붙잡혀 항거하다 처형된 사람도 있었다. 특히 기실(記室, 부사 측근에서 기록을 맡았던 벼슬) 박영수(朴永壽)와 수성별장 임기남(任璂南, 昶南), 통장(統將) 주두옥(周斗玉), 호위장(護衛將) 주열우(周烈佑)도 같이 희생되었다.

탐방로그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 187-1 동학농민군 점령지 장흥관아 동헌터 표지석을 찾았다. 이 사적에 대한 정보는 http://182.162.143.76/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